전시장 한쪽에는 미국의 필립스 컬렉션 건물 사진이 걸려있었고, 나는 미국에서 살았던 무렵의 이런저런 추억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시라토리 씨는 작품에 관한 설명 이상으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더니 "정확한 작품 해설 같은 것보다 보는 사람이 받은 인상이나 추억 같은 걸 알고 싶어요."라는 게 아닌가.
기분이 훨씬 유쾌해진 나는 기억의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잡다한 추억을 전부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울적했던 워싱턴의 사무실이나 파리에서 살았던 아파트 바닥의 헤링본 무늬 등 사소한 이야기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기꺼이 들어주었다(아마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헤어진 연인의 집에 있었던 지나치게 물렁한 매트리스의 감촉과 그에게 던졌던 욕까지 뒤엉켜서떠올랐다. 미국, 프랑스와 관련이 깊은 필립스 컬렉션은 잠겨있던 내 기억의 상자를 여는 열쇠나 다름없었다.
신나서 너무 떠든 탓인지 한 중년 여성이 "저기요, 아까부터시끄러워요!"라고 강하게 항의해서 당황했다. 뭐야, 미술관은당신의 전유물이 아니야. 이렇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마이티가대신 "죄송합니다"라고 답해서 소곤소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나와 마이티는 20년 동안 수많은 예술 작품을함께 관람해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재미있었지." "그러게." 하는 대화밖에 하지 않았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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