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맨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새로운 식당에 들어간 나는 새로운 음식에 대해 도전하고 싶은 마음과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골랐을 때 오는 불쾌함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이전에 먹어 보았던 음식과 최대한 비슷한 음식을 고른다. 그 갈등의 과정이 꽤나 길어 나는 스스로 '결정 장애'라고 여긴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새로운 문제와 실패의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패턴 속에 가둔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지루해진다. 새로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삶이 이렇다.
  실패하라! 패배하라! 나쁘게 굴어라! 놀고, 위험을 무릅써라. _p.150

 ≪다이스맨≫의 루크 라인하트는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주사위.' 정신과 의사인 루크는 주사위의 확률대로 선택지를 만들어 놓고 주사위를 굴린다. 주사위가 시키는 대로 아랫집에 사는 알린을 강간한다. 부정을 취한 루크는 주사위로 하여금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고, 이내 주사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루크는 본인 스스로 '주사위맨'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주사위의 힘을 확인한 루크는 '주사위 치료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신과 환자들에게 주사위를 굴리도록 시킨다. 점차 영향력을 확대시킨 루크는 주사위 센터를 설립한다.

  나는 항상 두 가지 원칙을 따르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첫째, 내키지 않는 선택지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둘째, 언제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고 주사위의 결정을 따른다. 성공적인 주사위 인생의 비결은 주사위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다. _p.98

 

  ≪다이스맨≫은 독특한 방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책의 저자는 본명이 아닌 소설 속 주인공을 예명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설정에 맞게 소설 역시 '자서전'의 형식을 띄고 있다. 루크에게 주사위는 통제와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재다. 그는 주사위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자아들을 만들어낸다. 새롭게 등장한 자아들은 소설의 초반부에 우리가 알고 있던 루크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거리가 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루크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들이 순식간에 변한다. 때로는 예수가 되기도 하고, 교수가 되기도 하며 다양한 자아들이 등장한다. 처음 그의 '주사위교'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때, 소설의 내용을 따라가는데 조금 무리가 있었다.

  보통 소설과 자서전은 3페이지쯤에서 주인공이 울보로 확정되고 나면, 347페이지쯤에서는 책이 완전히 눈물에 잠겨버린다. 주인공이 꽥꽥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인 경우에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일관되게 고함을 질러대며 앞으로 나아간다. 주사위맨은 이런 자아, 이런 성격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안타깝게도 성공적인 자서전의 선행조건을 파괴해버린다. _p.361

  ≪다이스맨≫은 거짓과 가장이 사악하다고 여기는 사회 규범에 대한 반란을 다룬 소설이다. 그동안 사회는 정직과 솔직함을 건전한 것으로만 여기는 윤리의식을 강요해왔다며 루크는 그것을 부정했다.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새롭고 다양한 자아들을 경험해야 하는데, 사회는 그것을 허용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실천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무작위성'을 지닌 주사위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루크의 주사위교를 믿고 실천한 사람들 중에서는 그동안 사회가 강요했던 윤리의식을 벗어던지고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했다.
  조지 콕크로프트(≪다이스맨≫ 저자의 본명)은 강요된 윤리 의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성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독 ≪다이스맨≫에서는 성교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성적인 영역은 자유와 쾌락은 많은 사회에서 억압되어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상황만 보아도 아직까지는 쉬쉬하는 분위기이니 말이다. 그러나 자유나 쾌락의 해방을 성적인 영역에서만 풀어낼 수 밖에 없었는지, 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불행의 기원과 대책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문명이 불행을 퍼뜨리는 속도가 더 빠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실수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일되고 단순하고 안정적이었던 과거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규범의 이미지를 가져왔습니다만, 그 규범은 복잡하고 다원적인 오늘날의 문명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직'과 '솔직함'이 건전한 인관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우리 시대의 윤리에 따르면, 거짓과 가장은 사악하다고 여겨지죠. _p.496

  1970년대에 쓰여진 이 소설이 복잡하고 다원적인 오늘날 눈에 띄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억압에 의해 자아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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