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수유병집 - 글밭의 이삭줍기 정민 산문집 1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경<대전大田>저기에도 남은 볏단이 있고, 여기에도 흘린 이삭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여기저기 떨군 볏단과 흘린 이삭이 남아 있다. 체수유병집은 바로 이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 고전과 관련된 전방위적 분야를 탐사하던 정민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요청에 따라 글을 써 왔고, 글을 쓰는 순간의 표정과 생각들의 이삭을 줍고자 한다. 체수유병집은 그가 열심히 일궈온 모든 볏단과 이삭들을 모아 둔 산문집이다.

독서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고, 그가 가장 좋아한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그의 생각들, 어렵다는 이유로 기피했던 고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전하고 말들을 글로 풀어낸다. 한 챕터를 읽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지만, 책을 덮고 나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한 책이다. 특히 마지막 4<맥락을 찾아서>를 읽고 나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긴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 이 책이 나의 2018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만 책이 아니다. 독서는 문자를 빠져나와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위력적이다. 삶의 행간을 읽고, 드러나지 않는 질서를 읽을 때 독서는 비로소 완성의 단계에 진입한다. 남들이 같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가지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이 내 삶 속으로 걸어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독서는 사실 이 단계에 진입하기 위한 연습 과정일 뿐이다. (p. 13)

 

체수유병집을 통해서 정민 교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독서에 대한 철학을 밝힌다. 작년을 너무도 급하게 보내버리고, 올해는 어떤 계획을 세울 새도 없이 벌써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매년 그랬듯이 독서에 대한 계획은 모든 계획의 첫 시작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내게는 그 어떤 목표보다 가장 와 닿는 목표이고, 달성하기에도 다른 목표보다는 쉬운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체수유병집을 읽고 나서는, 독서에 대해 내가 너무 쉽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서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준은 다양하고 어느 누가 쉽게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동안 텍스트적 사고에 머물러 있던 것이 아닌가라는 스스로의 습관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는 없었다. 독서 이후에 그것을 온전히 체화하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의 기반으로 자리매김 한 적이 있었는지.

 

담론으로 읽고, 겉멋으로 읽고, 남 따라 덩달아 읽으면 텍스트는 늘 나와 따로 논다. 텍스트가 내 것이 되려면 텍스트 읽기의 주체가 남이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 논문 작성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문제를 알아야 문제를 해결하겠는데, 문제가 뭔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p. 226)

 

스스로 가진 독서 습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체수유병집의 마지막 장에 이르자 급하게 떠나보낸 2018년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복학 후에 논문 수업을 들으면서, 스스로 많은 텍스트를 찾아 읽어야 하는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독서를 하면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을 조금은 키워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찾아 읽고 있는 텍스트는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놀고 있었고, 더구나 촉박한 마감 시간 일정을 맞추느라 텍스트를 분석하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체수유병집에서 그랬듯이 스스로 문제가 뭔지 모른 채, 그저 점수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더욱 텍스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어려웠을 터였다.

 

대학은 그대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렘과 흥분은 얼마 못 가 심각한 혼란과 좌절로 바뀔 것이다. 누구나 그랬고 언제나 그랬다. 대학은 끝내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다. 이제는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제힘으로 풀어야 한다. 기댈 언덕은 없다. 물러설 곳도 없다. (p. 260)


그리고 2월이 되면, 나의 지난 대학 생활도 끝맺게 된다. 추수가 끝난 뒤의 나의 들판에 여기저기 떨군 볏단과 흘린 이삭들을 주워 모은다면 얼마나 될까. 다음 추수를 위해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릴 준비는 된 걸까. 체수유병집은 어떤 반성 없이 한 해를 떠나보내고, 어떤 준비 없이 한 해를 맞이한 내게 여러 질문들을 남겼다. 정민 교수가 텍스트를 통해 담은 생각들을 잘 다듬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온전히 내게 달렸음을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