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재 동문선 현대신서 41
아티크 라히미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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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먼지가 묻어 있다. 사과를 닦는다. 그런데 사과를 닦는 그 스카프에도 역시 먼지가 묻어 있다. 먼지가 사과에 더 묻는다. 이 상황은 꽤 절망적이다. 희망이라고 생각한 사과에 자꾸만 먼지가 묻는다. 벗어나려고 하면 먼지가 더 묻는다. 처음보다 먼지가 더 묻은 사과를 먹어야만 한다. 먹을 수 있는 건 사과뿐이다. 사과는 우리의 상황에 희망이란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는 그 전쟁을 저지하지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건 우리의 의지와 혹은 우리의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전쟁과 폭탄이라는 건 항상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떨어진다. 전쟁이란 마치 형식적인 것 같다. 마치 게임과 같다. 실제로 죽는 사람과 그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주 다르다. 그들에게는 누가 죽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우리는 이유도 모른 체 가족을 잃고 자식을 잃고 혹은 내가 죽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죽음을 그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책감도 없다. 그들은 피를 봐도 무너진 건물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들에게 전쟁은 무엇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 수단에 사람들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마음이 찢긴다.


"틀림없이 탱크들이 여기에도 온 것 같아. 가게 아저씨도 목소리가 없잖아요. 건널목지기 아저씨도 목소리가 없고....... 할아버지, 소련 군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를 빼앗아 가려고 온 거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다가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할아버지는 왜 목소리를 그냥 가져가게 내버려두었어요? 목소리를 주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어요? 할머니는 목소리를 주지 않았나 봐, 그러니까 죽었지......"

 

"말을 한다는 것도 소용이 없더이다. 형제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을 땐, 말을 한다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거라오. 그건 눈물과 같은 거요."

 

소년은 자신이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소년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소년에게 너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전할 길이 없다. 그 말을 전할 방법이 없고, 그 진실을 소년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왜 귀가 들리지 않냐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를 잃은 사람에게 이미 없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은 나의 방식을 강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니...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게 될 뿐이니.


살아남은 자들은 이야기한다. 죽은 자들을 보며 이야기한다. 무슨 죄를 지어 살아남았을까, 왜 그때 죽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한다. 죽은 자들을 부러워한다. 살아남아서 다시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앞에서 울부짖으며 죽어간 자신의 아내, 아들, 부모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괴로운 날들을 보낸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눈앞에서 가족이 불타는 것을 본 그들에게 남아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의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기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각자는 각자의 슬픔에 잠겨 있다. 나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곁을 내주지 못한 채 타인을 밀어낸다. 하지만 그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슬픔은 상대적이어서 다른 누구의 슬픔보다 나의 슬픔이 가장 크기 마련이다. 슬픔이란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나의 슬픔으로 다른 사람의 슬픔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 어느 누구의 슬픔도 더 크게 위로받아야 한다고, 내 슬픔을 봐달라고 소리칠 수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슬퍼하는 것 같이 그가 얼마나 슬플까를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의 슬픔을 내 입장에서 느껴본다면 우리는 단식을 하는 그들 앞에서 자장면을 먹는 그런 비인간적인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상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비인간이 되어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가 되어보지 못하기에, 얼마나 아플지 모르기에 폭탄이 터지고 전쟁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무관심하게 거리를 지나가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너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때, 바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서로의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우리는 각자 슬퍼 울부짖다가 지쳐 죽고 말 것이다. 결국 모든 게 나의 탓이었다며, 이 나라에 태어난 것까지 전부 내 잘못이 되고 만다. 그런 것까지 잘못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아무것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길을 간다."

그리고 그는 다시 길을 간다. 죽은 아내의 스카프를 쥐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들 무라를 기다릴 것이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길을 간다고 하는 것, 나는 거기에서 잿빛 가득한 희망을 본다. 그가 길을 가다가 다시 멈추고 절망하고 슬퍼 울부짖는다고 해도 그는 다시 길을 갈 것이다. 그가 아들 무라를 찾아온 것처럼,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그가 다시 걸어가는 것, 그것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음을 전하는 것 같다. 눈물이 가득하고, 소년은 귀를 잃었고, 아들 무라는 거짓에 휩싸여 있지만, 아직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우리에게 시간이, 인생이 남아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걸을 수 없을 때조차 그것을 멈추면 안 된다. 내가 걷고 있는 한, 너도 걸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걸어가 줄 것을 그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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