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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잔잔하면서 애절했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만 느릿하게 걷는 것 처럼, 사랑과 아픔이 천천히 다가 왔다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가슴 벅찬 희열과 사무치는 고통의 서러움이 다급함 없이 느리게, 몇 번이고 곱씹어서 살살 뱉어 놓듯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말투와 분위기는 사랑하며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색깔을 띄며 변해 가는지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상실의 시대]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은 이른 봄 처음 걷는 숲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설레임과 안타까움들이다. 순수한 사랑, 가슴 뛰는 충동의 싱그러움은 복잡한 삶의 실타래 속에서 자꾸만 기운을 잃어 간다.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새로운 만남으로, 원래의 투명한 빛깔은 자꾸 덧칠을 당하게 되고, 그래서 처음의 색깔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까지, 아니면 원래 이런 모습이었다라고 강요당하는 지경에 이를때 까지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닥치고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 이 세사람은 마치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처럼, 눈빛과 행동으로 소통하고 메시지를 던진다. 몇 마디의 대사를 간간이 섞어서.
세상에 잘 섞이지 않고 그들 대로의 원색을 간직한 이들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한 폭의 잘그린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다 점점 이야기가 전개되고, 가까이 들여다 볼 수록 덧칠이 되고 수정이 되어 본래의 채도가 둔탁해져 버려서,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버리고, 그런 이유때문에 이들은 고통받는다.
성장이 괴롭고 힘든 것은, 그것이 많은 변화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고통을 그려내면서 이전에 아름다웠던 것들은 어디로 가버렸냐고 질문하고 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인생을 겪어낸 다는 것이. 말 못할 비밀이 하나 둘 쌓이고, 더이상 해맑게 웃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또 어떤 의미와 기쁨을 애써 찾아내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인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뒤돌아 보면, 당연히 누구라도 놀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의 그 환희와 열정은 다 어디로 사라졌냐고.
[상실의 시대]는 글쓰기 연습을 위해 중고로 구입을 했다가, 새책으로 살 걸 하는 후회를 남긴 책이다. 선정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지나치게 개인적이며 사변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름답고 감성적이며, 미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소설이라는 점 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