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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 고종실록 - 쇄국의 길, 개화의 길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교양만화 중에서 가장 높은 인기와 호응을 얻고 있는 박시백 화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20권으로 기획된 이 장대한 시리즈도 어느덧 끝날 때가 되었다. 벌써 19권이 나왔으니 말이다.
19권은 조선왕조의 황혼기인 고종 임금 시대이다. 모두가 잘 아는대로 고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했고, 그래서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섭정으로 나라를 대신 다스렸다.
흔히 흥선대원군은 무능력한 왕실 대신, 조선의 실권을 잡고 독단 정치를 행하던 안동 김씨 가문으로부터 경계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던 '상갓집 개'라는 비아냥을 듣도록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시백 화백은 이런 통설을 19권에서 부정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전에도 왕실을 대표하는 직책을 지냈으며, '상갓집 개'라고 불릴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야사나 통설보다는 실록에 기록된 사실 위주로 풀어나가는 박시백 화백의 관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10년은 조선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자 희망이었다. 확실히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혁신을 펼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제까지 세금을 안 내던 양반들에게도 한 사람 당 2포 씩의 세금을 걷었고(비록 양반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들이 거느린 종의 이름으로 내게 했지만), 수백년 동안 천대받아오던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사람들도 적극 등용했으며(이런 지역 차별 때문에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독버섯처럼 창궐하면서 지방 백성들을 괴롭히고 이권을 쥐어짜내던 말썽 많던 서원들도 47곳만 남겨놓고 모조리 철거해버렸다.
하지만 그 역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이 강했던 조선 초기로 돌아가려 했다. 그래서 국고를 탕진하고 돈을 마구 찍어내어 국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경복궁 재건에 집착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흥선대원군을 열렬히 찬양하던 민심이 그를 미워하던 쪽으로 바뀐 계기도 바로 이 경복궁 재건 때문이었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출범 이후 무려 90%에 달하던 어마어마한 지지율을 받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제위기인 IMF 이후 온 국민의 원성을 듣던 처지로 전락했던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흥선대원군이 찍어내던 돈인 원납전도 '원해서 바치는 돈'이 아니라 '원망하며 바치는 돈'이라고 시중에서 불리기도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흥선대원군이 활동하던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였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과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세계 각지를 침략하며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조선이라고 비켜갈 수는 없었다. 비록 대부분의 서구 열강들은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골몰하고 조선에는 그다지 힘을 기울이지 않아, 프랑스와 미국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변방의 작은 소동으로 끝났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조선 옆의 일본이 서구 열강을 두려워하여 그들과 똑같은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나 조선을 넘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흥선대원군이나 그 뒤를 이은 고종 임금 및 명성황후도 일본의 검은 속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야심에 불타는 일본을 국가 운영의 동반자로 생각했다. 가족들을 잡아먹으려는 늑대를 착한 개로 인식하면서 집안으로 불러 들인 꼴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황혼에 접어든 조선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는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