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오가해.설의
함허득통 지음, 이인혜 옮김 / 도피안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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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팔영루의 주련에서 야부 도천 스님의 시를 발견하고 그 시의 출전이 금강경오가해임을 알고 사게 된 책이다.

참으로 좋은 책을 만난 것 같다. 좋은 고전을 현대인이 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강산무진'이라는 소설집 속의 <뼈>라는 단편에서 김훈은, 화자의 입을 빌어 밥 때가 되자 밥을 먹고, 밥을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씻는 일은 현묘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그것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은 '금강경강해'(통나무, 1999)에서 이 대목을 해설하면서 금강경이 부처와 그 무리들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 속에서 말하여지고 알아들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나는 도올의 글을 읽으면서 그처럼 상례적인 일상의 구체성에 감격하는 그의 놀라운 놀라움이 놀라웠다.(강산무진 132쪽) 라고 쓰고 있다.

나도 도올 선생의 감탄에 대하여 김훈 씨처럼 상례적인 일상의 구체성에 감격하는 그의 놀라운 놀라움이 놀라웠다. 하지만 이 '금강경오가해 설의'를 읽자, 일상의 구체성이야말로 진실로 놀라움이라는 복음을 접하게 된다.

사실 불경처럼 어렵고, 조사들의 공안처럼 어려운 것이 또 어디있는가?

책 333쪽 '법대로 수지함' 편(如法受持分)에서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기술된 바와 같이, 장로 수보리(Subhuuti)조차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다고 한다. 아무런 말씀도 없는 불경을 백천만번 들여다 본 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똘똘 뭉쳐진 나와 같은 짐승(衆生)이 읽어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에게 금강경을 이해시켜주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읽은 금강경 중에서 그나마 불교에 다가가 피상적으로 나마 읽고 "아하! 그런가 보다" 하는 자만심에 빠져들게 해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도올 선생의 '금강경 강해'보다 이 책이 주는 느낌은 강렬하고 독특하다. 규봉 종밀(圭峰 宗密 : 780~841), 육조 혜능(六祖 慧能 : 638~713), 재가거사인 부대사(傅大士 : 497~569), 야부 도천(冶父 道川 : 송나라 1100년대로 추정), 예장 종경(豫章 宗鏡 : 알려진 바 없음)의 오가(五家)의 주석이나 詩(解)에 함허 득통(涵虛 得通 : 조선 1376~1433)의 설의가 금강경의 이해를 돕는다고 말하기 보다 강력한 에너지 장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금강경오가해 설의'(金剛經五家解 說誼)의 특징을 보면,

금강경 본문을 놓고,

  • 규봉의 찬요(纂要)가 금강경의 본문에 대하여 대체적인 개요를 짚어준다.
  • 그 다음에 육조의 해의(解義)가 금강경의 말씀의 뜻을 해석해주는데,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스님의 해설이라기에는 해의 그 자체가 금강경의 논서로써 최고봉이 아닌가 싶다.
  • 부대사는 찬(贊)을 달았는데, 삼성(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는 유식론적 입장에서 금강경을 노래한다.
  • 야부는 송(頌)은 설명 대신 착어(着語 : 선가에서 공안에 붙이는 짤막한 평)와 선시로 대신하는데, 야부 도천 스님의 詩는 음미할 만 하다.
  • 종경은 제강(提綱)을 달았는데, 무상(無相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음)을 골자로 경의 취지를 말한다.
  • 그리고 윗분들 오가해에 함허가 설의(說誼)를 달아 이해를 돕는다.

사실 이 오가해를 통해서 반야부에 위치하는 금강경을 후대의 유식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선(禪) 문학적인 체취를 즐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是故 佛說一切法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그러므로 부처가 말하기를, '모든 법에는 자아도 없고, 인간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도 없다.'고 하였다.』(491쪽 究竟無我分 중)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야부 도천 스님은 이렇게 노래한다.

借婆衫子拜婆門
禮數周旋已十分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할머니 저고리 빌려 입고 할머니께 절하니
그 예의 충분히 법도에 맞는다
대 그림자 층계를 쓸어도 티끌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상(我相 : 몸과 마음이 나라고 여기는 견해), 인상(人相 : 식별되는 눈 앞의 대상 세계와 남들이 실재한다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중생을 중생이게 하는 무명의 번뇌가 실재한다는 견해), 수자상(壽者相 : 어떤 깨달음이 있다고 보는 견해) 모두 없어야(無相) 하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나와 세상 그리고 번뇌와 고통이 있고, 마침내 온갖 번뇌를 끊은 깨달음의 경지가 있다'고 믿는다.

금강경을 그런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대나무 그림자로 빗자루를 만들어 대웅전 뜰 앞의 낙엽을 쓸거나, 달빛을 주워 호롱불을 대신하여 금강경을 읽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할머니의 저고리라도 빌려 입고자 하는 욕심과 어리석음을 어쩔 수는 없다.

참고 : 금강경 속의 네가지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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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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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누님이 다니던 학교의 국어선생이 학생들을 위하여 철필로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여 만든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몇편의 시와 산문들을 모아 만든 이 책은 한 구절을 읽으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사준 호마이카 책상 위에 그 책을 펼쳐놓고 몇번인가 읽었고 윤동주가 살던 용정이란 곳은 산이 동산처럼 자그맣고 밤이면 별들이 쏟아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詩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詩를 쓰다보니 詩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그 후 詩라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김경주의 詩를 읽으면 신난다.

기형도의 詩도 좋지만, 김경주의 詩는 신난다.

사쿠라 같은 냄새 때문에 더욱 좋다.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1만 3천부가 팔리는 등 공전의 히트를 쳤는데, 詩를 쓰는데 든 종이값에도 못미치는 5백만원 정도의 인세가 들어왔다면...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 시집이 1만 3천부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고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순노가리다. 인세가 5백만원이라면 자본주의 사회란 정말로 굶어 죽은 시인의 사회다. 그래서 시인은 빈혈에 시달린다. 즉 철(Fe) 없는 작자들이 쓰는 것이 詩다.

김경주의 시를 읽으면, 단지 시는 허구와 함수관계를 갖고 있을 뿐이며, 영혼과는 무관하며, 시는 가슴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을 인공적으로 짜깁기한 순 네다바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조오타. 시원하다.

그의 구라가 재미있다. 때론 어울리지 않게 장중하며, 때론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때론 정신분열증이라서 말도 안된다.

말도 되지 않는 그의 말(詩)이 좋다.

詩에 아무런 틀도 없는 그의 詩는 잰 체하고 고리타분하며 지겨운 詩들을 향하여 딴지를 거는 신선함이 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언어고 詩일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가 시인이라면,

노가리가 되었든 네다바이가 되었든 구라가 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가슴으로 쓰는 詩도, 영혼으로 쓰는 詩도, 돈벌자고 쓰는 詩도, 폼 잡자고 쓰는 詩도, 존재할 이유가 없는 자들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쓰는 詩도, 나처럼 X도 모르는 놈이 쓰는 詩도, 다 詩라고 하자.


김경주의 시는 다 읽는 것보다 조각으로 읽는 것이 더 좋다. 어떤 시는 단편소설보다 더 길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지만, 그럴 듯하고 그럴 듯한 만큼 헷달리는 이 시 구절은, 알 수 없는 내 영혼처럼 나와 무관하며, 정말 귀신처럼 아무 것이나 될 수 있다. 그러니 몽당빗자루가 되었든, 한밤중에 텅빈 교실에 머무르는 그 무엇이건, 내 영혼이 되건 간에 개의치 않아도 된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詩의 각주에 제법 그럴 듯하게 '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고대 시인 중 침연이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실존하지 않았던 사람의 글이라면 있을 수 없지만,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노가리가 아닐 수 없는 법이다.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생들이 있다"

내가 태어나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외롭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은 목숨이 아닌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와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生들과...

도대체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대들과 나란한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라고 쓴다.


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7.14일 간)보다 <기담>(2008.10.31일 간)이 못하고 <시차의 눈을 달랜다>(2009.2.10일 간)는 더욱 재미없다. 이는 그가 시집을 내고 난 후 제도권 시인이 되어간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그의 첫 시집처럼 시같지 않은 詩를 써주었으면 한다. 시라는 것이 노가리라도 네다바이라도 더욱 자유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시집은 詩에는 틀이 없으며, 어느 방향으로 튀어도 괜찮다는 이정표가 아닌 나침판이 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주목한다. 교과서같은 詩가 싫다.


사족 :

그의 시집 기담에는 주저흔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각주에는 '주저흔은 hesitation marks, 자살하기 직전 머뭇거린 흔적'이라고 쓰여 있다. 한번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이 단어를 보며 흠칫 놀랐다.

자살하기 직전, 죽음 앞에서 머뭇거린 상처의 흔적

내 삶 또한 죽음 앞에서 먹고 살자고 하는 얕고 떨리는 가느다란 상채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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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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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출판사의 "2013년에는 Go Back To Your Book! 행사"에 응모한 후 깜빡 잊고 있었는데 당첨이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세 권인가 응모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 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쇼몽'이 당첨되어 집으로 배달되었다.

단편집이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에도 '라쇼몽'(1950年作)이 있지만 류노스케의 것과 내용이 다르다.

류노스케의 소설은 '지옥의 47번지 2호'에 살고 있는 내가 읽기에는 몹시 적당하고 어울린다.


한참 읽다보니.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의 원작은 류노스케의 단편'덤불 속'이다.


Rashomon/movie

추가>

  • 오늘(5/19일) 영화 '라쇼몽'을 케이블 티브이로 다시 보았다. 영화의 도입부와 뒤는 '라쇼몽'을 각색하였고, 사무라이 살해의 전말을 다룬 영화의 메인 부분은 '덤불 속'을 따서 썼지만, 소설 속에 없던 살해 장면을 목격한 제 3자의 시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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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이드 전쟁 - 황색 언론을 탄생시킨 세기의 살인 사건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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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7일 오늘, 우리나라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렇다.

   "'뉴스쇼 판' 끝 부분에 '거수경례'하는 건..." (조선)
   남양유업 회장 "법 지키면 경영 못해" (경향)
   '욕설 우유' 남양유업은 어떤 회사이길래? (한겨레)
   <오마이뉴스>에 기사 올리고 잘렸습니다 (오마이뉴스)
   "北 김정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한국)
   [단독]"유엔이 세운 대학" 사기극...정체는? (동아)
   충격적인 사촌누나의 '익명 고백' ...고백이 더 충격 (헤럴드경제)
   "女 은행원, 학벌 안 보고 고졸로 뽑았더니..." (한경)

헤드라인으로 미루어 볼 때, 남양유업 사건을 빼놓으면 며칠동안 우리나라는 몹시 조용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헤럴드경제의 경우 기사꺼리가 없다보니 온라인 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린 사실 자체가 확인조차 않된 글을 헤드라인으로 잡고 있다. 카페 게시판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론임을 언론사 스스로가 자인한 셈이다. 국정원 여직원이 집에 틀어박혀 '오유'등의 카페에 댓글을 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헤드라인의 말끝을 흐린 문장들은 신문 본연의 '보도'보다는 "잘 모르겠지?", "궁금하지?"라는 삐끼성글이다. 언론은 이제 노랗기는 고사하고 낚시언론으로 전락한 셈이다.

딱 50년전인 1963년 5월 7일의 헤드라인을 보자.

   5·16동지회 민간인 포섭에 적극 (동아)
   박의장 출마면 재야단일후보 필요 (경향)

1961년 5.16 쿠테타로 중단된 헌정질서를 복구하기 위하여 국가재건최고위원회에서 민정이양을 하고, 이양 후 10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5·16동지회(공화당의 전신)와 민주당 등 야당의 입장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헤드라인 만 보아도 보도내용의 대강이 잡힌다.

오늘의 헤드라인은 언론도 벌어먹고 살아야 하며,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뒤쳐지고, 발행부수가 줄어들면서 광고주들의 눈 밖에 나고 결국 적자에 시달리다 신문사의 문을 닫고 만다는 피 튀기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논리에 입각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한겨레'나 '경향', '오마이뉴스'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단지 시장이 진보적인 독자층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진실이나 정의보다는 당일의 신문부수를 올릴 짜릿한 기사가 필요하다. 짜릿한 기사가 늘 풍성한 것이 아니기에 반쯤 벗은 연예인의 사진과 남은 지면을 채워 줄 박스기사가 필요하며, 남는 지면은 광고로 빽빽하게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원제는 '세기의 살인'(THE MURDER OF THE CENTURY)이지만 '타블로이드 전쟁'이 훨씬 잘어울린다. 이 살인사건의 보도 경쟁에서 <뉴욕 월드>을 따돌리고 <뉴욕 저널>이 선두로 어떻게 올라설 수 있는가를, 이스트 강에서 토막난 사체가 끌어올려진 1897년 6월 26일 부터, 살인자로 추정되는 마틴 손이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하는 1898년 8월 1일까지, 밀도깊게 보도하고 있다. 그 이후 공범인 낵 부인이 출감을 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경찰, 신문사 기자, 사주들에 대해서 에필로그 형태로 기술하고 있기는 하다.

백여년 전에 벌어진 이 사건과 관련된 수사, 공판과정에 대한 보도에 있어서 콜린스는 이천오백년전 춘추의 기자였던 공자의 방식을 따른다. 공자가 "기술하되 짓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했듯이, 콜린스는 책의 7쪽에 「...인용부호 안의 대화는 모두 이들 기록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고, 장황한 부분을 생략하기는 했지만 내가 덧붙인 단어는 하나도 없음을 일러둔다」고 한다.

이 책은 픽션이 아니라, 백여년 전에 벌어진 사건들(Facts)에 대한 '보도'다. 세기를 격하고 있지만 콜린스의 보도는 세기말의 소란과 뉴욕의 시끌벅적함을 3층 건물 창 밖으로 내려다보듯 리얼하고 선명하다. 시체공시소의 포르말린과 방부제 속에서 은밀하게 시신들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거나, 당시에는 변두리였을 우드사이드, 브롱크스의 숲과 개활지의 황량함을 보여주거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터가 되어버린 낵 부인의 아파트와 주변거리, 그리고 사람들의 열기 속에 증거로 제시된 사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비벼지고 각종 추문과 엽기적인 추리들이 난무하는 제퍼슨마켓 법정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콜린스는 이런 뉴욕의 풍경 위에 사건을 나열함으로써 <뉴욕 저널>이 수위를 달리던 <뉴욕 월드>를 추월하게된 사례를 통하여 황색언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콜린스의 본질에 대한 천착은 학술적인 따분한 접근 방식이 아니라, 활기발랄함과 욕망이 범벅이 되어 흐르는 뉴욕을 배경으로 보도하는 형식으로 다양한 사실들(facts)을 시간 속에 입체적으로 펼쳐보이는 이야기적 방식으로 몹시 재미있다.

황색언론이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주의에 호소하는 신문의 경향을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사건 혹은 각종 루머 등 독자들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을 자극하려 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발생기원은 퓰리처가 「세계 최초로 컬러 만화를 신문에 실었다. (...) 경쟁 신문사에서는 <월드>를 만화 저널리즘이라고 비웃었다. 그래서 "옐로 저널리즘"이라는 별명이 생겼다」(35쪽)고 한다. 이미 옐로 저널리즘으로 독자층을 확보한 퓰리처의 <뉴욕 월드>에 대하여 <뉴욕 저널>의 허스트는 「굴든수프의 사건 수사가 (...) 너무 느리게 움직이면 (...) 자기가 직접 해결에 착수했다」며, 자기 집무실에서「"현대 언론의 진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를 보여준다. 행동 - 이것이 새로운 지표다. 경찰이 이스트 강 살인 사건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생각할 때 <저널>은 스스로 탐정단을 조직했다. 신문은 선동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씨부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문의 존재이유를 '보도'가 아닌 '선동'으로 신문사의 사주인 허스트가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문은 (소극적으로) 기사나 쓰면 안되며,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앞에 나아가 아주 자극적으로) 웅변(선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황색언론의 본질이지만 더 나아가 (선정적인 사건의) 취재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사건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하여)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토막난 사체가 과연 누구이고 누가 무엇 때문에 그를 죽였으며, 증거와 진실이 나란함으로써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토막살인 사건의 용의자나 수사, 그리고 증거물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풀어가는 수사관의 추리나 변호사와 검사들의 변론은 결정적이지 못하고 사건의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주변을 떠도는 개연성마냥 엉성하다. 사체가 굴든수프의 것인지조차 명확치 않고, 낵 부인과 그녀를 둘러싼 남편, 애인(굴든수프), 그리고 다른 애인(마틴 손)과의 치정 관계조차 분명치 않다. 책을 쓴 콜린스나 당시의 황색언론 모두, 토막난 사체가 '누구며, 누가 죽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지 모를 토막난 사체라는 엽기성, 내연의 관계임에도 피살자를 살해를 교사한 내연녀 그리고 그녀의 살인공모자와의 또 다른 치정. 그리고 배신.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면서 내연녀의 직업인 조산사와 관련된 불법낙태 그리고 유기되거나 버려지는 태아 등의 음산한 요소에 황색언론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와 그들의 취재와 보도가 어떠했으며, 그들의 보도에 뉴욕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고, 수사와 재판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은밀하게 증거 중심으로 인과관계를 따지고 사건의 원점으로 거슬러가야 할 수사는 황색언론들의 보도 탓에 흥미거리로 바뀌었고, 수사현장은 늘 사람들로 붐볐고 치정관계로 간을 맞춘 재판은 라디오도 TV도 없는 세기말, 세상의 온갖 잡놈들이 몰려든 뉴욕의 심심한 시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엽기적인 동시에 외설적인 이야기였고, 황색언론들로서는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엽기적이며 에로틱한 '세기의 살인'이었고, <뉴욕 저널>로서는 신문사 순위를 뒤바꾸어 놓을 대박사건이었던 것이다.

'굴든수프'의 사체가 맞는가? '마틴 손'이 '골든수프'를 죽이고 토막냈을까? 의혹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마틴 손'은 사형을 언도받고, 당시로서는 실험적이었던 '1750볼트 10암페어'의 전기가 짜릿하게 관통하는 전기의자에 앉게 된다. 「<이브닝 텔리그램>은 마틴 손이 평화로이 죽음을 맞다라고 전하고 <뉴욕 선>도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 마틴 손이라며 맞장구를 쳤지만, <헤럴드>는 독자들에게 처형 소식을 전혀 다르게 전했다. 마틴 손이 처참한 공포 속에 숨을 거두다. 여성 독자들을 늘 세심히 배려하는 <월드>는 마틴 손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 여성 영매가 손과 교감하다라고 전했다.」(357쪽)

이 세기적인 사건과 사형집행 과정에서 <뉴욕저널>은 1위의 언론사가 된다. 그 후 우리의 천안함 사건과는 약간 다르지만, 스페인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허스트에게 명분이 제공된다. 쿠바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전함 메인호가 의문의 폭발로 승무원과 함께 아바나 바다로 침몰한다. 허스트는 사건의 진상을 알 생각도 없이「확실한 전쟁! 스페인이 메인호를 폭파시키다라고 <저널>이 선언」(361쪽)토록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우유부단했던 대통령은 언론과 여론에 밀려 그만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한 나라,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황색언론, 더 나아가 낚시언론이라고 할지라도 그 힘은 가공스럽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면? 노무현 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유명을 달리한 것은 확증되지 못한 것들을 검찰이 (자신들이 말하는 빨대를 통하여) 낚시언론에 흘렸고, 검찰과 언론의 합작에 루머까지 가세한 더러운 말(言)과 말들의 홍수(流言)에 떠밀려 자살하게 된 자체가, "죄가 없다면 왜 뛰어내렸겠느냐?"는 거증이 되고마는 우리나라는, 노랗다 못해 얼마나 황당한가를 반성하게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뉴욕 저널>은 30만부의 전국 최대규모를 돌파하고, 50만, 100만을 찍고 150만부라는 세계 최대신문이 된다.

교만이 머리꼭대기에 이른 허스트는 자신의 영광을 탈환하기에 안간힘을 쓰던 퓰리처의 <뉴욕 월드>에 대하여 자신들의 <電文>을 훔친다고 비웃으며 레플리즈 W. 더누즈(Reflipe W. Thenuz) 대령의 사망 기사를 관계회사인 <이브닝 저널>에 싣는다. 이튿날 <뉴욕 월드>도 대령의 비슷한 부고 기사를 싣는다. 허스트의 편집자들은 더누즈 대령이라는 사람은 실존하지 않으며, <뉴욕 월드>가 올린 대령의 이름과 가운데 글자를 뒤집어 보면 '우린 뉴스를 훔쳐요'(We pilfer the News)가 된다고 밝힌다.

이 정도라면 신문은 경쟁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다. 「정확성-정확성-정확성!」,「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사실-현장감-사실!」(32~33쪽)이라는 문구가 보도국 안에 도배된 퓰리처의 <뉴욕 월드>는 선정성으로 야비한 독자들의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사실보다는 선동을 즐기는 허스트의 <뉴욕 저널>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뉴욕 저널>의 영광은 오래지 않아 저문다. 1951년 영화 '시민케인'의 주인공이자 언론왕 허스트가 죽고, <뉴욕 월드>가 합병과 합병 끝에 <뉴욕 월드-텔리그램 앤드선>이 된 것처럼, <뉴욕 저널>, <헤럴드>, <트리뷴>의 잔해와 뒤섞여서 <뉴욕 저널 트리뷴>이 되고 난 후 그냥 사라진다. 

사족 : 책에 대한 느낌

요즘 생긴 팩션(Faction)이라는 장르와 딱 들어맞는 소설적인 픽션 장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소설보다 이 책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파고 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있었던 기록들을 채집하여 당시의 뉴욕의 모습과 사건의 영상을 모자이크처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자들로 북적이면서 확장 중이던 뉴욕의 생기발랄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끔찍한 토막살인의 공모자로 기소된 '낵 부인'과 '마틴 손'에게 시민들이 보여주는 기괴한 연정과 열정적인 관심, 그리고 수사과정에서 어떠한 확실한 증거를 얻지도 못했고 공판과정 또한 어떠한 것도 제대로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배심원의 가결에 의하여 사형언도가 내려지는 찝찝함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세기말의 뉴욕, 그 소란스러움 속으로 이끄는 요소이며 흥미롭게 하는 요소다.

책의 모양을 보면,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싼거야 반문할 정도로 소박하다. 하지만 종이의 지질이라든가 제본은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마음에 든다. 우선 요즘 책들처럼 종이가 빛에 번들거리지 않아서 눈이 편하고 가독성이 좋다. 게다가 종이의 무게도 적게 나가고 호화양장본이 아닌 페이퍼백이라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한면당 글자수도 많아서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제법 뿌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휴대하기 편하고 가볍지만 내용은 제법 무게가 나간다. 떡제본이라는 점만 뺀다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책의 형태다.

그러니까 책의 형태와 책이 주는 지적인 체험과 줄거리의 흥미로움으로 치자면, 근래에 보기 드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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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울
최종현.김창희 지음 / 동하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1. 독자인 나의 좌표

책의 리뷰 이전에 우선 독자인 나의 좌표를 설정해 줄 필요가 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인 1964년부터 중학교 1학년인 1971년 사이, 서촌에 속해 있는 백송나무를 끼고 있는 통의동에 살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중학교 입시가 사라졌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과 다방구를 하거나 인왕산에서 병정놀이를 한답시고 신발이 해지도록 일대를 돌아다녔고, 곳곳에 친척집이나 학교 친구들의 집이 산재한 까닭에 왠만한 골목길을 모르는 곳이 없었고, 김신조 일당이 자하문을 넘기 전까지 인왕산 곳곳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오래된 서울'이라는 책이 학술적인 동시에 읽을거리가 풍부한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인문지리서라는 상찬(賞讚)을 많이 보았다. 서평이라야 믿을 것이 못된다지만 하지만 솔직히 나의 평가는 실망이다.

우선 이 책을 쓴 사람들이 이 지역에 대하여 박물학적 지식을 갖고 있고 문장이 좋다고 하지만, 서울 특히 서촌의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주제의식이 없다. 있다면 서촌의 풍경과 인물지리지 정도가 될 것이지만, 그 조차도 장동김씨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나머지는 이 지역에서 인생을 조져버렸다는 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서촌에 속한 것일까 북촌에 속한 것일까?

둘째, 서울은 조선의 도읍지로, 왕도정치의 이념 아래 설계되고 배열된 도시이다. 따라서 주례(周禮) 등 고제(古制)와 주역을 바탕으로 한 음양오행의 배치에 따른다. 하지만 책에는 삼산양수 정도의 언급만 있을 뿐, 조선의 왕들과 삼봉 등이 어떠한 아이디어를 갖고 한양을 건설했는가 하는 제도사적인 접근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인왕산과 백악산을 끼고 형성된 서촌 일대의 풍경과 그 좁은 계곡과 산등성이에 깃들었던 사람들의 음풍농월을 이야기하거나 아무개가 얼마만큼 땅을 가지고 있었고 부자였던가 식의 기술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셋째, 경무대와 청와대가 들어선 이후 이들 지역의 현대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예전에 궁정동이라고 해야할 지 효자동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으나 국민학교 여자친구의 집은 청와대와 담을 하고 있었다. 친구의 이층 창 밖으로는 청와대의 뜰이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칠궁 아래 시화문 쪽에 있던 동네는 그만 사라졌고 지금은 정부함동청사가 된 예전 국민대학 자리에서 청와대 사랑채까지 경복궁 서쪽 도로 주변의 민가는 몽땅 사라지고 기관인듯한 위압적인 건물들만 들어서 있다. 삼엄한 기세에 눌려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다짜고짜 어디가느냐고 묻는 정체모를 싸가지들만 얼쩡대고 있다. 이럴 바에야 효자동 뒷길로 피맛골을 내는 것이 맞다. 이런 상황이라면 손님을 맞이하는 청와대 사랑채가 아니라 차라리 행랑채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나이많은 국민 어르신에게 뭘 여쭤보려면 공무원은 관등성명과 이유를 대는 것도 모른다. 건국 이후의 독재의 강팍함과 경제일변도의 정책 탓에사람들이 이익만을 다투다 보니, 한양 정도 시 꿈꾸었을 이인(里仁)하는 마을의 뜻과 얼마나 배리가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은 없다.

마지막으로 현재에 대한 비판을 결한만큼 역사 인식마저 빈곤하다. 이 책과 관련된 누군가가 관련이라도 있는 듯 장동김씨의 찬양일색이다. 조선말 이들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뿌리부터 썩어내렸고, 비록 대원군이 집권을 했지만 열강의 각축 아래 속수무책, 일제에 병탄될 수 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부재한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는 책을 읽는 내내 야룻하고 불편한 기분을 주었다. 

그래서 '오래된 서울'에 대한 서평보다 내 나름대로 서촌이란 이런 곳이다를 말하고자 한다.

2. 도성의 의미

도올선생은 그의 '맹자 사람의 길 상' 276쪽에 " '좌전' 장공 28년조에 보면, "대저 읍(邑) 중에서 제후의 조상을 제사 지내는 종묘가 있거나 선대 군주의 신주를 모시는 곳은 도(都)라 하고, 그런 것이 없는 곳은 읍이라 한다.(凡邑, 有宗廟先君之主曰都, 無曰邑)"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같은 책 389쪽에는 "제후는 사직과 종묘를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경대부는 사직을 가질 수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분명 주나라의 봉건 종법에 따른 것이지, 그 후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과 조선은 공자의 사문(斯文, 즉 주나라의 문화)을 따르는 만큼 주례에 준하여 왕궁을 짓고 도읍을 배치했다.

도올선생의 글에는 조상(종묘)과 땅의 신(사직)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하늘의 신(천단)에 대한 언급은 없다. 분명 명, 청 등의 중국역대 왕조로 미루어 볼 때, 왕도(혹은 帝都)에는 천자는 천손이 강림한 것이라는 사상 아래 제천의식을 치루는 원구단이나 환구단 등 천단이 있었다. 우리도 고려 때까지 환구단이 있어서 기우제는 물론 제천의식을 치뤘다.

하지만 한양은 천단없이 시작된다. 비록 세조 때 잠시 운영을 한 적이 있고, 대한제국 시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환구단이 세워지나 얼마 후 총독부의 철도호텔의 부지로 점유되고 지금은 황궁우 정도만 초라하게 남아있다. 이는 삼봉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 사대부들의 맹목적인 모화사상에 입각한 것이든, 왕조가 개국 초기의 난관을 돌파하고 수성을 이루기 위하여 외교, 국방의 문제를 존명사대로 해결한 것이든, 조선이란 종묘와 사직 만 있는 명의 제후국이라는 비굴한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이와 같은 기생적 외교 국방과 선비들의 성리학에 몰빵한 모화사상이야말로 한글을 언문이라 하고, 중국의 형법인 대명률에 의하면 어쩌고, 주자의 말씀에 의하면 저쩌고, 기년상이 가하다 아니다 하는 형식주의적 말류, 예학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이런 개국 초기의 주체의식의 결여는, 결국 이 책의 168~169쪽에 나왔듯 "장동김씨들과 세교가 있던 송시열이 썼다는 '大明日月'이라는 또 다른 각자가 있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큰 명나라의 것'이라는 '대명일월' 구절은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졌던 의리론의 편린인데..."라는 양반 사대부들의 썩어빠진 의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왕도인 서울은 북경이나 동경은 물론 전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에 비하여도 산수가 수려하고 마을과 조화롭다. 궁궐과 육조 그리고 도성 내의 배치 또한 아정하여 "풍속이 어진 동네에 사는 것이 아름답다(里仁爲美)"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이루려고 한 왕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3. 경복궁, 법궁의 의미

경복궁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법궁으로 자리잡고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삼백년 간 궁궐 안에 나무와 숲이 우거져도 법궁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했다. 남쪽으로 숭례문을 두고 그 앞에 황토마루까지 궐외각사인 의정부, 육조(이, 호, 예, 형, 공, 병조), 한성부가 늘어섰고 사재감, 내자시, 내수사 등 궁궐과 물자 등을 소통하는 각종 기관들이 경복궁 주변에 포진하고 무엇보다 전조후침(前朝後寢 : 앞에는 조정, 뒤로는 왕실의 생활공간), 좌묘우사(左廟右社 :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이라는 정형적인 궁궐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직단에 가보면 네모난 단이 동과 서로 나란히 있는데, 동쪽의 단은 사단(社壇)으로 땅의 신을 모시고, 서쪽은 직단(稷壇)으로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직단은 어쩐지 작고 초라하다.

경복궁 서남쪽으로 적선동이 있다. 적선동은 사직로가 나는 바람에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도로가 없던 조선조에는 남북으로 이어져 있었고 적선방(積善坊)이었다.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 자리에는 얼마전까지 내자호텔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장흥고(長興庫)와 내자시(內資寺)가 있었다. 참고로 적선동에서 종축으로 남쪽으로 가면 동아일보 건너편, 동화면세점 자리는 이전에는 방화 1번지인 국제극장이 있었고 조선조의 동네이름은 여경방(餘慶坊)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한양에 정도할 당시 왕실에서 가진 경계의 마음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경복궁은 음양오행과 주 문왕의 후천팔괘에 입각하여 지어졌다. 적선동은 경복궁의 서남쪽으로 후천팔괘로는 곤방(坤方)이다. 이 곤방과 관련하여 주역의 곤괘 문언을 보면 "착한 일을 쌓는(적선) 집 안에 반드시 즐거운 일이 넘칠 것(여경)이요"(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내자시는 장흥고 등 왕실의 부고의 출납과 함께, 왕실의 쌀, 국수, 술, 간장, 기름, 꿀, 채소, 과일, 꽃 및 궁내 연회에 필요로 했던 직조 등을 관장했다. 이 자리에 들어선 내자호텔은 1960~70년대에 일본놈들의 기생파티로 유명했다. 육영수씨가 죽고 난 후에는 중앙정보부의 채홍사가 이 곳으로 연예인이나 아리따운 처녀들을 징발하여 박정희씨가 계신 궁정동 안가로 들여보내는 접선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자시가 꽃을 안가로 출납하거나 속곳을 벌려 왜화벌이를 하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다.

1979.10.26일 그 날도, 이 곳에서 채홍사를 만난 심수봉과 신재순은 중앙정보부의 차에 올라 궁정동으로 올라간다. 서촌 일대의 여염집에선 저녁상을 준비하던 7시 41분, 박정희장군은 제자이며, 후배이자 가신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가슴으로 받는다. 차지철을 죽이기 위하여 쫓아나간 김부장은 다시 들어와 쓰러진 박장군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탕! 확인 사살을 했다고 심수봉은 기억한다.

박장군이 이미 죽어 있을 밤 9시, TV에서는 "오늘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삽교천 어쩌고 저쩌고..."라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입대를 앞둔 나는 흑백 TV 속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그를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처참한 일이 벌어진 연고에 대해서 주역의 문언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말한다. 

"나쁜 짓거리를 일삼는 집에는 반드시 흉칙한 일이 넘칠 것이니, 꼬붕이 오야붕을 총으로 쏴 쥑이고, 자식이 아비를 쥑이는 일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니다. 그런 흉칙한 일은 점차 쌓여서 되는 것이라서, 어찌하다 이리되었을꼬 밝히자고 해도 그 처음은 말할 꺼리조차 되지 못한다."(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弒其君, 子弒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辯之不早辯也)

도읍을 정한 임금은 왕조가 만세까지 강녕하기를 바라며, 후대의 왕과 왕실에게 근신하고 경계하라는 의미로 적선방이라 동네를 이름짓고, 그 옆에 내자시를 두었을 것이다. 왕조는 어즈버 사라지고, 육백년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경계하고 근신하던 일이 그만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딴지를 걸고 쿠테타로 집권을 한 어느 불행한 가족사이기 이전에, 강팍한 군사독재 정권 아래 살아왔던 우리의 불행한 역사이기도 하고, 화불단행이라고 한 개인의 불선함의 참극은 그 후 전두환의 집권에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적선동과 경복궁 사이에는 예전에는 동십자각처럼 서십자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전차를 깔면서 서십자각을 헐고 선로를 냈다고 한다. 선로는 지금 청와대 사랑방 앞 효자삼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차가 모서리를 돌때, 쇠바퀴가 끼이익 끽 선로를 깍아내는 소리를 냈고, 밤이면 전차머리 위로는 파랗게 전기 스파이크가 일곤 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전차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인가 다니지 않았고 그만 선로는 뽑히고야 말았다.

4. 책과 서촌

얼마 전에 서촌을 거닐어 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 세상의 절반이었던 서촌은 이제 너무 좁고, 어리고 가난한 시절에는 열려있던 모든 곳들이 닫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골목조차 집 안에서 닫혀버려서 골목에는 더 이상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없다.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흘러나와 어느 곳에 고이고 서로 마주함으로써 마을이 되는 것인데, 이제는 이웃과 담을 쌓고 스스로 소외되는 집들 만 남은 탓에 행정구역과 호수만 남고 동네와 골목이란 불량배와 성범죄자, 강절도범만 우글거리는 곳이 되었다.

마을이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말(言)들이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이고 마실이란 이웃과 말(言)을 섞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섞이고, 서로를 나누며, 남의 집 자식을 제 자식처럼 감싸고 잘못을 허물할 수 있어야 그마을의 풍속이 순해지고 어진 마을(里仁)이 되는 것이다. 나의 친구가 동네 파출소의 순경이고, 동창이 슈퍼 주인이며, 옆집 갑식이네 엄마가 중학교 짝이라면 그 동네의 대문은 활짝 열리고, 아이들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주먹다짐을 하고 찔찔 짜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면서 커나갈 것이다.

하지만 사십여년전 내가 이 곳을 떠났듯이 모두 떠나고 또 모르는 사람들이 흘러들면서 서촌은 변했다. 책에 나온 벽수산장(어렸을 적에는 언커크라고 불리었고 당시에도 건물은 있었지만 허물어져 내리고 있던 중이었다) 아래에 있던 5학년 때 짝의 집은 어디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고, 서울 전체가 하얗게 내려다 보이던 누상동의 이모부댁으로 올라가던 그 가파른 언댝배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산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살던 동네로 가니 그렇게 넓었던 백송나무 밑의 공터는 어른 둘이 지나기 위해서는 어깨를 모로 세워야 할 정도로 좁았다. 그렇게 컸던 백송이 어떻게 가지를 펼쳤을까 싶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백송나무의 의미는 그늘 뿐 아니라 어린 친구들을 불러내고 소리치고 뜀박질하며 함께 할 그늘 밑의 빈 자리를 내 주었다는 것이다. 늙은 백송이 죽은 탓인지 몰라도 휴일 오후임에도 빈터에는 추사의 초상화만 담벼락에 걸려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책은 이미 죽어 흘러간 것들만 말한다. 하지만 거기에 살아있는 것들이, 그 동네들이 왜 이리 적막해졌는지 책은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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