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누님이 다니던 학교의 국어선생이 학생들을 위하여 철필로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여 만든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몇편의 시와 산문들을 모아 만든 이 책은 한 구절을 읽으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사준 호마이카 책상 위에 그 책을 펼쳐놓고 몇번인가 읽었고 윤동주가 살던 용정이란 곳은 산이 동산처럼 자그맣고 밤이면 별들이 쏟아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詩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詩를 쓰다보니 詩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그 후 詩라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김경주의 詩를 읽으면 신난다.

기형도의 詩도 좋지만, 김경주의 詩는 신난다.

사쿠라 같은 냄새 때문에 더욱 좋다.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1만 3천부가 팔리는 등 공전의 히트를 쳤는데, 詩를 쓰는데 든 종이값에도 못미치는 5백만원 정도의 인세가 들어왔다면...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 시집이 1만 3천부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고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순노가리다. 인세가 5백만원이라면 자본주의 사회란 정말로 굶어 죽은 시인의 사회다. 그래서 시인은 빈혈에 시달린다. 즉 철(Fe) 없는 작자들이 쓰는 것이 詩다.

김경주의 시를 읽으면, 단지 시는 허구와 함수관계를 갖고 있을 뿐이며, 영혼과는 무관하며, 시는 가슴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을 인공적으로 짜깁기한 순 네다바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조오타. 시원하다.

그의 구라가 재미있다. 때론 어울리지 않게 장중하며, 때론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때론 정신분열증이라서 말도 안된다.

말도 되지 않는 그의 말(詩)이 좋다.

詩에 아무런 틀도 없는 그의 詩는 잰 체하고 고리타분하며 지겨운 詩들을 향하여 딴지를 거는 신선함이 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언어고 詩일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가 시인이라면,

노가리가 되었든 네다바이가 되었든 구라가 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가슴으로 쓰는 詩도, 영혼으로 쓰는 詩도, 돈벌자고 쓰는 詩도, 폼 잡자고 쓰는 詩도, 존재할 이유가 없는 자들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쓰는 詩도, 나처럼 X도 모르는 놈이 쓰는 詩도, 다 詩라고 하자.


김경주의 시는 다 읽는 것보다 조각으로 읽는 것이 더 좋다. 어떤 시는 단편소설보다 더 길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지만, 그럴 듯하고 그럴 듯한 만큼 헷달리는 이 시 구절은, 알 수 없는 내 영혼처럼 나와 무관하며, 정말 귀신처럼 아무 것이나 될 수 있다. 그러니 몽당빗자루가 되었든, 한밤중에 텅빈 교실에 머무르는 그 무엇이건, 내 영혼이 되건 간에 개의치 않아도 된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詩의 각주에 제법 그럴 듯하게 '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고대 시인 중 침연이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실존하지 않았던 사람의 글이라면 있을 수 없지만,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노가리가 아닐 수 없는 법이다.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생들이 있다"

내가 태어나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외롭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은 목숨이 아닌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와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生들과...

도대체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대들과 나란한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라고 쓴다.


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7.14일 간)보다 <기담>(2008.10.31일 간)이 못하고 <시차의 눈을 달랜다>(2009.2.10일 간)는 더욱 재미없다. 이는 그가 시집을 내고 난 후 제도권 시인이 되어간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그의 첫 시집처럼 시같지 않은 詩를 써주었으면 한다. 시라는 것이 노가리라도 네다바이라도 더욱 자유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시집은 詩에는 틀이 없으며, 어느 방향으로 튀어도 괜찮다는 이정표가 아닌 나침판이 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주목한다. 교과서같은 詩가 싫다.


사족 :

그의 시집 기담에는 주저흔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각주에는 '주저흔은 hesitation marks, 자살하기 직전 머뭇거린 흔적'이라고 쓰여 있다. 한번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이 단어를 보며 흠칫 놀랐다.

자살하기 직전, 죽음 앞에서 머뭇거린 상처의 흔적

내 삶 또한 죽음 앞에서 먹고 살자고 하는 얕고 떨리는 가느다란 상채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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