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언니에게 민음의 시 165
이영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정이 넘은 시간, 나는 밤의 끈끈한 육감을 맛보았다. 『108번째 사내』이후 이영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언니에게』는 잘근잘근 언어를 노략질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숨겨둔 지느러미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추함을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움은 더욱 부각되기 마련이다. 56편의 시는 수족을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에 위태롭게 존재했다.

천변(川邊)의 인사법
 

천변은 냇물의 주변을 뜻하는 말이다. 시인은 약육강식 치열한 냇물의 모습이 아닌, 그 주변부의 미물을 다룸으로써, 이 시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경계인의 모습을 잘 포착하고 있다.

학교를 가려고
시체가 떠내려 온 천변을 지날 때마다
다리가 점점 투명해졌다
 

나는 매일 거슬러 오르느라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천변의 하류 쪽에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비가 오면
 

발바닥에서
두꺼운 지느러미가 자라났다

                                  -<물고기가 된다는 것 전문>
 

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시체가 떠내려 오는 천변의 하류 쪽에 집을 지었을까? 우리는 이곳에서 떠밀려오는 시체의 부패나 혐오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변해가는 화자의 변신을 읽게 된다. 이것은 급진적으로 말하면 시체와 동일시되는 '나'가 되는 것이고, 점진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포괄하는 내밀한 상상이 된다. 제도권의 학교와 그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유일한 연결고리는 천변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도 '나'는 지느러미가 자라남으로써 천변을 떠나 살 수 없음을 나타내고 비가 오는 한정적 시간 안에서 나를 아버지의 집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 천변으로 대변되는 문맥과 동일 선에 놓인다.

천변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습니다. 저녁이면 주머니 속에는 설탕이 가득했습니다. 태어나면서 배꼽 주위의 폭풍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하얗고 달콤한 종족처럼 가르르 웃었습니다. …… 거품이 떠다니는 천변은 폭풍이 오기 전입니다.
                                                             -<설탕을 먹는 저녁 중에>
 

폭풍이 오기 전이라는 시간은 상대를 탐하려는 욕망의 기다림이다. 자궁 속 태아가 외부와 유일하게 소통을 맺는 것이 탯줄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모태로 향한 근원적 그리움이 된다. '하얗고 달콤한' 순백이 거둬들이는 찰나 동안 우리는 그것이 영원할 거라 믿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큰 언니들은 손바닥으로 골목의 언덕을 잽니다. 남의 옷을 훔쳐 입고 남의 치즈를 훔쳐 먹고 어른이 될 때마다 이 도시의 하나뿐인 병원은 미어터질 지경입니다. 포성이 멈춘 시간이면 희희낙락하던 어제의 소년과 오늘의 소년이 함께 문병을 갑니다.
                                                                             -<자살법 중에>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성장의 시간이자, 파멸 뒤에 느끼는 상흔이다. 자본이 유입되고 도시가 세워지는 것은 바로 포성이 멈춘 시간이다. 말하자면 포성이 진행되는 그 시점이 잠시 유보됨으로써, 우리는 희희낙락하던 어제의 소년과 오늘의 소년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간의 평화이며, 역사가 전해주는 진실이다.

1
도시는 훌륭한 악기야. 태양의 흑점을 지나온 까만 인형들이 로비 창가에 앉아 머리를 기르고 있다. 지구가 반 바퀴 도는 동안 비릿한 고등어 냄새.

2
고등어 통조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사진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벨라지오 모텔 403호 창문에 기대 지느러미를 하나 둘 세어 본다. 통조림 뚜껑처럼 똑, 인형의 동공이 열리고

3
늙고 비늘이 많은 소년이 방으로 들어간다. 붓 한 자루처럼 검은 머리로 잠을 그릴 거야. 목 잘린 인형들이 방문을 발로 차며 먼지를 쓸어 낸다. 줄줄 녹아내린 고무 눈알이 창가에 모여 있다.

4
인형들이 웃을 수 있다면 즐거워라, 모든 질감이 만져지는 도어록. 비루한 잠 속으로 깍지 끼고 걸어 들어가는 소년 소녀들의 은밀한 지느러미를 만져 볼까. 인형이 열린 동공의 아이를 낳고. 이제 공산품 같은 여행을 떠나자
                                                                 -<벨라지오 모텔 전문>

매끌매끌한 살갗을 지닌 평화의 겉 껍질을 벗겨내면, 우리는 늙고 비늘이 많은 소년을 만나게 된다. 추함은 잔인성을 동반하고 그것은 엽기 혹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낯익은 충동이다. 그것은 내면에 간직한 폭력성이며, 이것은 겉으로는 온화한 웃음을 일으키는 가식이 된다. 인형들이 웃는 다는 것. 그것은 소년 소녀들의 은밀한 욕망이고, 폭력을 숨기는 거래가 된다. 거래는 통조림 속의 세상에서는 비일비재하고, 당장 이곳을 떠나도 저기도 그와 같다는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이 보인다.

욕망이 뒤틀린 염세주의적인 세계에서는 꿈을 갖는 내면적 자아와 꿈을 잃은 외부적 자아의 이중주를 읽을 수 있다.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서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언니에게 전문>



방이 있다. 그것은 곰팡이가 잔뜩 핀, 습기 가득찬 방이다. 이것은 물리적 구조로서 집이 갖는 방일 수 도 있지만, 감성적 공간으로서 화자의 내면 의식이다. 시의 배열은 밖에서 안이라는 공간적 이행과 아래에서 위라는 방향적 이행으로 이루어진다. 밖은 겨울밤이며, 춥고 낯설다. 안은 고요하며 어머니라는 존재가 주는 안온함을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을 축축한 냄새라는 표현으로 조금은 이질적인 느낌으로써 독자에게 이미지상 간극을 심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돌렸던 손잡이는 고정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떼어 냄으로써 내가 갖는 사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니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에피크로스 학파의 철학에서 쾌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지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을 기댈 수 없는 자신만의 이기심이기도 하다. 나의 행복을 원전히 받아줄자는 나를 위해 희생하는 쾌가 있는자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기에, 스스로 그러한 존재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내 혈육인 언니이다. 어머니가 피어내는 냄새 사이로 서리낀 창문에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지는 202호 창문. 그것은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다.
 

'불편' 동인에서 활동하는 시인의 이 같은 세계관은, 악역을 맡은 배우의 몸짓과 같다. 주인공이 덧 보이는 것은 그런 악역의 악랄함에 비추어지는 선이다. 선은 도덕적 고결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에 있어 선은 추한 욕망을 감추는 가면이기도 하다. 가면을 한 꺼풀 벗겨 냈을 때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언니를 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 - 진보의 시선으로 바라본 2010 한국사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0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 사회의 진실



필자는 책의 머리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직 실체적 근거에 기초해서 어떤 사안들이 우리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짚어 보고자 할 뿐이다. 모두 시장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제부터가 틀렸다. 2010년은 시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예측과 전망을 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시장 자체를 의심하면서 시장의 구조 개혁을 전망해야 할 시점이다. 이 책의 차별성은 …… 시장의 문제점을 짚고 그 개혁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제목에서 주어지는 '진실' 이라는 말과 실체적 근거는 조금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실체'라는 말은 '실존'- 즉 현 상황에 보이는 것 따위를 일컫는 말 같은데, 진실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체의 작동원리' '주 세력', '향후 방향과 그 대안' 는 것에 비중을 넓게 잡아야 할 텐데, 이렇게 얇은 책만으로? 또한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다소 감정적 반응으로 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시장은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옳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장과 합리성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 궁금했다. 머리말에서 책의 성격에 대해 서술한 것 같은데 '발상의 전환'과 '패러다임의 이동' 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기존의 책에서도 나왔던 말 아닌가? 기존의 것이 '모두' 라는 말과 함께 '틀렸다'고 한다면 앞서 말한 '발상의 전환'과 '패러다임의 이동'은 어떠한 점이 새롭고 독특하게 인식되었는지 살펴 볼 일이다. 더불어 이 글을 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일반 독자로서는 알 방법이 없어 그 성격은 단지 글의 내용으로만 유추해야 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불편한 감정이었다.



 

서론을 읽고 필자는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외환위기 이전과 전혀 다른 경제 시스템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문가의 눈이지,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은 어떻게 다른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가 강요했던 상식과 표준에 대한 근본 성찰과 구조 변동기라는 표현은 그 의미가 난해해서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평범한 다수의 국민이라고도 했는데 이것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고 했던 점과 비슷한 어감을 풍겨낸다. 의미의 폭을 줄이고 바라보는 시각에 명확한 구체성을 본론에서 잃는다면 이 책 역시 많고 많은 책 중에 하나다.


「1부 전환기의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에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글로벌 경제>는 2008년 9월 14일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면서 세계 경제체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밝혔다. 세계적 금융 패닉상태에서 세계의 유수 기구와 정부는 한결 같이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위기에서 실업문제와 소비 침체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한 실물분야의 침체는 앞으로 몇 년간 더 지속 될 거라는 학계의 지배적인 이야기를 저자 박형준은 말한다. 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망한다는 것의 의미로는 신뢰성 낮은 경제 전망 지표인 한국 개발 연구원과 삼성경제연구소의 자료를 대조하면서 정책 수립과 집행과정의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더불어 성장률의 지표인 GDP를 대체할 경제지표 개발의 시급함을 이야기하고, 그것은 사회 성원들의 삶이 개선 될 수 있는 경제 개념의 의미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현 정부의 근본적 성찰의 부족과 더불어 '자본의 급격한 유출 - 외환 시장 붕괴 - 증권시장 붕괴 - 실물경제 초토화'라는 패러다임적 성격을 G20에서 우선적으로 논의 되고 문제 삼아야 될 것이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저자가 이러한 점을 문제 삼고 대안을 촉구하는 글을 쓰려고 했다면 좀 더 명확한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라는 통시적인 관점과 '국내'라는 제한된, 그리고 그 영향에서 별도의 문제가 되었던 점을 충분히 간추리고 요약할 필요가 있다. 공통의 범주로 묶다보니 필자로서는 이것의 확연한 차이점을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G20에서 논의되었던 테마별 상황. 그리고 국내의 다국적 시장에 대한 침체와 폐해가 선뜩 수용하기는 힘이 들었다.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라는 큰 테마 속에서 글로벌 경제라는 큰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니 산만하고 더군다나 도식화된 이야기만 나와 깊이가 부족한 듯하다. 오히려 글의 마지막 G20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내세워 내수 경제와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의 진행을 이야기했더라면 조금은 완충된 핵심사항과 문제제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경훈의 <세계경제 엔진 미국경제의 현재와 미래>는 성장률이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점과 같이 미국경제에 대한 판단을 주어진 자료에 대입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표를 읽는데 그쳤다는 다는 점이다. 미국의 1929년과 2008년을 공통의 선상으로 높고 오늘날의 관점으로 판단 분석하는 것도 조금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산 시장의 버블이 붕괴하여 금융기관의 신용창출능력과 가계의 자산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소비지출이 급격히 감소한 공통적인 특징……1929년 1년동안 3퍼센트 하락한 것에 비해 무려 8배나 심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인구대비, 지역 대비적 현황, 그 밖에 버블 시장의 붕괴직전과 후에 정책적 변화 등의 변수 고려 대비, 경제 대비 지표율 자료가 충분히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지 신고전파 경제학의 득세라는 학문적 입장만 취하고 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표에 대한 설명을 앵무새 말 따라하는 것처럼 하기 보다는 공통의 범주와 차별의 범주를 나누고, 분석 시도 했으면 더 좋지 않을까도 생각해 봤다. 나열식의 설명만으로는, 저자의 마지막 말, '우울한'이라는 말과 '기대해본다'로 종결 어미로써 짓는 것처럼, 필자처럼 경제 문외한에게는 다가오지 않는 '우울함'이었다.


 

김병권의 1부 마무리인 <한국 경제의 탈출구는 어디인가>는 현재는 성장률 지표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든 비관적으로 전망하든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 자체로써 봐야하고 지금껏 진보와 보수의 해묵은 논쟁 '성장이냐 분배냐' '기업 실적이냐 가계 소득이냐'는 의제도 낡은 도식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국내외적 변수를 얼마만큼 고려하여 다양한 시나리오를 써 내느냐.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시나리오 플래닝과 더불어 그는 구조 개혁을 해야 한다면 고용 개혁, 금융 개혁, 정부의 경제 정책의 변화를 꼽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해법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할당된 지문의 비중을 고려할 때 핵심으로 꼽는 말에 힘이 크지 않다. 의미면으로 보자면 인식전환인데 이것은 그동안 수없이 논의 진행 되었던 과정이고, 저자의 말대로 새로운 대안적 접근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상대에게 전화를 걸 생각은 하지 않고 전화번호부만 읽고 있는 것 같았다.


 

「2부 한국 국민의 삶, 어떻게 바뀔 것인가」의 첫 문을 연 것은 이상동의 <금융위기에서 금융위기로, 고용개혁을 시작하자 '신 고용 전략'의 과제>이다. 저자는 정부의 고용 전망 자체가 낙관적이다, 고용 사정 악화를 기정 사실화 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역할을 포기 하고 있다는 근거로 정부 고용 전망이 가지는 문제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근본적 과제로서 한국과 같은 중진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는 노동자들에 대한 근로기준을 높이고 성장 이익에 국민 전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을 한다. 또한 해법으로써 국가 차원의 '신 고용 전략'은 공공부문의 고용 확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정부 역할의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근로기준의 강화라고 하면 일반적로 고용의 안정화와 임금 상승을 말할 수 있다. 그 외의 근로복지 등과 같은 전범적인 영역을 다루는 말이다. 따라서 저자의 근로기준을 높이라는 말은 다분히 추상적이다. 사실상 지금의 문제는 일자리 창출의 개수를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의 안정성 역시 보장되는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공공부분 확대라는 점에서 단순 노무 라는 이미지만을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입사 전까지의 준비과정까지 가계의 경제 지출 내역, 입사 후 그것에 따른 괴뢰감에 따른 혼란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는데 드는 비용. 등으로 소모되는 자본에 대한 연구와 그에 대한 해법이 명확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자리 개수만 늘리는 게 과연 효과적일까? 또한 공무원, 대기업의 입사 경쟁은 치열한데 반해 그 외의 직장은 사람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서열화로 새로운 신분제가 직장 내에서 생겨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저자가 내세운 근본적 과제는 단순한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더불어 우리는 지금 글로벌화와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불안정이 고용을 위협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말하기 전에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경제'라는 큰 틀에 넣고 분석하는 시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책은 '진보의 시선'이라는 말은 사용하고 있지만 그 진보가 누구의 진보인지 종잡을 수 없다.


 

이수연의 <한국경제의 뇌관, 가계부채를 해결하라 2010년 경제의 복병으로 떠오른 가계부채>는 가계 소득 감소 대비 부채 증가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정부와 은행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자꾸 책에서 '근본적' 이라는 말이 되풀이 되고 있다. 따라서 필자 역시 '근본적'이라는 말에 주목하려고 한다. 가계에서 근본적으로 지출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식비, 교육비, 차비, 의류, 주택에 소요 되는 세금, 보험비 등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치성 소비는 제외하더라도 왜 가계는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당연하겠지만 절대적 지출 비용-교통비, 등록금 따위-이 모자라기 때문에 은행에 대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절대적 지출 비용이 모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물가상승이라고 한다면 물가상승은 왜 일어났을까? 상품의 가격이 한번 오르면 동결은 있을 뿐 하락은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서 정부와 은행의 역할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했을 때 저자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시스템의 문제를 말하고 있지만- 이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이뤄지는지는 글에서는 알 수 없다.- 그것만으로 개선이 될 여지가 있을까? 글에는 '근본'이라고 말을 하면서 정작 중요한 '왜'가 탈락되었다. 그것은 저자의 경제 인식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국내외적 경제 현상은 주목하면서 그것들을 이루는 문화적 현상은 단 한 줄도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경제는 '문화적' 이라고 불리는 형태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가계 부채가 왜 상상도 못할 거금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원인을 보지 않고 이뤄진 결과와 '미국'이라는 외부적 상황만으로 한국 사회의 가계 부채를 설명하는 것은 성급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포괄적 상태에서의 진단은 탁상공론 밖에 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을 내놓기 위해서는 문화와 경제를 같은 도마에서 함께 올려놓고 칼질을 해야한다. 깍뚝 썰기를 하던 채 썰기를 하던 말이다.


 

제윤경의 <지혜로운 가정경제 운용을 위한 제언 새해에는 신용카드부터 없애라>는 재테크에 대한 그간의 후광을 벗기기에는 좋은 글이다. 그러나 글의 제목과 내용은 상대적으로 잘 부합되지 않는다. '신용카드를 없애라.'에서 '신용카드를 없애는 것은 어떨까.'는 저자의 주장에 힘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과도 동떨어져 보인다. 책의 큰 제목은 한국 사회의 진실이다. 신용카드를 없애는 것은 어떨까 라는 말에 앞서 한국 사회에서 신용카드의 폐해와 더불어 이것이 왜 이런 문제를 안고도 계속해서 써지는지에 대한 경제적 인식에 대한 고찰이 전반적으로 무지하다고 할 수 있다. 글의 마지막에 정부 발표에 의하면 새해에는 우체국을 통해 서민 계층을 위해서는 10퍼센트짜리 서민 전용 보너스금리 예금을 만든다니 한번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물론 언론 발표에서와 같은 내용과 달라 실망하게 될 우려가 없지는 않지만.는 사족이다. 정부에서 이런 정책을 하고 있는데 한번 해볼 사람은 해봐라. 그런데 조금은 언론에서 발표한 것과 다를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이 된다. 기껏 말해 놓고 저자는 슬그머니 그 맥락에서 빠져나가는 어감이다. 책임질 수 없는 이런 말을 굳이 이 지면에 써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신용카드 정책은 정부에서도 일부분 추진했던 정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느 면에서 현금 거래보다는 투명한 세금 내역을 얻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가 영세업자들에게는 불편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만 보자면 아파트 옥상에서 사고가 났으니 아파트를 없애자는 말같이 느껴졌다.


 

「3부 안개 속의 한국 사회와 전망」의 문을 연 것은 최민선의 <미룰 수 없는 개혁, 대안은 있는가 '수평적 다양화'를 통한 수월성 교육이 대안> 이다. 저자는 낡은 영미식 교육 정책을 따라하는 현 MB정부의 몰지각성을 지적했다. 저자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교육을 팽창시키는 요소를 개선하거나 규제해야 하는데, 정부는 학교만족도를 높인다는 이유로 이러한 요소를 더욱 키워나가고 있다. …… 현재의 학벌 구조와 입시경쟁의 구도가 깨지지 않는 한 각 학교는 학생을 선발할 때 국민 대다수가 공정성과 형평성에 동의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정부는 이를 관리해 교육의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 …… 대학 이전의 과정에서는 당분간 '선지원 후추첨'의 방식을 통해 학교의 학생 선발권보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에 더욱 힘을 실어줘야 함이 마땅하다. ……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해야 한다. 고 말한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래서'와 '어떻게'였다. 책은 정말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이 이 저자들은 왜 신자유주의에 정의를 내리지 않는걸까였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와, 정치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와 경제 혹은 문학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같은 듯하면서도 그것을 지배하는 질서나 위치면서 다르게 사용된다. 그것은 또한 경제학에서도 세부적으로 그것을 정의하는 방법과 의미가 여러 가지다. 덧붙여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어감 또한 학자간 견해가 조금씩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쓰던 간에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글의 구성면에서 소제목으로 사용된 2. 낡은 영미식 교육정책 따라하는 이명박 정부 와 3. MB 교육 정책의 주요 내용과 과제 를 굳이 나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것들이 각각 대등한 힘을 지녔는가? 제목은, 대안은 있는가에서 '수평적 다양화'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수평적 다양화에 대한 필요성과 현 MB정권의 문제점이 서론이 되고, 본론은 수평적 다양화에 대한 방법론과 지금껏 다른 나라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다가 되고,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것을 위해서 온 국민이 합심하여 사회적 기틀을 마련해야 된다가 될 것이다. 기본적인 글쓰기의 구성조차 이뤄져있지 않았다. 24페이지라는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수평적 다양화'는 대한민국 교육이라는 영화에서 잠깐 까메오로 출연한 배우 같았다.


 

지쳐가던 필자는 단비같은 제목을 봤다. 바로 이은경의 <살 만한 세상을 향한 사회 복지 개혁 살 만한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이다. 저자는 삶의 질 개선은 복지에 돈을 쓰고 분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한다고 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또한 현장의 목소리와 요구가 반영되는 지표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방식면에서는 필자와 의견이 달랐다. 연구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누굴 위해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했을 때 필자가 받아들였을 때는 개념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의 연장선이라는 점이다. '경제'라는 범주에 문외한인 필자 같은 대중들에게 전 지표와 다른 지표에 차이점이 있을까? 그것이 학술적인 면에서는 시급한 문제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살만한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고 정리할 수 있는 '조직화'에 대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은경의 글은 따지고 보면 앞에서 말한 저자들의 의견을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 밖에 주지 못했다. 여러 분야를 선별하여 고민의 방향성을 추상적으로 언급하기 보다는 한 분야에 심도 있는 취재와 방향 모색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근본은 어려운 학술적 숫치가 아니라 물집 잡힌 저자의 발을 연상케 하는 글이다.


 

엄관용의 <2010년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2010년 지방선거, 선거연합을 위한 몇 가지 기준>에서는 정당간 묻지마 선거연합이 아니라 의제 중심의 선거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각 정당이 지방선거를 통해 정책적으로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의제가 상당부분 일치하거나 수렴하고 상호 타협의 가능성이 높다면 선거 연합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처음 드는 생각이 현실성 있는 말일까 였다. 백보 뒤로 물러 선거 연합 전선은 구축한다고 가정 했을 때 그 다음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지면 할애도가 너무 짧다. 정당 내의 구도, 서열, 밖에 이해관계로 둘러싼 현 정당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없이 전망만을 내놓고 그 후 경제적 변이에 대한 설명은 전무후무하다. 제목은 기준인데 기준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너무 많은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형제지간에 싸움이 나도 화해하려면 다양한 고려 사항들이 어느 정도 해결 되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름에 물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정영철의 <전환기의 한반도, 새로운 10년이 되나 새로운 10년 앞둔 남북미중의 선택> 역시 감춰진 한국 사회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감춰졌다기 보다는 대내외적 신문이나 칼럼을 통해 충분히 접할 수 있는 글이었고 표면적인 부분에 그친감이 있다.


 

진보라는 말속에 조금은 다른 무엇이 있겠지 하고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은 그 자체가 응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독립 민간 싱크 탱크에서 자발적으로 이마만한 분석을 시도 하고 한 땀씩 바느질을 한다면, 막연하나마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그 희망을 만드는데 서평꾼으로서 조금이나마 동참한다면 마냥 책이 좋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덧붙여 조언하자면 저자들의 비싼 구두 보다는 만원짜리 남대문 운동화를 신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새벽부터 자정까지 미친듯이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집에 와서 바늘로 그 물집을 터트려 봤으면. 휴지로 닦았을 때 피와 함께 고름이 묻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 사회의 진실이고. 대한 민국 경제의 현 주소라는 점을 느껴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랑이 진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5
미야모토 테루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파랑이 진다를 읽었다.
 

파랑이 진다를 통해 미야모토 테루라는 작가를 처음 접했다. 그는 194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오테몬학원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산케이 광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가 1975년 신경불안증으로 퇴직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77년 진흙탕 강으로 다자이 오사무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이듬해 1978년 반딧불 강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1982년 발표한 파랑이 진다는 삼류 대학 테니스부원들의 사 년간의 궤적을 좇으며 스포츠를 매개로 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한없이 푸르른 청춘의 초상을 그렸다.

 

올해 대학 졸업반인 내게 있어 소설은 봄과 겨울을 색체로 느끼게 해줬다. 파랑이 진다는 것은 청춘과 우울이라는 시간을 건너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 같다.

 


"마천루의 아지랑이에 잠겨

 

인간 낙타가 살아간다

 

땀도 기름도 사용할 때를 잃어

 

혹이 제자리를 떠나 마음속으로 숨어들었다

 

원색의 혼잡에 더러워져

 

낙타는 목적 없이 지하로 귀환한다

 

살아 있고 싶을 뿐인 인간낙타"

소설은 시종일관 살아 있고 싶을 뿐인 인간 낙타를 노래한다.

무엇을 이루겠다는 절박함도,

그렇다고 지금 이 시간을 그냥 보내면, 다가올 미래가 불안해지는 것도

어쩔수 없는 시간. 주인공 료헤이가 겪는 시간 속이다.

소설은 담백하다. 그것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번역문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작중 인물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에는 치밀하나 주변에 대한 상황적 묘사는 부족하다. 일본에서 다자이오사무상을 받고 데뷔할 정도면 한국에서는 현대문학 혹은 이상문학상의 신인상 추천이 될 정도의 급수로 판단하면 이해하기 편할지도 모른다. 일본 문단과 시장이 한국과는 다르지만 이 정도 수위의 작가라면 일본에서도 꽥 폭 넓은 마니아층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글을 쉽게 읽혀지만, 문학적 언술로서의 서술은 직역에 가까웠다.

모든 이야기는 절정을 위해 치달를 준비를 한다.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소설의 절정은 료헤이와 퐁크의 테니스 장면이다. 여기에서 료헤이는 처음으로 이겨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인공은 살아 있고 싶을 뿐인 인간 낙타와 동일시 하면서 자신과 주변인물을 천천히 둘러본다. 나쓰코에 대한 짝사랑을 키우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 기대했던 만큼의 소설은 아니었다. 테니스에 관해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절정을 치다를 만큼 이야기에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은 나와 이 책이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기회가 된다면 미야모토 테루의 다른 작품을 읽고 이 사람의 문학 세계가 어떤지 좀 더 살펴 봐야겠다. 더불어 시일이 흐른 뒤에 파랑이 진다도 다시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해항로 민음의 시 161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몽해 항로를 읽었다.


 


결국, 시는 말하지 않은 비탄함이었다. 장석주의 오랜 울림이 상상력의 뜬 물을 거두고 묵은 쌀을 씻게 했다. 생각건대, 낙타를 만나거든 낙타가 되라는 구절은 있는 그대로의 동화이며, 이는 투명함 그 자체의 순박함이었다. 시 쓰기도 시 읽기도 어려워지는 요즘이다. 읽는 것이 쉽다는 것은 또한 생각할 것도 많다는 것이다. 꿀꿀 거리며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어버린 돼지 새끼들을 기침 한번으로 뱉어낼 수 있다면 시인의 눈물 한 방울 마저도 아까울 것이다. 봄은 오지 않았지만, 춘곤증은 제 걸음보다 빨리 왔다. 시인의 시는 물설고 낯선 영월에서 베개 삼아 누울 수 있는 마루였다.


 

장석주의 시는 산뽕나무에 푸른비 금광호수에 푸른비 처럼 그동안 경시 되었던 옛것 그대로의 서정성과 운율을 오려내었다. 난해함에 갈증이 난 독자에게 단비처럼 목을 적셔주었다. 대가의 솜씨로 황폐한 땅을 옥토로 만든 이번 시선에서, 나는 옛날 내가 살던 집을 돌아가 봤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그 관행에 뒤처지면 영원히 낙오 될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시는 느리게 사는 삶, 특유의 맛을 보여줬다. 싸우지 않아도 될 것에서 싸워야 하고, 싸워야 할 것은 모른체 하고 살아야 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남긴 담화 그 자체였다.

 

옛집은 처마만 수리한체 그대로 있었다. 오히려 처마를 수리했다기 보다, 세월을 이겨내기 위한 버팀목 같았다. 그대로만 있어줬으면. 그 집에서 나는 어린 시절 밀린 방학 숙제를 했고, 일 나간 부모님을 기다리며 저녁노을을 봤었다. 어느 순간 나는 노을을 잊어버렸다.

시인은 따금하게 꾸짖는다. 덧 없다, 덧 없다. 해가 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의 눈물
김정현 지음 / 문이당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뜨는 밥, 다른 침

(김정현, 『아버지의 눈물』을 읽고)



아들의 상상력은 빈곤하다. 더욱이 그것이 아버지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부턴가 아들은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둘 사이는 소원(疏遠)하다 못해 남보다 더 서먹해졌다. 둘이 절감하는 현실이 한쪽은 막 움트는 공상으로, 다른 한쪽은 살육이 찢기는 전쟁터이므로, 같이 뜨는 밥이라도 삼키는 침이 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공상이 좋았다. 그것을 지켜주고 싶었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전장의 무용담을 들려주기 보다는 자신의 아들만큼은 자신이 살고 있지 않는 현실에 눈 뜨기를 바랐다. 처음 핏 덩어리 아들을 받고, 이 결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자부한다. 반면에 아들의 눈에는 전쟁을 지휘하는 늠름한 장수 보다는 구멍 숭숭 뚫린 옷을 입고 있는 병졸로서 아버지가 보였다.


 

김정현의 신작 『아버지의 눈물』이 문이당에서 나왔다. 전작 『아버지』가 사회로부터 직위를 박탈된 아버지의 초상화라면, 이번 소설은 개인으로서 가정과 사회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냈다. ‘성공’ 이라는 큰 슬로건은 가슴에 새기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덧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아버지. 그러나 정말 모두에게 잘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 그것은 비단 주인공 김흥기의 꿈만이 아니다.


 

소설은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회에 계산하지 못하는 인물을 던져 넣었다. 달리 보면 순박하다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인물. 주변에 있는 친구 상길, 종호가 그러했고 직장 상사 백창현 박사가 그러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서, 흥기는 가랑이를 벌리고 제 얼굴에 더운 침을 뱉었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허황된 꿈을 좇던 시기와도 비슷했다. 욕망이 크면 클수록, 달콤한 말 밖에 있는 쓴 현실은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 법이다. 흥기는 회사의 비밀을 빼왔고 거래를 했다. 이제는 우직하고 순박한 그가 아니라, 그 역시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허황된 꿈을 좇던 시기에 자신의 대학까지 등록금을 내 주고, 입에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누나 향숙이 있었다. 흥기는 고심을 했고, 천성 그대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로 돌아왔다. 비록 수의와 수갑은 찼다고 할지라도.


 

밥 그릇 싸움하는 아전투구의 세상에서 흥기가 마지막 양심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소설을 읽어본 이라면 그에게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 없다. 그는 아버지이기 전에 여린 아들이었고, 때론 그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하염없이 펑펑 울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이기 전에 말이다.


 

흥기는 밥을 먹고 침을 삼키고 나서 ‘맛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아버지가 밥 맛이 맛있다고 말했을 때, 그가 비록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다고 해도, 아들은 조막만한 손이지만 함께 전장터를 누빌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