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 민음의 시 165
이영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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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은 시간, 나는 밤의 끈끈한 육감을 맛보았다. 『108번째 사내』이후 이영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언니에게』는 잘근잘근 언어를 노략질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숨겨둔 지느러미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추함을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움은 더욱 부각되기 마련이다. 56편의 시는 수족을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에 위태롭게 존재했다.

천변(川邊)의 인사법
 

천변은 냇물의 주변을 뜻하는 말이다. 시인은 약육강식 치열한 냇물의 모습이 아닌, 그 주변부의 미물을 다룸으로써, 이 시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경계인의 모습을 잘 포착하고 있다.

학교를 가려고
시체가 떠내려 온 천변을 지날 때마다
다리가 점점 투명해졌다
 

나는 매일 거슬러 오르느라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천변의 하류 쪽에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비가 오면
 

발바닥에서
두꺼운 지느러미가 자라났다

                                  -<물고기가 된다는 것 전문>
 

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시체가 떠내려 오는 천변의 하류 쪽에 집을 지었을까? 우리는 이곳에서 떠밀려오는 시체의 부패나 혐오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변해가는 화자의 변신을 읽게 된다. 이것은 급진적으로 말하면 시체와 동일시되는 '나'가 되는 것이고, 점진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포괄하는 내밀한 상상이 된다. 제도권의 학교와 그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유일한 연결고리는 천변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도 '나'는 지느러미가 자라남으로써 천변을 떠나 살 수 없음을 나타내고 비가 오는 한정적 시간 안에서 나를 아버지의 집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 천변으로 대변되는 문맥과 동일 선에 놓인다.

천변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습니다. 저녁이면 주머니 속에는 설탕이 가득했습니다. 태어나면서 배꼽 주위의 폭풍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하얗고 달콤한 종족처럼 가르르 웃었습니다. …… 거품이 떠다니는 천변은 폭풍이 오기 전입니다.
                                                             -<설탕을 먹는 저녁 중에>
 

폭풍이 오기 전이라는 시간은 상대를 탐하려는 욕망의 기다림이다. 자궁 속 태아가 외부와 유일하게 소통을 맺는 것이 탯줄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모태로 향한 근원적 그리움이 된다. '하얗고 달콤한' 순백이 거둬들이는 찰나 동안 우리는 그것이 영원할 거라 믿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큰 언니들은 손바닥으로 골목의 언덕을 잽니다. 남의 옷을 훔쳐 입고 남의 치즈를 훔쳐 먹고 어른이 될 때마다 이 도시의 하나뿐인 병원은 미어터질 지경입니다. 포성이 멈춘 시간이면 희희낙락하던 어제의 소년과 오늘의 소년이 함께 문병을 갑니다.
                                                                             -<자살법 중에>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성장의 시간이자, 파멸 뒤에 느끼는 상흔이다. 자본이 유입되고 도시가 세워지는 것은 바로 포성이 멈춘 시간이다. 말하자면 포성이 진행되는 그 시점이 잠시 유보됨으로써, 우리는 희희낙락하던 어제의 소년과 오늘의 소년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간의 평화이며, 역사가 전해주는 진실이다.

1
도시는 훌륭한 악기야. 태양의 흑점을 지나온 까만 인형들이 로비 창가에 앉아 머리를 기르고 있다. 지구가 반 바퀴 도는 동안 비릿한 고등어 냄새.

2
고등어 통조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사진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벨라지오 모텔 403호 창문에 기대 지느러미를 하나 둘 세어 본다. 통조림 뚜껑처럼 똑, 인형의 동공이 열리고

3
늙고 비늘이 많은 소년이 방으로 들어간다. 붓 한 자루처럼 검은 머리로 잠을 그릴 거야. 목 잘린 인형들이 방문을 발로 차며 먼지를 쓸어 낸다. 줄줄 녹아내린 고무 눈알이 창가에 모여 있다.

4
인형들이 웃을 수 있다면 즐거워라, 모든 질감이 만져지는 도어록. 비루한 잠 속으로 깍지 끼고 걸어 들어가는 소년 소녀들의 은밀한 지느러미를 만져 볼까. 인형이 열린 동공의 아이를 낳고. 이제 공산품 같은 여행을 떠나자
                                                                 -<벨라지오 모텔 전문>

매끌매끌한 살갗을 지닌 평화의 겉 껍질을 벗겨내면, 우리는 늙고 비늘이 많은 소년을 만나게 된다. 추함은 잔인성을 동반하고 그것은 엽기 혹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낯익은 충동이다. 그것은 내면에 간직한 폭력성이며, 이것은 겉으로는 온화한 웃음을 일으키는 가식이 된다. 인형들이 웃는 다는 것. 그것은 소년 소녀들의 은밀한 욕망이고, 폭력을 숨기는 거래가 된다. 거래는 통조림 속의 세상에서는 비일비재하고, 당장 이곳을 떠나도 저기도 그와 같다는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이 보인다.

욕망이 뒤틀린 염세주의적인 세계에서는 꿈을 갖는 내면적 자아와 꿈을 잃은 외부적 자아의 이중주를 읽을 수 있다.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서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언니에게 전문>



방이 있다. 그것은 곰팡이가 잔뜩 핀, 습기 가득찬 방이다. 이것은 물리적 구조로서 집이 갖는 방일 수 도 있지만, 감성적 공간으로서 화자의 내면 의식이다. 시의 배열은 밖에서 안이라는 공간적 이행과 아래에서 위라는 방향적 이행으로 이루어진다. 밖은 겨울밤이며, 춥고 낯설다. 안은 고요하며 어머니라는 존재가 주는 안온함을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을 축축한 냄새라는 표현으로 조금은 이질적인 느낌으로써 독자에게 이미지상 간극을 심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돌렸던 손잡이는 고정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떼어 냄으로써 내가 갖는 사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니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에피크로스 학파의 철학에서 쾌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지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을 기댈 수 없는 자신만의 이기심이기도 하다. 나의 행복을 원전히 받아줄자는 나를 위해 희생하는 쾌가 있는자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기에, 스스로 그러한 존재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내 혈육인 언니이다. 어머니가 피어내는 냄새 사이로 서리낀 창문에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지는 202호 창문. 그것은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다.
 

'불편' 동인에서 활동하는 시인의 이 같은 세계관은, 악역을 맡은 배우의 몸짓과 같다. 주인공이 덧 보이는 것은 그런 악역의 악랄함에 비추어지는 선이다. 선은 도덕적 고결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에 있어 선은 추한 욕망을 감추는 가면이기도 하다. 가면을 한 꺼풀 벗겨 냈을 때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언니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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