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언어, 내 생각, 내 존재가 다른 것들과 분리된 고유의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전제가 있는 듯하다. 그 전제마저도 과거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배운 것인데도.

붓다는 왜 '고유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세상 만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강조했을까?

예를들어, 인도에서는 '나마스테'하고 인사하는데, 그것은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다.그럼 이 두 신은 다른 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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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나의 꽃


"너희들은 누구니?"

어린 왕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는 장미꽃이야."

장미들이 말했다.

"아!""

어린 왕자가 짧게 말했다.

갑자기 그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자기가 기르던 장미꽃이 자신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천 송이나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모두 똑같이 생긴 장미꽃들이 한 정원에 이렇게 모여 있다니!!(......)

어린 왕자는 한 장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희는 내 장미와 달라.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너희들은 정말 예쁘게 생겼어. 하지만 너희들의 아름다움은 텅 비어 있지. 너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 물론 지나치다가 너희들을 본 어떤 사람이 너희가 내 장미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하지만 너희들 모두보다 내게는 내 장미꽃 한 송이가 더 소중해.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날마다 물을 주는 꽃이니까. 그리고 내가 날마다 유리로 잘 보호해주는 꽃이니까. 결정적으로 그것이 바로 내 장미꽃이니까.

                                                                         <어린 왕자>


한계를 벗어난다면


자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우주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

                            <카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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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관계, 사람과 나의 관계,길과 나의 관계 그 모든...



관계의 기쁨을 찾는다


그렇다면 '나와 너'의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 부버는 그런 방법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또 어디선가 '너'가 기다려줄 리도 없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태도 하나로 '너'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태도란 현재의 모습을 완전히 수용하는 일이다. 자신은 이렇고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꾸밈이나 거짓 없이 명백하게, 아기처럼 순수하고 아무 사념 없이, 모든 가치관을 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마주할 때 눈앞에 '너'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선에서 말하는 '진인(깨달음을 얻는 사람) 또는 '지인'(큰 덕을 갖춘 사람)의 태도와 같다.


물건과도 '나와 너'의 관계가 될 수 있다


부버는 물건과도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면, 성서는 책이 아니다. 성서는 '너'가 말하는 목소리다. 너에게 나 역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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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속에 있는 사랑을 찾아내세요.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사랑체가 바로 당신 안에 있으니까요.

자기사랑은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열쇠입니다.

자기사랑, 진정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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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마치 과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치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치유의 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내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판단하지 않으며 내 고통의 본래 모습을 만나고 껴안을 수 있다. 내 감정들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것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다. 판단하지 않을 때 내 삶에는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있다.(79쪽)


사실 나와 타인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다르지 않다. 나는 당신이 아니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다.(81쪽)


그저 걷기


 순례여행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왜 걷습니까? 그 목적이 뭡니까?"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 그저 걷기 위해서 걷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그건 불합리하고 아주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내게 어떤 계획이나 목적이 있다면 미지의 삶은 나의 인도자가 될 수 없고 나는 진실로 현재에 있을 수 없다. 만약 내가 목적을 성취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삶이 지금 나에게 주는 온갖 풍요로움과 부를 볼 수 없다.(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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