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나이트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정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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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공이라는 지명은 양가적인 감정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반공교육에 횡행하던 어린 시절에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사이공이 천벌받을 짓을 해서 공산화라는 지옥에 던져졌다고 믿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내 믿음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필수코스로 읽었던 "전환시대의 논리"에 의해 깨졌다. 80년대의 어느 골방,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학습했던 모든 책들은 사이공에 대해 우리가 가해자라는 섬뜩한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미국에서 날아온 수많은 노래들과 영화(아, 디어 헌터 다시 보고싶다!)들은 월남의 상처를 보여주었지만, 주로 월남으로 인해 자기들이 입은 상처였지 월남인들이 입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훌쩍 지나갔다. 월남이 시장을 개방했고, 우리나라를 모델로 경제성장에 나선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다시 월남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땐 총을 들었지만 이제는 돈을 들었다. 다시 월남 여자의 몸을 사고, 버리고, 그리고 사이공의 밤거리에서 죽어간다. "사이공 나이트"는 이 비극적인 기시감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한때 침략군으로 들어갔던 (만약 월남전을 우리가 월남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참전한 전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 말고 다른 역사서부터 읽으시는 게 좋겠다) 땅에, 이제는 돈을 내세워 다시 빨대를 꽂는 현장. 그러니 남자 주인공들이 무력하게 줄줄이 죽어가는 것도 당연하고, 그들이 모두 돈 때문에 죽는 것도 당연하다. 월남 여자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위대한 법칙에 견주어본다면 이 또한 너무도 당연하다.  "사이공 나이트"는 이 반복되는 비극과 모순의 현장을 보고 있고, 그런 점에서 꼭 나왔어야 할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덕과 함께 빠른 전개, 남성미 물씬한 주인공들(그러나 나는 남성미 물씬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는다), 식민지 도시의 이국적인 느낌과 함께 정액 냄새 물씬한 밤거리의 퇴폐적인 묘사, 린이라는 독특하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사이공의 이면 등은 장르 소설로서 충분한 값을 한다. 심사평에 쓰여진 것처럼 정신없이 빠져들 수 있는 책, 재미있는 하드보일드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점은 좀 아쉽다.  우선 주인공이 누구인지 헷갈린다. 나는 처음 대수가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따라갔는데 나중에 도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린으로 바뀐다. 작가는 의도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장르소설에서는 독자가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최소한  첫 장면의 등장인물이 도식이었다면 책 중간에 도식이 누구였더라 하면서 다시 읽는 수고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주인공의 문제는 감정과 바로 직결된다. 하드보일드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비정한 세계, 비정한 등장인물을 내세웠다 해도 그들이 몰락해가는 과정에는 어떤 감정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누구의 감정을 따라가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다가오는 감정도 약하다. 도식과 린의 대결이 더 치열하던지, 도식이 빠져나오려고 더 발버둥치다 죽던지, 린이 위기에 빠졌다 다시 살아나던지 간에,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충분히 더 나올 것 같은데, 소설은 아쉬움만 주고 끝나버린다. 

   

  나는 장르 소설을 대단히 좋아한다. 오늘은 노벨문학상 발표날이고, 누가 받을지는 모르겠으나(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한 표!) 오늘 밤이 되면 왜 우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못 하나, 다음에는 누가 받나, 이런 쉰소리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이유(이유는 너무 많다)를 다 차치하고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려면 일단 한국의 독자들이 책을 많이 읽어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노동강도 세고 삶의 조건이 살벌한 나라에서 책읽기는 더이상 여가선용이 아니라 일종의 재능에 해당하는 고로, 독자들에게 책을 읽게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사이공 나이트"는 읽힌다는 점에서, 작가가 "읽게 하려고" 쓴 책이라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사족. 나의 외삼촌은 베트남 참전 용사셨다. 삼촌은 지금도 그때 일을 호기롭게 말씀하신다. 그의 회상은 베트콩이 얼마나 질겼나, 베트남 여자들이 얼마나 예뻤나, 미군부대에서 빼내서 팔아먹었던 버터와 캔맥주가 얼마나 많았나 등등이다. 언젠가 명절에 모인 친척 한 분이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월남에 니 자식이 크고 있는 거 아냐?"

  삼촌은 어딘가 씁쓸하게 웃으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사이공에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다고 하셨다. 삼촌은 아셔야 한다. 사이공은 더이상 없다. 그곳은 호치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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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브라더스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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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광고나 드라마 덕분에 옥탑방이라는 공간은 상당히 낭만적인 장소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곳의 삶이 결코 낭만적인 리는 없다. 옥탑방의 거주인은 (특별한 취향에 의해 선택하지 않는 한) 가난할 것이고, 2013년 대한민국에서 가난한 자의 삶이란 보람과 평화, 자족과 행복 따위와는 거리와 멀 가능성이 100 X 100 퍼센트일 것이다.

 

거의 몇 년 째 놀고 있는 만화가.

그의 옥탑방에 갈 데 없는 40대 기러기 아빠와

50대의 이혼남,

20대의 공시생이 차례로, 각자의 핑계를 달고 찾아와 갈 생각을 않는다.

그들의 사연은 한결같이 찌질하면서도 서글프고, 암담하다.

할 일도, 돈도, 희망도, 거의 아무 것도 없다.

한 여름에 네 남자가 옥탑방에 비비고 사는 꼬락서니는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의 삶을 어둡고 슬프게 그리지 않는다.

비록 찌질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위태위태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이어지고

그들은 이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할 일을 찾고, 사랑을 찾아간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찌질하고, 희망이 없어도 살아진다"고.

맞다. 살아진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지는 게 또 인생 아닌가.

 

망원동 브라더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이 낙관주의다.

어떻게 버티다 보면 좋은 날도 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빡빡하게 살 거 뭐 있나? 피 한 점 섞이지 않은 사람들과도 형제처럼 어울려 살다보면..... 브라더스를 연대라고 슬쩍 바꿔보면 작가는 '루저들의  따뜻하고 사적인 연대'를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팍팍한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초라한 사람들끼리의 십시일반, 이 연대인지도.

그래서인지 옥탑방의 네 남자가 망원동 브라더스라고 정식으로 이름을 채택하자 좋은 일들이 줄줄이 일어나 브라더스는 해체된다.

해피엔딩은 언제나 좋다.

나는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는 소설이 좋다.

 

비도 오고, 거지 같은 정치뉴스들을 보며 잔뜩이나 꿀꿀한 날,

이만한 책을 읽고 하루 낄낄거렸으면 충분하다.

그래서 한국 문학의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가는 "루저 문학" 중에서 유달리 따뜻한 작품으로만 기억하자.

루저를 양산하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생각,

아무리 발버둥쳐도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모순,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대수 루저들에게 '망원동 브라더스"와 같은 해피 엔딩은 없다는 비정한 현실은,

오늘은, 눈 감자.

작가가 따뜻해 지고 싶어 하니까.

우리가 매일 심각하게 살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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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의자놀이
공지영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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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전태일을 방문하기 전에 의자놀이는 읽었는가 묻고 싶다. 쌍용차에 대해 침묵하는 사람은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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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정봉주 - 나는꼼수다 2라운드 쌩토크: 더 가벼운 정치로 공중부양
정봉주 지음 / 왕의서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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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봉주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꼼수가 나와서 웃기고, 재밌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일을 잘 한다. 이것은 17대부터 알았던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글도 잘 쓴다. 이것은 그의 이 책을 읽고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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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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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표백"의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이 소설은 파격인가, 도발인가, 아니면 고발인가"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이 책은 파격도, 도발도, 고발도 아니다. 단지 엄살이다. 

 

  소설은, 오늘날 이 세계가 어떠한 변화도 모색활 수 없고, 새로운 결과도 가져올 수 없는 완전한 세계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표백'시키는 것, 즉 자살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빼어난 머리, 그리고 파괴적인 매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는 세연이 이 자살을 주도하는 인물이며, 세연이 죽은 지 5년 후 그녀에게 매료되었던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 그녀의 뒤를 이어 세연이 만든 자살 사이트에 자살선언문을 남기고 자살을 감행한다.   

    

  우선 이 소설의 전제가 되는 "완성된 세계"라는 것부터 나로서는 동감할 수 없다. 작가는 오늘날 사회가 어떤 혁명적 싸움도 남아있지 않고, 성취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작가는 세연의 잡기를 통해 잔뜩 현학적 수사를 동원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수사는 모두 작가의 말 바꾸기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정당한 논거가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하는 것은 체제의 완고함과 변혁의 어려움이지, 그것을 변할 수 없는, 완전한 사회라고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작은 근거로, 작가는 자신의 논거를 위해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인용하고 있지만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 후쿠야마가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역사의 종언"은 잘못되었으며 역사는 계속 진행중이라고 인터뷰 했던 것을 작가는 잊었나?  우리 사회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변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비겁함이며,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과 그 반동의 옹호자들의 완강함이다.  

   

  쉽게 말해, 우리 사회에 혁명적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조중동만 폐간되어도 우리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바가 없는지?

  

  작가의 동화같은 현실인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정말 영롱하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으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것은 정치적 냉소와 허무주의의 다른 표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작가가 그토록 대수롭지 않게 보는 선거 혁명은 더운 물과 차가운 물의 위치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이며, 나아가 한나라당과 민노당의 차이로까지 벌어질 수 있다. 작가는 이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차이는 엄연하다. 그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단정하는 이 얄팍한 현실인식 위해 이 소설 "표백"은 위태하게 버티고 있다. 

 

  이 정도의 현실 인식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보니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개연성 같은 것은 소설 어디에도 없다. 이쁘고,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삼성전자에 취직까지 된 여대생이 "완전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연못을 몸을 던지고, 5년 후, 역시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진 그녀의 친구들도 그녀의 지시대로 차례로 죽음을 선택한다.  왜? 세연의 자살선언에 동조하기 위해서. 오직 그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질한 상태로 죽지 않고 최고의 성취를 이룬 순간에 자살할 것을 강요받고 그대로 실천한다. 이쯤되면 세연이라는 인물은 종교의 교주와 같은 포스를 뿜어낸다. 그리고 자살에 동조하는 이들은 사이비 종교에 걸려든 희생자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들의 죽음은 오로지 세연에 대한 기괴한 애정으로만 설명될 뿐, 어떤 사회구조적 설명이나 문명론적 징후와도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도 개연성의 문제가 좀 마음에 걸리는지 '세연의 잡기'를 거의 매 페이지마다 끼워넣고, 그 잡기마다 모모한 책들을 인용함으로써 이야기에서 찾을 수 없는 자살의 정당성을 설파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의 에세이 사이에 남아있는 이야기는 오로지 겨우겨우 7급 공무원이 되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 뿐이다. 세연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혹은 세연의 주장의 정당성을 발굴해 주어야 할 임무를 띤 등장인물인 '나'는 놀랍게도 화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사회인식의 변화도, 새로운 시각의 획득도 없이 세연의 장광성을 전달해주는 역할만을 한다.  

 

  이러한 개연성 없는 자살사건의 의미를 작가가 케네디 암살과 같은 파장을 가진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하는 부분에 이르면...... 한마디로 짜증이 치민다. 예전에 "스타일"이라는 허접한 서설을 읽었더니, 청춘이 지나갔다며 엄살을 떠는 여주인공의 나이는 고작 서른이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직업은 패션 잡지 에디터이며, 더이상 사랑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소개받은 남자는 의사더라고 하는, 재수 좋은 년은 굴러도 가지밭이라는 식의 엄살이 출몰하더니, "표백" 또한 마친가지다. 표현이 더 고상해지고, 화려한 인용과 거창한 예시로 폼은 잔뜩 잡고 있지만,  이것은 살만한 자의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수많은 젊은이들이 단돈 몇 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자신의 장기를 팔고 있는 이 암담한 현실에서, 혁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성된 사회라는 넋두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 것인가. 혹 그것은 일류대학 졸업하고, 주요 일간지에서 근무하며, 알토 색소폰이 취미라는 여피 분위기의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 아닌가.  

   

  나는 장담한다. 세상은 훨씬 변할 수 있다. 조중동 같은 신문만 사라져도. 그 신문사의 기자들이  조금만, 아니 최소한의 양심만 가져줘도. 그러니 이 소설은 엄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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