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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표백"의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이 소설은 파격인가, 도발인가, 아니면 고발인가"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이 책은 파격도, 도발도, 고발도 아니다. 단지 엄살이다.
소설은, 오늘날 이 세계가 어떠한 변화도 모색활 수 없고, 새로운 결과도 가져올 수 없는 완전한 세계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표백'시키는 것, 즉 자살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빼어난 머리, 그리고 파괴적인 매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는 세연이 이 자살을 주도하는 인물이며, 세연이 죽은 지 5년 후 그녀에게 매료되었던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 그녀의 뒤를 이어 세연이 만든 자살 사이트에 자살선언문을 남기고 자살을 감행한다.
우선 이 소설의 전제가 되는 "완성된 세계"라는 것부터 나로서는 동감할 수 없다. 작가는 오늘날 사회가 어떤 혁명적 싸움도 남아있지 않고, 성취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작가는 세연의 잡기를 통해 잔뜩 현학적 수사를 동원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수사는 모두 작가의 말 바꾸기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정당한 논거가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하는 것은 체제의 완고함과 변혁의 어려움이지, 그것을 변할 수 없는, 완전한 사회라고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작은 근거로, 작가는 자신의 논거를 위해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인용하고 있지만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 후쿠야마가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역사의 종언"은 잘못되었으며 역사는 계속 진행중이라고 인터뷰 했던 것을 작가는 잊었나? 우리 사회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변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비겁함이며,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과 그 반동의 옹호자들의 완강함이다.
쉽게 말해, 우리 사회에 혁명적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조중동만 폐간되어도 우리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바가 없는지?
작가의 동화같은 현실인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정말 영롱하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으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것은 정치적 냉소와 허무주의의 다른 표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작가가 그토록 대수롭지 않게 보는 선거 혁명은 더운 물과 차가운 물의 위치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이며, 나아가 한나라당과 민노당의 차이로까지 벌어질 수 있다. 작가는 이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차이는 엄연하다. 그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단정하는 이 얄팍한 현실인식 위해 이 소설 "표백"은 위태하게 버티고 있다.
이 정도의 현실 인식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보니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개연성 같은 것은 소설 어디에도 없다. 이쁘고, 똑똑하고, 매력적이며, 삼성전자에 취직까지 된 여대생이 "완전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연못을 몸을 던지고, 5년 후, 역시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진 그녀의 친구들도 그녀의 지시대로 차례로 죽음을 선택한다. 왜? 세연의 자살선언에 동조하기 위해서. 오직 그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질한 상태로 죽지 않고 최고의 성취를 이룬 순간에 자살할 것을 강요받고 그대로 실천한다. 이쯤되면 세연이라는 인물은 종교의 교주와 같은 포스를 뿜어낸다. 그리고 자살에 동조하는 이들은 사이비 종교에 걸려든 희생자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들의 죽음은 오로지 세연에 대한 기괴한 애정으로만 설명될 뿐, 어떤 사회구조적 설명이나 문명론적 징후와도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도 개연성의 문제가 좀 마음에 걸리는지 '세연의 잡기'를 거의 매 페이지마다 끼워넣고, 그 잡기마다 모모한 책들을 인용함으로써 이야기에서 찾을 수 없는 자살의 정당성을 설파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의 에세이 사이에 남아있는 이야기는 오로지 겨우겨우 7급 공무원이 되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 뿐이다. 세연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혹은 세연의 주장의 정당성을 발굴해 주어야 할 임무를 띤 등장인물인 '나'는 놀랍게도 화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사회인식의 변화도, 새로운 시각의 획득도 없이 세연의 장광성을 전달해주는 역할만을 한다.
이러한 개연성 없는 자살사건의 의미를 작가가 케네디 암살과 같은 파장을 가진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하는 부분에 이르면...... 한마디로 짜증이 치민다. 예전에 "스타일"이라는 허접한 서설을 읽었더니, 청춘이 지나갔다며 엄살을 떠는 여주인공의 나이는 고작 서른이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직업은 패션 잡지 에디터이며, 더이상 사랑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소개받은 남자는 의사더라고 하는, 재수 좋은 년은 굴러도 가지밭이라는 식의 엄살이 출몰하더니, "표백" 또한 마친가지다. 표현이 더 고상해지고, 화려한 인용과 거창한 예시로 폼은 잔뜩 잡고 있지만, 이것은 살만한 자의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수많은 젊은이들이 단돈 몇 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자신의 장기를 팔고 있는 이 암담한 현실에서, 혁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성된 사회라는 넋두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 것인가. 혹 그것은 일류대학 졸업하고, 주요 일간지에서 근무하며, 알토 색소폰이 취미라는 여피 분위기의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 아닌가.
나는 장담한다. 세상은 훨씬 변할 수 있다. 조중동 같은 신문만 사라져도. 그 신문사의 기자들이 조금만, 아니 최소한의 양심만 가져줘도. 그러니 이 소설은 엄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