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주의는 장애, 성, 인종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주의자'들에게는 명백한 기피대상이었다. 스펜서이후 사회생물학은 '적자생존'의 논리에 기반해 생물학적 특성에 따른 정치적 차별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비극 이후 세계는 지식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분석에 몰두했다. 그리고 사회과학은 여성과, 유색인종,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지식을 추구했다.

새로운 철학과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과학은 '과학'으로서의 '올바른' 임무를 잘 수행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상당한 과학적 진실을 (자연주의적 인식론을 토대로 해서도) 가지고 있었지만, 일정한 왜곡 또한 존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의 신다윈주의 계몽주의자들의 활발한 대중서적들은 그것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장애학은 한국에서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하며(반면 장애인 운동은 대단히 급진적이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아직 성장중인 학문이다. 여성주의와 인종연구는 다양한 문예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을 통해 축적한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다윈주의적 패러다임과 대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애의 영역은 그것보다 힘겨워 보인다. 물론 나는 신다윈주의 패러다임에 대해 해묵은 인식론적 논쟁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치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물론 과학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이나, 지식사회학의 영역에서 그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주제가 될 것이다). 다만 그것과 대면해 새롭게 얻어 낼 수 있는 '과학적 진실'과 '윤리적 함의'에도 분명히 주목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는 정말 몇 안되는  대중적 장애담론 입문서이다.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경력을 쌓은 저자의 깊이있고 외로운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 책이 장애인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장애인에 대한 전통적인 대중적 시선을 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내용중 일부는 신다윈주의 저자들이 대중적 서적에서 박살내고 있는 '사회과학주의'에 기대고 있다.

(내가 언급하는 사회과학주의란, 또 한명의 계몽주의자 스티븐 핑커가 인간 본성의 보편성에 대해 거부하고 사회문화적 변수를 강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우생학에 질린 사회과학적 패러다임'을 지칭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 나는 이 용어를 그처럼 부정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분명 생물학적 진실에 대한 거부반응이 공공연하게 남아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인종, 장애와 같은 소위 '소수자'연구 분야에서 말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겠지만,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의 저자는 장애라는 몸의 특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라는 장애학의 주요 논의를 전하면서, 인간 육체에 대한 미적 관심의 상대성을 예로 들고 있다. 예컨대 목을 길게 늘어뜨리는 부족이나 전족을 했던 중국 여성들의 발 모양 등이다(전족을 책에서 언급했는지는 정확히 잘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이것도 책에서 의도한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를 스티븐  핑커는 이미 10년전의 책에서 진화심리학의 논리를 통해 비판한다. 그런 부족들의 전략은 '섹시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권위나 정치적 이유와 상관있는 것이며, 수많은 인류학 연구에서 인간이 '섹시함'에 대해 느끼는 양식은 상당한 종적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장애이론이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손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장애'로 구성되는지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보편적인 반응양식을 수용하는데 거부감을 갖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그리고 진화적 산물로서의 '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수용한다고 해서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옹호와 장애인의 몸을 구성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어떤 한계가 생기는 것일까. 초보적인 수준에서 고민을 시작하고 있는 내가 어떤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과학적 설명을 공공연히 거부해야 할 만큼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에 관한 인류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어떤 경우 장애란 상당히 특정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되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 매우 부정적인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들은 어떻게 발생하며, 어떤 경우 장애를 가진 인간이라는, 유전적으로 대단히 '불필요한' 개체에 대해 해당 집단은 이타심을 발휘해 왔는가를 진화생물학 적으로 규명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다윈주의의 강력한 패러다임 한 가운데서 장애에 대한 진화윤리학적 함의를 도출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피터 싱어는 이성이 그 자체로 수학과 같이 스스로 확장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진화과정에서 '모순을 제거하려는' 어떤 적응적 특성의 '부산물'이 윤리의 성립에 기여했다고 말한다.(윤리적 입장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부산물이다!) 호혜적 이타성과 혈연이타성이라는 설명 가능한 윤리적 특성이 바로 이 '이성의 일관성 추구 특성'이라는 부산물에 힘입어 가족 이외의 타인, 그리고 내 집단 이외의 타인으로까지 이타적 성향을 확장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애'를 가진 존재에 대한 인정과 차별의 금지가 진화적 특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윤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음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전혀 '쓸모없고', 원시사회의 생산력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과 윤리는 성립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물론 이러한 논의는 단지 그간의 진화윤리학 논의를 조잡한 방식으로 '장애'에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논의는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차원의 윤리학을 정초하는데만 도움이 된다. 그동안 장애학은 이러한 시혜적 윤리관이 오히려 장애인의 주체성을 말살해 왔다고 오랜기간 폭로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방식의 윤리적 함의를 도출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다만 진화적 인식론이 과거 스펜서주의적 우생학에 머무는 수준이 아니라, 대단히 정교한 설명력과 그것이 부정적인 이데올로로기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많은 다윈주의자들이 노력하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으며, 오히려 진화론에 기초해 인간의 공정한 권리와 가치를 설명하는 새로운 윤리학의 정초를 시도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한 가운데서도, 장애학을 포함한 사회적-정치적 소수자들의 문제를 고민하는 학자들이 연구의 '과학적' 객관성을 확장하면서도 정치적 차별을 제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어떤 성과들을 지속할 수 있지는 않을까. 요컨대 너무 무서워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장애학과 같은 연구는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시작된 관심이 학문적으로 옮겨간 것이라 '과학적 설명, 정치적 함의'라는 이 두 분야를 완전히 분리된 시각으로 다루기 어려운 것도 같다. 나부터도 장애문제를 학문적으로 고민하고 싶은 이유는 장애인의 차별이 왜 부당하고 얼마나 교묘하게 이루러지는가를 객관적으로 밝히고 싶다는 마음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일 진화론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명백한 생물학적 이유에서 그다지 교묘하고 정치적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과학적 진실'을 말한다면 어떠할까라는 고민도 들며, 그럼에도 윤리적 이유에서 우리는 차별하면 안된다고 자연주의적 오류를 따라 논의를 진행해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할 것이란 생각은 든다. 

 그럼에도 우리가 대면해야할 것이 분명하며, 장애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설명은 분명 필요할 것이기에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생물학적 진실을 파악하고 정확히 분별해 내면 오히려 장애학이 몰두해야할 학문적 영역이 깔끔하게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영역안에서 장애란 경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 그것을 차별하는 구조에 대한 따끔한 지적은 더 풍성해질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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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민 2010-12-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다윈주의 로 검색을 하니 네 번째로 이 글이 뜨네요.
나머지는 창조론과 관련된 글들.
신다윈주의라는 단어는 학계에서 정말로 잘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