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오사와 마사치 지음, 송태욱 옮김 / 그린비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p. 14 

중세의 궁정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결혼과 정면으로 대립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므로 정열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간음이다.

예컨대 중세의 기사는 사랑하는 귀부인과의성교 순간을 향해 점점 다가가는데,
그때마다 그 한 발짝 앞에서 항상 난관에 봉착하고 그 순간을 놓쳐버린다.
너무나 절묘한 시기에 난관이 나타나기 때문에,
마치 기사들이 스스로 그 난관을 기꺼이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것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p. 17 

이 고찰을 한 걸음 심화시키기 위해 구소련 출신 작가 세르게이 도브라토프(1941~1990)년의 단편 소설 "이건사랑이 아냐"를 보도록 하자.
주인공 '나'는 레닌그라드에 살고 있으며,반체제파의 잘 팔리지 않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20년 전 어느 날 아침, '나'가눈을 뜨자 방에는 한 여자가 자고 있다.
'나'가 그여자에게 누구냐고 묻자그녀는 '레나'라는 이름 외에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놀랄 만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난다.
'놀랄 만한 일'이란 그녀가 그를 놀라게 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 부탁도 안했는데 그녀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레나가 "이제 가야지"라고 말하고 집을 나서면서 돌연 "6시쯤 돌아올 거예요"라고 말했으므로 '나'도 무심코 "알았어"라고 응수하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당연한 일인 듯 쭉 그의 방에서살게 된다.
그녀가 왜 '나'와 함께 살기로 했는지, 그는 전혀 알 수 없다.
애초에 '나'는 레나가 어떤 사람인지모른다. 특별히 레나가 자기 자신에 대해 비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반대다.
그녀는'나'가물으면 뭐든 대답했다.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KGB는 아니라는것, 그녀의 아파트가 다치노에 지구에 있다는것 등등.
그녀는 모든 것을 너무나도 차분하고 여유 있게,거의 사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냉정한 태도로 설명한다.
이것이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최대 요인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고 딸도 낳는다.

머지않아 레나는 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버린다.
그러나 '나'는 출판을 금지당한 반체제 소설가로서 소비에트 체제를 증오하고 있었을 텐데도 도저히 소비에트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주한 곳에서 레나가보낸 엽서가 오지만 그 내용은 전혀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사무적인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 역시 레나가 있는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체포된 뒤 형무소에서 내무성의 관리가, 부인과 딸을 사랑하니까 당신도 떠나야 한다고 한 말을 듣고서야. 

이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주인공이레나를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필요조건이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것을 시사하는 주인공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상은전혀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그의 요구에 응해 자신에 대해 뭐든지 말하고, 그가요구하지 않을 때도 자신이 무슨 일을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는 지나치게 많을 정도다.
이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보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정보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혹은 사랑은 그러한 정보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아무리 많이 중첩시켜 기술한다해도 레나임을 전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
그가 "이건 사랑이 아냐"라고 느낀 것은, 레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자신이 알 수 있는 레나의성질 안에서 찾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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