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신발
김주영 지음 / 김영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p.11 
집집마다 다듬어서 마무리한 모양새와 문양이 서로 달라 
빈 집에 떡을 갖다주고 돌아가도
나중에 봐서 어느 집 제사 떡인가를 알아챌 수 있는 다식판처럼. 

 

P.17 
얼마를 기다렸을까. 노인은 드디어 낌새를 알아챈다.
그러나 누워있던 자세에서 미동도 않는다.
참외 서리를 노리고 밭으로 무턱대고 진입한 아이들이 다치지 말라고, 밭 귀퉁이 한 편에
쳐 둔 가시넝쿨을 치우고
개구멍을 만들어두었다. 

그 곳으로 알몸의 아이들이 포복의 자세로 기어들고 있다.
웃통을 벗어 소매 끝을 옭아매 저마다 자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밭고랑을 파고드는 아이들의 피부에 참외 잎 스치는 소리가 또렷하다.
  

어림짐작으로 시간이 얼추 흘러갈 때까지 노인은 그린 듯이 누워 기다린다.
노인은 드디어 몸을 뒤척이며 조심스럽게 기침 소리를 낸다.
와락 외마디 소리를 지르거나 호통부터 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어마지두 놀란 아이들이 갈팡질팡하다가 원두막 아래 놓아둔
오줌장군을 안고 넘어지거나, 가시넝쿨 위로 가차없이 몸을 던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순, 먼 데 여울 소리만 들려올 뿐, 원두막 주위는 바다 속처럼 고요하다. 
노인은 개구멍 쪽으로 목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요놈들아 자정이 가까웠다. 인자는 고만 떠들고 들어가서 자그라."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일찌감치 잠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개구멍 바자 근처에 드러난 지난밤의 어수선한 흔적을
수습한다.
그러나 터놓았던 개구멍 바자는 다음날 밤을 위해서 역시 그대로 둔다. 
다락으로 올라가 장죽에 살담배를 다져 놓고 불을 당긴 다음, 연기 한 모금 깊숙하게 마신다. 

아침마다 천자문을 배우러 원두막을 찾아오는 손자 놈이 있다.
녀석은 발소리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다락 위로 불쑥 고개를 디민다.
손자 놈이 들고 있는 천자문은 노인 자신이 배우다가 아들에게 대물림한 것이고,
그 소생이 또한 당신의 손자에게 대물림한 것이다.
때문에 이젠 책갈피가 낡을 대로 낡아 나달나달하다.
손자 놈은 평소와 같지 않게 할아버지의 눈길을 피하고 있다.
바로 앞에 와서 책상다리하고 앉는 손자 놈의 목덜미에 채 수습하지 못한 참외 씨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난밤에 개구멍 바자를 망쳐놓은 참외 서리꾼들을 앞장서서 향도한 장본인이 바로 당신의 손자 놈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못 본 척한 노인은 편안하고 느긋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자문의 열두 번째 장을 회초리 끝으로 가리키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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