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경관 마르틴 베크 시리즈 4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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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릭시르 출판사에서 모집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정주행 멤버로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마르틴 베크는 이십삼 년간 경찰 생활을 했다. 동료가 업무중에 죽는 일도 여러 번 겪었다. 매번 괴로운 경험이었다. 경찰의 업무가 갈수록 위험해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음 차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 p.40]



  마르틴 베크가 불현듯 느낀 불안한 감정은 앞으로 일어날 불길한 사건을 미리 꿰뚫어 본 것이었다. 전세계가 베트남 전쟁에 휘말렸던 1967년, 스웨덴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웨덴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반전 시위가 일상이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스톡홀름 47번 노선을 운행하던 빨간색 2층 버스가 교통 사고를 일으켰다. 탑승객 전원이 사망해버린 아찔한 사고였다. 그런데 이들은 교통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버스 안 총기 사고로 사망했다. 피해자들은 그저 우연히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있던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공통점은 달리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 때문에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쏜 총을 맞고 사망했는가? 스웨덴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량 학살 사건이란 점 만으로도 이미 평범한 일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 중에서 경찰이 있었다. 마르틴 베크의 부하 수사관이었던 스텐스트룀이었다. 그의 특기는 미행이었다. 사건 피해자 간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무차별 범죄 같기도 하다. 그러나 범인은 사건 현장에 별다른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건 계획 범죄 같다.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질 무렵 실마리를 제공하는 건 스텐스트룀이 쫓던 사건이다. 아리아드네, 아니 스텐스트룀이 남긴 실타래를 좇아가보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듯하다.



[˝경찰이 필요악이기 때문이야. 누구든 불현듯 경찰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 직업 범죄자들조차 그래. 제아무리 도둑이라도 자기 집 지하실에서 뭔가 달각대는 소리가 들려서 밤중에 잠을 깨면 어떻게 할 것 같나? 당연히 경찰을 부르지.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이 자기 일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면 어떤 방식으로든 두려움이나 경멸을 표현하기 마련이야.˝ - p.199]



  전작들에 비해 마르틴 베크라는 주인공의 비중이 더욱 낮아졌지만, 그가 속한 경찰이라는 조직을 더 세밀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회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지만 결국 시민들에게 '필요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경찰의 기구하고 괴로운 심정이 묻어난 달까? 두려움이나 경멸을 받는 대상이 되지 않도록 짓는 미소는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하지만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는 경찰은, 여느 직업보다 더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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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기 때문에
나태주 지음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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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시는 가장 오래된 문학 분야지만 오늘날 문학을 지탱하는 건 소설인 게 사실이다.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문학동네 같은 대형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지만, 시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최대한 여러 분야를 편식없이 독서하려고 하지만 당장 나조차도 오롯이 시집을 완독해본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 시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다. 이 책은〈풀꽃〉으로 유명한 시인 나태주가 쓴 산문집이다. 평생을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해온 시인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글을 썼는지, 독자들에게 무슨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는지 계속 생각해보며 읽었다.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삶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감을 준다. 비록 부족하고 실패할지라도 다시금 시도하고 이어갈 여지를 남긴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보는 내 모습. 내가 평가하는 내 삶. 외부 풍경이 아니라 내부 풍경. 그것이 바로 자존감이다. - p.26 좋아한다는 것]



  이 책 제목은 내가 몇 번이고 읽었던 만화 『슬램덩크』 속 명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농구와는 전혀 접점도 없던 양아치 강백호가 농구를 시작했던 건 첫 눈에 반한 채소연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키가 유달리 컸던 백호에게 소연이 건냈던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 백호는 그저 소연에게 호감을 살 목적으로 "네, 아주 좋아합니다"라고 뻔뻔스레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작중 마지막 대회에서 백호는 경기 중에 아주 큰 부상을 입는다. 꿈만 같았던 지난 몇 달이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백호를 농구로 이끌었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농구, 좋아하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좋아하다'라는 단어엔 이렇게 마법 같은 힘이 담겨 있다. 사람이 무언가에 빠진다면,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면 거기엔 많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하다. 다른 부차적인 이유는 필요 없어진다.


  어느덧 80대에 접어든 시인이 50년이 넘도록 꾸준히 시를 써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건 간에 꾸준히 한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여전히 자기 일에 애정을 보여주는 나태주 시인이 참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일축하며 자아 비판했지만, 이 책에 실린 여러 글 중에서도 내 마음에 가장 와닿았던 건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작은 목표를 차근차근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접한 미국 해군 제독 맥레이븐이 한 강연과 책 "침대부터 정리하라"는 충고와 상통해서 더 내 마음을 울리기도 했나 싶다. 대표작 〈풀꽃〉처럼 나태주 시인은 쉽고 친근한 시어로 시를 쓰는 걸로 유명하다. 나'와 인연과 세상과 글을 좋아한 시인이 평생 동안 시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나 또한 나 자신과 내 주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겠단 다짐을 해본다.   



[오늘에 와 나는 젊은 세대에게 말해주고 싶다.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려고 허우적거리지 말고, 조그만 꿈을 가지고 그 꿈을 분명히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일생을 바쳐 그 꿈을 이뤄내라고. 그것이 그대들의 진정한 성공이고 행복에 이르는 첩경이다.

소년이여 큰 꿈을 가져라. 이것은 분명 옛날식 충고요 허황한 교훈이다. 그 대신 나는 말해주고 싶다. 소년이여 조그만 꿈을 가져라. 꿈을 가지되 실현 가능성이 분명하고 목표가 확실한 꿈을 가져라. 끝내 그 꿈을 이뤄라. 이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내 인생을 걸고 하는 말이다. - p.66~67 소년이여 조그만 꿈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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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우주 한 조각 - 매일 만나는 우주의 경이로움 날마다 시리즈
지웅배(우주먼지) 지음 / 김영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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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고 남긴 서평입니다.



[저 점을 다시 보세요. 저것이 바로 이곳입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저것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들어보았을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인류가 저 곳에서 삶을 영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이,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종교와 이념, 경제 체제가,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가, 모든 영웅과 겁쟁이, 모든 문명의 창시자와 파괴자가, 모든 왕과 농부가,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 연인들이,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희망에 찬 모든 아이들이, 모든 발명가와 탐험가가, 모든 도덕적 스승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모든 슈퍼스타들이,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이,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바로 저곳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 칼 세이건]



  지구만 하더라도 우리 인간에겐 광대한 곳인데 우주 차원에서 보자면 지구는 말 그대로 ‘창백한 푸른 점’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점 위에서 평생을 살다 간다. 우리를 둘러싼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모르는 채로.

  여태 인간이 밝혀낸 것보다 아직 밝혀내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곳, 우주라는 공간은 인간이 감각은커녕 가늠조차 하기 힘든 곳이다. 그럼에도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본격적인 천체 관측을 시작한 이후 지난 수백 년 동안 우주 과학 기술과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뤄낸 건 참 대단한 일이다. 허블, 스피처, 케플러 같은 우주 망원경과 보이저 탐사선이 아주 혁혁한 역할을 했지만, 제임스 웹이 포착하여 우리에게 전송한 이미지는 실로 경이롭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유튜브 채널 〈우주먼지의 현자타임즈〉와 〈보다BODA〉를 통해 우리에게 쉽고 재밌게 천문학을 알려준 과학 커뮤니케이터 지웅배(우주먼지)다. 제임스 웹 망원경이 2022년 7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촬영한 온갖 관측 이미지에 친근한 해설을 덧붙였다.

  몇 년 전부터 일력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고, 그 중 일부를 필사하는 루틴을 지켜오고 있다. 올해엔 넘겨보는 일력 종류가 더욱 많아 필사 거리도 더 많아졌다. 스토리 업로드와 필사 이외에도 또 다른 루틴이 있는데, 이 책을 비롯한 ‘날마다 시리즈’를 통해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구름과 꽃에 이어 우주라니, 매일 보고 읽고 생각할 거리가 늘어나서 기쁘다. 같은 시리즈로 출간됐지만 이번 <날마다 우주 한 조각>은 판형이 앞선 2권과 다르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안에서 판형이 달라 혼자만 책장 안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걸 싫어하는데, 책을 펼쳐본 후 다 이유가 있구나 하고 납득했다.

  우주라는 드넓은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이전 시리즈보다 판형을 더 키우고 더 질 좋은 종이를 쓰는 건 출판사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이 책에 실린 사진이 365장이란 점이다. 올해는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윤년이라 366일로 제작된 평생 일력이 많이 출간됐는데, 딱 한 장 분량만큼 사진과 해설이 더 있으면 어땠을까 싶어서 못내 아쉽다. 책의 완성도에 비하면 물론 이건 지극히 사소한 푸념이다. 보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경이롭고 아름답고 신비한 우주를 더 가까이서, 생생하게 느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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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시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3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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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아는 사람은

여기서도 알게 되리라.

동방과 서방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두 세계 사이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재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동방과 서방 사이를

오가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 괴테, 『서동시집』 '유고 중에서'.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배타적인 동물인가 보다. 우리 양심은, 우리가 배운 가르침은, 언제나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은 지옥이다". 2024년 3월 10일에 있었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가여운 것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엠마 스톤〈오펜하이머〉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시상식 직후 같은 논란에 휩싸였다. 전년도 수상자가 시상자가 되어 올해 수상자를 발표하고 트로피를 전달하는 게 아카데미 시상식 관례다. 지난 해 오스카를 석권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양자경과 키호이콴이 나왔다. 두 배우는 아시아계다. 그리고 전세계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올해 수상자인 두 백인 배우에게 무시당했다. 누리꾼들은 시상식 직후 갑론을박을 벌였다. 두 백인 배우가 아시아계 배우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는지에 대해서. 이민자들로 이뤄진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노예가 해방되고 민권법이 제정된지 오래지만 여전히 백인이 미국 사회에서 중심이다. 흑인과 아시아계를 비롯한 기타 인종은 소수자minorities로 전락하여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이처럼 은밀하게 차별 당했고, 당하고, 당할 것이다.


  인권과 세계 시민 의식이 보편화된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부지기수인데, 괴테는 18-19세기에 걸쳐 일생을 보냈다. 특히 19세기 들어서는 유럽이 노골적으로 제국주의를 앞세워 세계 각지를 점령했다. 이런 역사적 흐름에서 백인은 이른바 인종 카스트 최상층에 위치한 '신에게 선택받고, 유전적으로 우월하며, 문명도 진보한' 존재다. 따라서 그 아래 자리 잡은 기타 인종을 지배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계몽'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겨진 시기였다.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일갈한 마르크스는 동양을 미개하게 여겼다. "그들은 스스로를 잘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또한 대영 제국 시기 동양을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삼았던 디즈레일리 총리 역시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로 폄하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20세기에 제시했던 『오리엔탈리즘』속 문제 의식은 유럽에서 유구한 전통이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불편한 진실이다. 동양은 여전히 서구인들이 정한 기준에 맞춰 구획되고 굴절되어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 비롯하여 동양을 대하는 시각은 편서풍처럼 늘 일방적이다. 괴테는 오늘날 유럽 문명의 근간이 된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불멸의 기행문을 남겼다. 유구한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그보다 앞서 번영했던 이집트와 페르시아 같은 동방 문명보다 더 '우월해야 했다'. 그래야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흐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기행』은 물론 괴테는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 받아 「이피게니에」, 「스텔라」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 그가 머나먼 동방 문명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원숙한 인생 말년에『서동시집』을 남긴 건 무척 인상적이다. 찬란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단절되었던 중세 시기는 명백히 서양이 동양에 뒤쳐졌다. 불편한 진실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빛나는 전통을 복원한 근대 르네상스 시기를 한없이 드높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너무나 강성해 육상 실크로드 통행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유럽인들은 불가피했던 우회책인 신항로 개척을 진취적이고 모험적으로 포장했다. 


  이런 사회 문화적 분위기와 종래 지적 전통을 거부하고, 칸트 뒤를 이어 세계 시민주의를 역설한 괴테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독문학의 거인이었다. 하이네, 만, 브레히트 같은 기라성 같은 후대 독일 문인들이 괴테를 찬미했던 것도, 헤겔과 니체 같은 철학자도 괴테를 향한 헌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책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 괴테가 가졌던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이 유익했다. 나폴레옹과 대비시키고자 했던 티무르 시편을 끝내 미완성으로 남긴 이유, 그리고 동시대 이슬람 문명이 아니라 중세 페르시아와 당시 성행했던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에 내세웠던 이유는 결국 이미 지나가버린 것에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구도자의 표상과 같다는 지적이다. 〈청산별곡〉 속 '청산'이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이듯이, 『유토피아』는 역설적이게도 어디에도 없는 공간이듯이, 괴테가 진정 바랐던 대로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화합하는 시기는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괴테가 대표작 『파우스트』에서 말했던 대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라는 말을 끝내 져버릴 수는 없다. 노력은 결국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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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리듬 (알라딘 한정판 표지)
엘라 윌러 윌콕스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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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의 서사와 등장인물보다 강렬했던 윌콕스의 짧은 시구. 더 많은 시를 만나볼 수 있어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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