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베이커 -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현대 예술의 거장
제임스 개빈 지음, 김현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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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4월 30일, 세계 재즈의 날이다. 4월의 마지막 날에 쳇 베이커(Chesney Henry Baker, 1929~1988)가 남긴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T. S. 엘리엇은 〈황무지〉 첫 행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며 운을 뗀다. 엘리엇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일축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쳇 베이커가 살다 간 인생은 잔인했노라고 말할 순 있겠다.


  그는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났다. 삶을 마감한 곳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었다.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투숙 중이던 호텔 바깥에서 피칠갑이 된 채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못했지만 그는 마약 중독자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실족사했거나 자살했을 수도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인 말년만 순탄치 못했던 게 아니다. 쳇 베이커라는 예술가가 살아온 궤적 자체가 마치 악보 속 고음과 저음처럼 너무도 들쑥날쑥했다. 어릴 때부터 사랑보다는 폭력을 더 받았고, 주변에서 인기가 많았던 것도 아니다. 음악에 관한 재능은 확실했지만 그 엄청난 재능을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사실 베이커 외에도 마약에 찌들어 살았던 예술가는 많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히피 세대를 중심으로 한 한탕 문화, 마약 중독, 자유로운 삶 같은 사회 분위기는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런데 쳇 베이커란 인물은 도를 넘은 수준이었다. 대마초부터 헤로인, 코카인, 팔피움, LSD, 코데인, 모르핀까지. 손을 안 대본 약물이 없었다. 본인부터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지만 같이 밴드를 했던 음악가들,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던 아내들 역시 마약에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조국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그는 1959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 와중에 마약에 상습적으로 손을 대다가 유럽에서 추방당했다. 공연비를 항상 현금으로 받은 그는 그 돈을 마약 구매에 탕진하거나, 밴드원들에게 줄 돈을 착복하기도 했다. 그렇게1964년 미국으로 억지 귀국한 그는 다시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에 염증을 느끼다가 1975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책의 부제목처럼 그는 조국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와 너무도 대비되는 사생활, 고점과 저점이 너무도 뚜렷한 앨범 실적과 연주 실황, 지독한 마약 중독에다가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사생활. 쳇 베이커는 예술을 꿈꾸는 이들에게, 아니 그저 사람들에게 반면교사로 남기 좋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이 온갖 문제로 점철되었다고 해서 그가 남긴 음악적 성취를 평가절하 하기는 힘들다. 나 역시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쳇 베이커가 분 트럼펫 연주를, 그가 녹음한 보컬을 듣고 있다. 오늘날 힙합처럼 흑인의 전유물이었던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몇 안되는 백인 음악가이기도 하다.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가 사후에 조금씩 조국에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니,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할 만하다. 문득 작년에 보았던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마무리하는 문구가 떠오른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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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해방 - 치매, 암, 당뇨, 심장병과 노화를 피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
피터 아티아.빌 기퍼드 지음, 이한음 옮김 / 부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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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ie_pub 부키 출판사에서 모집한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를 바라본다는 말이 나오는 요즘이다. 예전보다 인생을 오래 누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민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다. 오래 살더라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수명을 늘리기만 할 뿐이라면, 구태여 장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거다. 특히나 가까운 이들이 연명 치료를 받으며 힘겨워하는 모습을 봤다면 기계적으로 수명을 늘리는 일이 더욱 달갑지 않을 거다.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에는 ‘건강하게’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만성 질환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지 않은가. 이 책은 그중에서도 치매, 암, 당뇨, 심장병이라는 네 가지 대표 질환을 다루고 있다. 가제본 서평단은 4가지 주제 중 하나를 소개하는데, 내게 당첨된 건 ‘당뇨‘였다. 마치 묵시록의 4기사를 연상시키는 네 가지 질병은 노화와 함께 오는, 대표적인 성인병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당뇨는 젊은 층에서도 빠르게 증가 추세라고 한다. 운이 좋게도 내가 더욱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를 먼저 읽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난 후 젊은 층도 그저 당뇨에 관심을 가질만한 게 아니라 꾸준히 관심을 가진 채 예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마트에서 음료와 주류 진열대를 가보면 온갖 ‘제로’ 제품이 나와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책 앞부분에 나온 사례와도 연관이 있는데,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지만 지방간과 췌장 기능 이상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있었다. 매일 같이 콜라를 마셨기 때문이다. 요즘은 콜라 중에서도 제로 콜라가 대세고, 콜라 말고도 온갖 제로 음료, 맥주도 무알콜 맥주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럼 증상이 덜 하려나? 내가 접한 가제본에서는 제로 음료까지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어쨌든 현대인은 액상 과당을 지나치게 섭취하고 있다. 아무리 대체당이 설탕보단 낫다고 해도 과유불급이긴 마찬가지일 거다.

작년 여름은 무더웠다. 나는 종류별로 제로 음료를 한 박스씩 사두고 탄산을 섭취했다. 그나마 제로 음료라 조금은 안심하고 마셨지만, 액상 과당과 탄산을 머금은 음료가 몸에 좋을 순 없다. 그리고 요 몇년 동안 나는 위스키, 꼬냑, 럼 같은 증류주로 ’외도‘를 즐겼지만, 나는 정말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독일에서 살던 반 년 동안은 매일 맛있규 시원한 맥주 한 캔 씩은 마셨다. 날이 더워지면서 요즘 다시 맥주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맥주 속에 있는 요산과 퓨린이 나중에 내 몸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한여름 샤워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만과 대사 기능이 반드시 연관있는 건 아니며, 산업화 이후 너무도 빠르게 변한 우리 생활에 신체 진화가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며 인슐린 저항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학 정보를 이 책을 통해 배웠다. 하지만 책은 단순히 질병의 원인과 증상을 넘어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알려주고 있다. 묵시록의 4기사가 아무리 위협적이더라도 운동, 영양, 수면, 정서 건강을 잘 관리하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운동이 우리 몸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건강한 삶에 필수적인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네 가지 해결책 중에 가제본에는 운동만이 실린 이유도 그만큼 운동이 중요하기 때문일 거다(나머지가 중요치 않다는 말은 아니다).

웰빙을 넘어 웰에이징과 웰다잉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면 좋겠다. 삶이 유한한 만큼 질병도 우리를 쫓으며 계속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최선의 치료는 곧 예방이다. 더 열심히 운동하고, 식단과 영양을 더 챙기고, 잠을 더 오래, 푹 자고, 우리 마음을 돌봐야 한다. 하나 같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 몸도 못 챙겨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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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 세상을 경악시킨 집단 광기의 역사
맥스 커틀러.케빈 콘리 지음, 박중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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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어떤 종류의 정치, 종교, 윤리를 설교하든지 간에, 이들의 말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들리건 간에, 그 모두는 단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카리스마적 컬트 지도자는 자기한테 유리하다 싶으면 핵심 원칙조차도 저버린다. 내심 이들이 따르는 규칙은 단 하나뿐이다. ‘뭐든지 간에 내가 원하는 것은 가지며, 그걸 얻기 위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이 없다.’” - p.173-174]



  컬트cult란 젊은이들에게 종교적인 숭배에 가까운 열광적인 지배를 받는 현상을 일컫는다(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참조). 이 현상이 문화로 확대되면 컬트 현상, 즉 일반적인 경향과 다른 다소 낯설고 동떨어진 가치를 배타적으로 추구하고 향유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가치에 동조하는 소수 집단이 열광한다. 태생부터 주류 문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멀리함에도 일부 극소수 사람들은 무언가를 강력히 믿으며, 거기에 의존하길 원한다. 그리고 이를 이끌어줄 사람이 등장하여 맹목적인 신앙을 바칠 사람과 결합할 때 컬트가 탄생한다. 


  누구에게나 어딘가 소속되려는, 삶에서 더 깊은 의미를 끌어내려는, 권태롭지 않고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일상을 살고 싶은 열망이 존재하지 않은가? 책에 소개된 컬트 지도자 9명과 6개 유형은 그렇기에 단순 사례 모음집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아주 지독하고, 잔인하고, 뻔번하고, 교활하게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이용했다. 하지만 박수를 치려면 양손이 있어야 하듯이 단순히 돌연변이 같은 컬트 지도자만이 아니라 어떤 경우든 간에 무조건적인 헌신을 해줄 지지자들이 함께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 역시 컬트를 그저 사회에서, 규격에서 벗어난 이들로 마냥 치부할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언제 그런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에 빠질지, 그리고 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인물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수치, 착취, 가학성, 과대 망상, 탈주, 현실 부정 같은 6개 키워드는 듣기만 해도 부정적이다. 사실 이런 소재는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단골 소재이며,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같은 프로그램에서 아주 오랫동안 다룬 바있다. 하지만 이 책이 여느 프로그램과 다른 것은 단순한 현상 나열을 넘어 이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시행 착오를 겪었는지, 추종자들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이 흐름이 어떻게 광기로 이어졌는지 같은 흐름을 쭉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저 일부 엽기적이고, 불편하고, 악명 높은 사례로 치부하기엔 찜찜함이 많이 남는다. 언제 이런 일이 또 생길지 모르기에 그렇다. 넷플릭스에서 한때 큰 화제를 모았던 〈나는 신이다〉를 흥미있게 본 분들이라면 이 책 역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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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물이 위험하다 - 과불화화합물을 쫓는 집념의 르포
모로나가 유지 지음, 정나래 옮김 / 산지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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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니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과불화화합물은 화학 전공자나 관련 분야 종사자가 아니라면 꽤나 생소한 용어다. 책은 비교적 익숙한 영화 〈다크 워터스(Dark Waters, 2019)〉이야기로 출발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에다가 내 인생 영화 중 하나인 〈스포트라이트(Spotlight, 2015)〉 제작진이 참여했단 소식을 듣고 개봉하자마자 바로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 화학 기업 듀폰Dupont은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있는 공장에서 나온 오염물질을 그대로 방류했다. 이 오염물질은 과불화옥탄산(Perfluorooctanoic Acid, 이하 PFOA)란 물질인데 프라이팬, 콘택트렌즈, 아기 매트 같은 일상 용품에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이 물질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되자 가축들은 폐사하고, 사람들은 온갖 중증 질병에 시달리고, 기형아도 태어난다. 20년이나 이어진 지난한 소송 끝에 듀퐁은 패소하고 피해자들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보상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영화 제목 끝에 붙은 복수형 접미사 -s처럼, 이는 비단 미국에서만, 한 회사가 벌인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PFOA 외에도 과불화옥술폰산(Perfluorooctane Sulfonate, 이하 PFOS)란 물질도 있다. 이 둘은 대표적일 뿐이고 과불화화합물은 수천 종이 넘는다. 따라서 '어디에나 있는 화학물질(Everywhere Chemical)'이자 '영원한 화학물질(Forever Chemical)'이란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 일상 곳곳에 있을 뿐더러 쉽게 분해되지 않고 잘 축적되는 특성 탓이다. 이 물질에 자연에 방류되면 토양에 잔류해 지하수까지 오염시킨다. 우리 생활을 아주 윤택하게 해주는 탄소(Carbon) 결합물이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되어 돌아오는 부메랑이 된 것이다. 이처럼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이 책은 아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사히신문》 기자 모로나가 유지가 2018년 4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끈질기게 취재한 기록을 담았다.


  상하수도 설비가 본격적으로 갖춰진 근대 이후 인류는 마침내 수인성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육안으로 보기엔 수돗물은 몇 세기 전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깨끗하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정부가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거나, 조사를 해놓고도 기록을 은폐하거나, 관련 법규를 충분히 보완하지 않은 것도 모두 문제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오염원이 결국 미군 기지였다는 점이다. 미군은 포소화약제 사용을 인정했으나 조사에 제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가데나 기지 인근을 비롯해 미군 기지가 곳곳에 자리 잡은 오키나와 현에서 문제가 특히 심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일미군지위협정도, 미일합동위원회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군 기지는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많이 있다.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스로 기지가 일원화되면서 부지 반환이 잇따르는 추세다. 필자 역시 『냉전의 벽』이란 책 저자로 참여해 서울 용산과 부산 서면에 위치했던 구 미군 기지 내 심각한 토지 오염을 지적한 졸고를 쓴 바 있다. 캠프 히야리아가 오래 전에 반환되었음에도 부산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기까지 10년 가까이 걸렸다. 토지 정화 작업이 그만큼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면적도, 주둔 병력도 훨씬 컸던 용산 기지는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책임 주체인 미군과 정부, 그리고 일부 기업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온다. 그나마 희망을 찾자면 최근 이상 기후 등으로 환경 문제에 관한 관심이 가파르게 늘면서, 세계 각국에서 과불화화합물 사용을 규제하려는 점이다. 물 한 모금 마음 편히 마실 깨끗할 미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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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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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소굴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이문열의 소설 제목, 혹은 이에 영감을 주었다던 바흐만의 시 〈유희는 끝났다 Das Spiel ist aus〉한 구절이다. 처음부터 바닥에 있는 이가 추락하진 않는다. 주인공인 빌헬름 카스다 소위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다. 할아버지는 중장, 아버지는 중령 출신이다. 집안 대대로 군에 복무했으며 빌리(빌헬름의 애칭) 역시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를 나락에 빠트린 사건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시작한다. 옛 전우 오토가 빌리에게 돈을 빌리러 오면서다. 오토는 도박에 빠져 군에서도 쫓겨나고 근무 중인 회사 돈에도 손을 댔다가 들킬 위기에 처한다. 오토는 같은 회사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슬쩍했던 1천 굴덴을 돌려놔야 하지만 노름에 빠진 이에게 그런 큰 돈이 있을 리가. 누구보다 착실한 빌리에게 옛 정을 호소하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외숙모님. 사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대단히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습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노름빚입니다. 노름빚을 갚지 못하면 저는 군인의 명예를 잃게 됩니다. 저 같은 군 장교로서는 모든 걸 다 잃는 겁니다.” - p.113]



  당장 내일 아침까지 돈을 빌려달라는 급한 부탁을 빌리 역시 거절한다. 처음에는. 하지만 빌리가 재미 삼아 해본 도박으로 꽤 큰 돈을 번다. 그러자 빌리에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난다. 그까짓 돈 도박으로 좀 벌어주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도박판에서는 더 그렇다. 거듭된 승리에 도취해버린 빌리는 그만 독립시행의 확률도 망각해버린 듯하다. 빌리가 도박에서 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의지할 사람은 자신을 전부터 돌봐줬던 부유한 외삼촌뿐이다. 하지만 외삼촌은 어찌 된 일인지 그 많은 재산을 잃은 상태다. 마치 새장 속에 갇혀 정해진 만큼만 모이를 먹을 수 있는 새처럼, 외삼촌은 모든 생활을 외숙모에게 의지한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희망은 외숙모다. 비장하게, 그리고 비굴하게 부탁드릴 생각으로 외숙모를 찾아가지만 빌리와 외숙모는 사실 이전에 엮인 적이 있는 사이다. 



[빌어먹을 스페이드! 스페이드는 늘 그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1천 굴덴이 다시 영사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게 무슨 문제가 되나? 아직 수중에 돈이 남았는데. 게다가 이미 망한 신세 아니었나? 남은 돈이 거의 없었는데……, 갑자기 수천 굴덴이 눈앞에 나타났다. 영사는 정말 훌륭한 분이야. 빌리는 잃은 돈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장교답게 영사에게 빌린 노름 빚은 반드시 갚아야지. 엘리프 녀석 따위는 늘 저 모양으로 살겠지만, 나는 장교다. 보그너 같은 놈하고는 달라……. - p.58]



  책 말미에 실린 역자 해설에서는 에로스(삶의 본능)과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방적인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은 외삼촌의 처지, 한때 친밀했던 빌리와 외숙모의 관계는 에로스적이다. 결국엔 타나토스가 에로스를 압도하지만 이를 위해선 그리스 신화에서 또다른 개념을 빌려와도 좋을 듯하다. 니체를 빌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떨까? 주인공 빌헬름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오토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의 이성을 마비시킨 건 도박에서 연이은 승리다.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승리가 주는, 그리고 승리에 뒤따르는 목돈은 이성을 지워내기에 충분하다. 도파민, 오르가즘, 카타르시스. 뭐든 간에 그는 승리에, 상금에, 쾌락에 도취한 디오니소스 같은 상태다. 전도유망한 빌헬름 카스다 소위는 어리고 자신만만했던 이카로스가 날개를 잃고 바다로 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 처지에 빠진다.     

  

  또 하나 곱씹어 볼 것은 제목이다. 한밤은 Morgengrauen인데 이는 morgen과 grauen의 합성어다. Morgen은 '아침'이라는 명사도 되지만 '아침에, 내일에, 미래에'라는 부사도 된다. 또하나 grauen에는 '날이 밝아 오다'라는 뜻 외에도 '무섭다, 두렵다'라는 뜻도 있다. 주광성 동물인 인간은 빛이 있는 낮을 갈구하고 어둡고 스산한 밤을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간이 역설적으로 작용한다. 낮이든 밤이든 간에, 결국 우리 인간은 카이로스에 삼켜질 뿐인 가련한 운명이다. 카이로스가 오는 걸 도박이 몇 차례 막아줬지만 매번 이기기만 하는 도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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