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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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가끔 가는 식당이 있다. 한적하고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인데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리는거 말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다. 음식 하나 하나에 정성이 가득한 곳이다. 오늘은 시간 여유가 없어 미리 주문하고 식당엘 갔다. 여느 때와 달리 손님들이 꽤 있었고, 주인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분주해 보였다. 예약하고 가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한참을 기다릴 뻔 했다며 식사를 하는데 돈가쓰 고기는 넘 두꺼웠고, 식전 빵은 바삭함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한끼 해결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밥을 먹고 잠시 공원을 느긋하게 산책하면서 생각해 보니 여유를 두었으면 주방에서 늘 하던 대로 고기는 좀더 두드려서 얇아졌을테고, 식전 빵도 맛있게 바싹 구워져서 나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느림의 미학을 잊어버린 거다. 느긋함이 주는 여유, 기다림 속에 얻어지는 작은 만족, 가치등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딜리터...
‘당신의 사라지게 하고 싶은 물건을 이 세상에서 지워드립니다.’
내가 사라지게 하고픈 것은 뭐가 있을까? 어린 시절 친구에게 못되게 굴었던 거, 부끄러웠던 기억, 잘못 선택했던 순간, 나에게 상처준 어떤 이...
지우고 싶은 경험들, 생각들이 참 많구나 싶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실수도 했고, 세련되지 못한 행동도 있었고, 그리고 부끄러웠던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살아봤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서(노래 가사 같기도 하네) 그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준 주춧돌이고 나를 키워준 ‘팔할’이기 때문이다.

‘파괴는 창조보다 자연스럽고 만드는 것보다 부수는 게 훨씬 쉽다. 그리는 것보다 지우는 일이 간단하다.’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인간의 무분별한 삶의 행태(자연 파괴, 불필요한 소비사회등)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소설일까 싶었다. 이 책을 읽고 딱히 주제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단지 심심풀이 땅콩처럼 무료한 시간에 굴러다니는 책을 한권 집어 든 느낌이다. 우리말도 있는데 (굳이 안 써도 되는)영어 단어는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선악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모든 악은 귀결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님 주인공을 완벽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던 건지. 작가 자신을 대변하고 싶었던 거였을까? 내가 느낀 주인공 모습은 홍길동 같기도 하고, 유충렬 같기도 하고 이몽룡 같기도 하고.
그냥, 지워주는 거였다. 지우고 싶은 것들을. 다만, 그 지움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당연한거 아닌가?)이라고 깨우쳤다. 하지만 지우고 싶었던 순간들도 기다리다 보면 보석처럼 빛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 내가 아직 판타지 작품을 소화하기에는 독서력이 넘 부족하고 작가에 대한 너무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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