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들린 가족 이야기>, 세르지오 옥스먼, 2012












부산국제단편영화제 - 모퉁이관객리뷰


http://bisff.org/kor/board/daily_view.asp?idx=129&page=6


낱장의 시간들*

 

“내가 버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가 죽을 때 누렇게 변식되고, 퇴색되고, 희미해져서 결국 언젠가는 쓰레기로 버려진 이 사진과 함께 버릴 것은 무엇일까? ‘삶’(그것은 살아 있었고, 카메라 렌즈 앞에서 살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뿐 아니라 때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사랑마저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서로가 사랑했다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을 앞에 두고, 나는 그것이 이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될 보석과도 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무심한 자연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과 함께 버려지는 것이 ‘삶’(그리고 때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사진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내포한다는데 동의한다면, 세르지오 옥스먼의 <모들린 가족 이야기>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버려진 삶의 조각들을 재구성하고 그에 대해 증언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생애를 완전한 소멸로부터 구출하려는 기획이라고.


그런데 영화에는 감독이 얼마나 성실한 채집자였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내레이션이 얼마만큼의 사실에 기반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불가해한 폐쇄성을 어떻게 일관된 서사로 엮어내야 할 것인가. 감독은 미처 기록으로 남지 못한 공백들을 앞에 두고 객관적 관찰자의 자세를 택하는 대신, 주관적 해석자로서 개입하길 원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그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 그들 각자의 감정에 대해 상상하고 첨언한다. ‘엘머’가 엑스트라로 잠깐 얼굴을 비추었던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의 내러티브와 ‘모들린 가족’의 삶을 평행으로 직조하려는 시도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저 거듭된 실패에 지쳐 세상으로부터 망명하려는 사람들이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감독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 ‘그들이-거기-존재했음’을 거두고 ‘이제는-존재하지-않음’을 표상하는 빈방의 이미지로 돌아선다. 불화, 상실감, 외로움, 그리고 모종의 이교도적 음습함까지도 모두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오래된 사진에 나온 인간 얼굴의 덧없는 표현 속에서 아우라가 최후의 섬광을 던지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이들 사진은 멜랑콜리로 가득 찬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사진에서 전시가치는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몰아내기 전, 최후의 저항으로 인간의 얼굴 속으로 도피한다고 벤야민은 말했다. 인간의 얼굴을 찍은 사진은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멜랑콜리하다. 영속할 수 없는 존재 양식. 찰나가 찰나를 밀어내는 시간의 폭력성. 모두가 다 아는 사실. 너도, 나도, 모두 그렇게 사라진다는 것. 이 영화가 전하는 확증된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희경의 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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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소금 >, 빔 벤더스, 훌리아노 살가도 , 2014







BIFF웹진 - BIFF살롱 - 시민평론단-시민평론가

 

http://www.biff.kr/artyboard/board.asp?act=bbs&subAct=view&bid=9612_10&page=1&order_index=no&order_type=desc&list_style=list&seq=37424

 

세계적인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 인생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이 땅의 소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살가도의 사진 푸티지 사이사이 이 영화의 공동연출자이자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아들이기도 한 훌리아노 살가도의 기록영상이 끼어든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연출자 빔 벤더스가 살가도의 촬영현장에 동행하여 작업 중인 살가도의 모습을 담아낸다.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인 만큼 다양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등장할 법도 하지만 전무하다시피 하고, 내레이션의 대부분을 벤더스, 훌리아노, 그리고 세바스티앙 살가도 자신이 맡고 있다. 그 때문인지 영화 전체가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친절하게 해설하고자 하는 코멘터리 영상에 가깝게 느껴진다.

 

영화는 이토록 단촐한 구성으로 일생을 사진에 바쳐온 작가의 삶과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 땅의 소금>은 결과적으로는 어딘지 단순하지 않은 영화가 되었다. 일단 살가도의 사진 푸티지가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이 영화도 그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따라붙었던 윤리적 문제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선한 의도를 배반하는 사진의 미학적 효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름다울 수 없는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해내는 예술가의 권능은 정말로 무죄일까? 벤더스의 카메라가 다큐멘터리 영상 특유의 현장성으로 인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과 비교하여, 탐미적으로 거의 완벽에 이른 한순간을 포착한 스틸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얼마나 압도하는가.

 

백곰을 찍는 살가도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 그는 오두막에 숨어 대상을 염탐하고 포복자세로 대상에 접근한다. 이때 그는 총구를 겨누듯 렌즈를 조준한다. 영화는 살가도와 백곰의 교감을 강조하려는 듯 백곰과 살가도의 유사한 행동을 평행 편집으로 보여주지만, 이 시퀀스가 상기시키는 것은 적군과 아군의 대치상황 - 전쟁영화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살가도의 사진을 다소 엄격하게 비판하며 말한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손택은 사진 이미지가 사람들을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살가도의 사진은 손택의 기준에서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했다. 살가도에게 인간은 구제불능으로 악하다. 오직 자연만이 선하다. 오랫동안 인간의 고통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살가도 역시 종래엔 정해진 수순처럼 자연으로 회귀했다. 최초엔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탐욕에 호기심을 느끼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작가가 오랜 시간 인간의 고통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끼기까지, 그 일련의 사진 여정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의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쉽게 반발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손택의 이의제기 역시 유효하다. 대상에 대한 호의로 가득 찬 연출자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소금>은 애초에 목표하지 않았던 쟁점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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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평에서 발간하는 비평지 <영상문화>에 기고한 글.

5월에 원고를 보낸 후로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부족한 글이다.

두고두고 퇴고할 목적으로 여기에 옮겨 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의 2014년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는 전작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차이가 있다. 이제껏 앤더슨의 세계가 1960년대를 향한 감수성으로 직조한 소우주였다면, 이번에는 마치 빅뱅을 겪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세계 외부, 1930년대의 역사적 세계로까지 팽창한 것이다. 이런 식의 변화를 두고 소년 웨스 앤더슨이 드디어 성숙기에 들어섰다며 반기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세계사의 고통을 코미디로 다룬 것은 도리어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입장도 있다. 소동을 부추긴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앤더슨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앤더슨이 이에 대해 나서서 대응한 적이 있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이 글은 다만 츠바이크를 다시 써내려가기를 선택했던 앤더슨의 영화적 입장을 영화 내부에서 발견해보려는 시도이다.


시각적 유희

사실 앤더슨 영화의 이야기의 변화만큼이나 구체적으로 이야기되어야할 것은 1.37:1의 화면비율이 도입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는 모두 네 겹으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시점과 80년대는 1.85:1로, 60년대는 2.35:1로 시대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비율을 적용했고, 그에 따라 1930년대에 맞춤한 영화적 그릇으로 1.37:1이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시대마다 화면비율을 달리하면서도 구도나 카메라의 움직임만큼은 일관된 스타일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앤더슨은 30년대를 위해 이제껏 다루어본 적 없는 화면비율을 모험적으로 시도하면서도 여전히 대칭을 맞춘 직각 구도(완전한 부감, 완전한 정면, 완전한 측면)를 고수하기 위해 그 시대 영화들의 풍부한 시각적 표현을 탐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더욱 의아한 이유는 데이비드 보드웰의 지적대로 앤더슨의 스타일이 1.37대 1 비율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헤드룸(headroom)이 생기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앤더슨에게 이 문제가 더욱 까다롭게 느껴졌던 것은 그가 트래킹이나 패닝 등 카메라의 움직임을 즐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카메라를 대상의 직각에 세우기 위해 대칭구도에 약간의 변칙을 허용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가장 단순한 구도를 위해 오히려 복잡한 공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앤더슨 영화에서 직각구도는 필모그래피를 더해갈수록 엄격하게 적용되어 왔는데, 이 영화에 이르러는 난관을 타파해 나가면서라도 지켜내야 할 법칙처럼 다루어진 셈이다. 앤더슨은 이 구도가 그의 영화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드웰은 직각구도가 공간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공간은 원근법적 깊이감이 줄어드는 대신, 빨랫줄에 널린 옷감을 보는 것처럼 층층이 납작해진다. 공간의 평면성은 다양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평면적인 공간은 인위적이고 회화적이다. 이 때문에 시각적으로 독특하고 재미있다. 버스터 키튼이나 기타노 다케시 같은 작가들이 무표정한 인물을 카메라의 정면에 세움으로써 특유의 희극적인 정서를 만들어냈다. 전작에 비해 액션이 많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버스터 키튼의 도움을 사양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보다도, 현실감을 탈취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앤더슨의 영화에 공간의 평면성이란 ​필연적인 요소였을 지도 모른다. 앤더슨은 도화지처럼 납작해진 스크린 위에 그의 취향이 반영된 독특한 미감의 오브제와 공간을 덧칠한다. 그가 그려내는 것은 아름답지만 먼 나라 유럽(혹은 인도), 겪어 본 적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다. 카메라는 공간을 매만지듯 트래킹하거나 패닝 한다.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동경의 세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다시 보고 싶은 마음. 성공할 수 없기에 언제고 다시 쓰일 수 있는 실패의 유희. 공간을 훑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한없이 무상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즐겁다.

이런 의미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구스타브와 제로의 도주에 할애하는 것은 카메라가 더욱 활동적으로 유희하게 하려는 장치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들은 호텔을, 마담D의 저택을, 감옥을, 산봉우리를 끝도 없이 헤맨다. 마담D의 법적 대리인 코박스 마저 박물관을 헤맨다. 카메라는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경쾌하게 따라나선다. 이 영화의 움직임이 움직임 그 자체로 즉물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움직임에서 의미를 발견하려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반영성의 유희

시공간적 사실성보다는 기하학적 공간 연출과 카메라의 움직임에 천착하는 웨스 앤더슨에게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란 애초에 패러디의 형식으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드라마를 방해하지 않는 스타일이 아니라, 스타일을 방해하지 않는 드라마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는 서사를 평면적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발견된다. 파시즘의 창궐, 음모와 도주, 이어지는 죽음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극적 요소만 보자면 웨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비극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극적 클라이맥스인 구스타브와 아가사의 죽음은 어떻게 묘사되었던가? 모든 소동이 끝난 어느 날. 사건의 후일담 속에서 내레이션으로 전해질 뿐이다.

서사에 있어서의 원근법적 깊이, 다시 말해 서사의 리얼리즘적 환영은 자기반영적 장치에 의해 무너지기도 한다. 앤더슨의 영화는 주요 인물로 작가를 등장시켜 작품 스스로의 허구성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자기반영적이다.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서 맥스의 다종다양한 취미들 중 가장 열성적이었던 것은 연극연출과 극작이다. 이 영화는 마치 영화 전체가 맥스가 연출한 연극인양 ‘막’ 형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로열 테넌바움> 역시 테넌바움 일가의 수양딸이자 작가인 마고 테넌바움이 쓴 소설처럼 챕터를 나누고 있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막내 잭 역시 작가다. 영화는 형제의 경험담인 동시에 그가 쓰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그려진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작가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추동된다는 점에서 앤더슨 영화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자기반영적 성격을 드러내는 영화다. 앤더슨의 영화는 현실적 깊이 대신 현실인 체 하지 않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자유를 택했다.

자기반영성은 다양한 텍스트들을 모방, 인용, 변주하는 텍스트의 혼합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앤더슨이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작품, 특히 영화로부터 적극적으로 영감을 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이다. 그는 누벨바그에 대한 애정 역시 인용과 모방으로 고백해 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트뤼포의 <포켓머니>이고, 그가 찍은 프라다 광고는 트뤼포의 <줄 앤 짐>을 패러디한 것이다.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를 노골적으로 변주한 영화 <문라이즈 킹덤>에서 앤더슨은 고다르의 소품들, 문자를 활용하는 방식, 트래킹 쇼트를 전유함으로써 아이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의 도덕뿐만 아니라 고다르의 텍스트 자체를 아슬아슬하게 가지고 논다.(이는 어쩐지 고답적으로만 여겨지는 고다르의 텍스트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유희적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히치콕의 스릴러를 바탕으로 앞서 언급한 버스터 키튼을 더하고, 프리즌 필름, 마운틴 필름 등 각종 마이너 장르들을 결합한다. 로버트 스탬이 지적한대로, 자기반영성은 텍스트를 상대로 하는 게임이며 다른 어떤 효과에 앞서 유희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캠프는 엄숙함에 반대한다

사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나치를 희극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도덕적 비난을 감당해야 했던 영화사상 첫 사례는 아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1942년작 <사느냐 죽느냐>가 처음 나왔을 때 당대에 일었던 논란은 지금보다도 훨씬 차갑고 거셌다. 비난에 대한 루비치의 대꾸는 “아무리 성스러운 것이라도 풍자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식으로 간단하고 심드렁했다. 루비치의 전례를 눈여겨보았던 것인지, 앤더슨은 영화의 초반부에 아이가 총 놀이로 작가의 이야기를 방해하는 장면을 슬쩍 배치해두었다. 놀이와 전쟁을 아슬아슬하게 겹쳐놓음으로써 앞으로의 이야기를 암시한 것이다. 루비치와 앤더슨, 이들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은 도덕적 통념 그 자체다.

그런데 앤더슨에게 보다 유용한 참고서가 되었던 것은 1932년에 만들어진 루비치의 걸작 <천국의 말썽>이었던 것 같다. 앤더슨은 <천국의 말썽>에서 1930년대의 감수성, 특히 그 시대 영화들만이 가지고 있는 스타일을 참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앤더슨을 매료시킨 것은 흔히 ‘루비치 터치’라고 불리는 루비치 특유의 스타일이었을 것이다. ‘루비치 터치’라는 조어는 실은 루비치의 매혹을 분석하고 정의해보려 했던 숱한 시도들의 실패의 흔적이다. 그러니 루비치 터치를 성급히 서술하면서 앤더슨과의 공통점을 찾아내려하기보다는 수전 손택의 ‘캠프에 대한 단상’을 경유할 필요가 있겠다. 손택은 이 글에서 <천국의 말썽>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캠프 영화 중 한 편이라 평했으니 말이다. 손택에 따르면 캠프란 “놀기 좋아하며 엄숙함에도 반대”하는 것이고, ”‘진지한 것’과 새롭고도 좀 더 복잡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하찮은 것에 진지할 수 있으며 경건한 것을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캠프를 정의한 손택의 문장에서 앤더슨 영화 속 인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리바리한 좀도둑질을 위대한 팀워크라 생각하던 디그넌(<바틀 로켓>), 열 개가 넘는 기상천외한 방과 후 활동에 매달리던 맥스(<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다즐링 주식회사>에서 삼형제가 벌인 이상한 소동, <문라이즈 킹덤>의 캠프장, 그리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향수를 찾고 시낭송에 집착하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구스타브를 말이다. 그는 루비치 영화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방종하며 위태로운 일탈을 천진하게 즐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흐르는 캠프적 감수성은 앤더슨 영화의 목적 없는 유희와 탐미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캠프에는 도덕적 엄숙주의를 전복시킬 에너지가 비밀스럽게 내포되어 있다. 앤더슨에게 '유희'란 카메라의 배치에서부터 서사의 구조까지 아우르는 미학적 원칙에 가깝다.


우리는 종종 어떤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즐거움’이라고 느끼면서도, 어째서인지 단지 즐겁기만 한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즐거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대신, 이런 저런 담론이나 교훈을 동원해 침묵의 자리를 채우려는 충동에 휩싸인다. 롤랑 바르트는 그 자리에 호출되는 담론들을 ‘정치적 경찰’과 ‘정신분석학적 경찰’이라 불렀다. 이데올로기는 즐거움을 단속하려 들고, 끝내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즐거움을 거부하게 만든다. 즐거움은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관습과 도덕의 바깥을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무엇보다 ‘스타일’을 통해 영화의 즐거움을 붙들어 보려는 한 작가의 분투가 정점에 오른 영화다. 오늘날 최전선에 선 영화들은 카메라의 정치-미학적 효과에만 몰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단지 드라마를 실어 나르기 위해 미장센을 소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카메라, 이야기하는 카메라 대신, 그저 움직이기 위해 움직이는 카메라를 본다. 오늘날, 관객들 스스로 간절히 원하면서도 결핍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는 카메라의 활동성, 리듬, 독특한 취향과의 관능적인 교감, 영화의 성애학(erotics)이 아니겠냐고 답하고 있는 것 같다.



References


David Bordwell,

"The Grand Budapest Hotel : Wes Anderson Takes the 4:3 Challenge

http://goo.gl/xhG0oA​
















왼쪽부터 차례로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로버트 스탬,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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