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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역사
잭 C. 엘리스 외 지음, 허욱 외 옮김 / 비즈앤비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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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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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작가들은 그 자리에서 저마다 할 수 있는 말들을 했다. 나는 좀 당황한 나머지 부끄럽고 두루뭉술한 얘기를 했다. 절망에 대해 혹은 희망에 대해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이윽고 이창근씨 아내인 이자영씨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누구도 건너본 적 없는 시절로 혼자 돌아가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러고 그 '놀랐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철저히 그녀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들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그 고통이 담긴 타인의 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자영씨는 여기서 어떻게 더 노력하라는 건지,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건지 알 수 없어 때때로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 속에선 황량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중략)

 

지난달, 임시분향소에 갔을 때, 고잔초등학교에서 두 시간 넘게 조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운동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주위에 수다를 떠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떠드는 건 오직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이 만든 원 바깥에서 그네를 타고, 모래성을 쌓으며 뭐라 외치고 웃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모든 게 마치 전생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상복을 입은 내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삶의 생생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속에 숨기려 해도,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분향소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부모님을 따라온 몇몇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어느 청년은 모래바람 한가운데서 입을 가린 채 중간고사 교재를 읽고 있었다. 은색 스팽글이 잔뜩 달린 분홍색 손가방을 든 여자아이의 취향은 참으로 초등학생다워 어여뻤고, 엄마 품에 안긴 채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아기의 무지는 그 자체로 아기다워 고마웠다. 거기 나온 이들은 다들 어렵게 시간을 내 자기만의 방식으로 고인들에게 나름 인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야 나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싶었던 것 못지않게 나와 같은 감정, 같은 슬픔을 느끼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곧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김애란, <눈먼 자들의 국가> 중

-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을 써 내려가던 작가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내가 죽는 꿈을 꾸었던 어느 날, 살아있다는 실감을 되찾으려 서둘러 몸을 뒤척여 사방을 둘러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 조차 가슴 깊이 그것을 두려워했지만, 죽음은 두려움까지도 죽이고 만다는 사실을 새삼 곱씹게 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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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린 가족 이야기>, 세르지오 옥스먼, 2012












부산국제단편영화제 - 모퉁이관객리뷰


http://bisff.org/kor/board/daily_view.asp?idx=129&page=6


낱장의 시간들*

 

“내가 버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가 죽을 때 누렇게 변식되고, 퇴색되고, 희미해져서 결국 언젠가는 쓰레기로 버려진 이 사진과 함께 버릴 것은 무엇일까? ‘삶’(그것은 살아 있었고, 카메라 렌즈 앞에서 살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뿐 아니라 때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사랑마저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서로가 사랑했다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을 앞에 두고, 나는 그것이 이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될 보석과도 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무심한 자연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과 함께 버려지는 것이 ‘삶’(그리고 때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사진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내포한다는데 동의한다면, 세르지오 옥스먼의 <모들린 가족 이야기>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버려진 삶의 조각들을 재구성하고 그에 대해 증언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생애를 완전한 소멸로부터 구출하려는 기획이라고.


그런데 영화에는 감독이 얼마나 성실한 채집자였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내레이션이 얼마만큼의 사실에 기반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불가해한 폐쇄성을 어떻게 일관된 서사로 엮어내야 할 것인가. 감독은 미처 기록으로 남지 못한 공백들을 앞에 두고 객관적 관찰자의 자세를 택하는 대신, 주관적 해석자로서 개입하길 원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그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 그들 각자의 감정에 대해 상상하고 첨언한다. ‘엘머’가 엑스트라로 잠깐 얼굴을 비추었던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의 내러티브와 ‘모들린 가족’의 삶을 평행으로 직조하려는 시도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저 거듭된 실패에 지쳐 세상으로부터 망명하려는 사람들이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감독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 ‘그들이-거기-존재했음’을 거두고 ‘이제는-존재하지-않음’을 표상하는 빈방의 이미지로 돌아선다. 불화, 상실감, 외로움, 그리고 모종의 이교도적 음습함까지도 모두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오래된 사진에 나온 인간 얼굴의 덧없는 표현 속에서 아우라가 최후의 섬광을 던지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이들 사진은 멜랑콜리로 가득 찬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사진에서 전시가치는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몰아내기 전, 최후의 저항으로 인간의 얼굴 속으로 도피한다고 벤야민은 말했다. 인간의 얼굴을 찍은 사진은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멜랑콜리하다. 영속할 수 없는 존재 양식. 찰나가 찰나를 밀어내는 시간의 폭력성. 모두가 다 아는 사실. 너도, 나도, 모두 그렇게 사라진다는 것. 이 영화가 전하는 확증된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희경의 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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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소금 >, 빔 벤더스, 훌리아노 살가도 , 2014







BIFF웹진 - BIFF살롱 - 시민평론단-시민평론가

 

http://www.biff.kr/artyboard/board.asp?act=bbs&subAct=view&bid=9612_10&page=1&order_index=no&order_type=desc&list_style=list&seq=37424

 

세계적인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 인생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이 땅의 소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살가도의 사진 푸티지 사이사이 이 영화의 공동연출자이자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아들이기도 한 훌리아노 살가도의 기록영상이 끼어든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연출자 빔 벤더스가 살가도의 촬영현장에 동행하여 작업 중인 살가도의 모습을 담아낸다.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인 만큼 다양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등장할 법도 하지만 전무하다시피 하고, 내레이션의 대부분을 벤더스, 훌리아노, 그리고 세바스티앙 살가도 자신이 맡고 있다. 그 때문인지 영화 전체가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친절하게 해설하고자 하는 코멘터리 영상에 가깝게 느껴진다.

 

영화는 이토록 단촐한 구성으로 일생을 사진에 바쳐온 작가의 삶과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 땅의 소금>은 결과적으로는 어딘지 단순하지 않은 영화가 되었다. 일단 살가도의 사진 푸티지가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이 영화도 그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따라붙었던 윤리적 문제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선한 의도를 배반하는 사진의 미학적 효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름다울 수 없는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해내는 예술가의 권능은 정말로 무죄일까? 벤더스의 카메라가 다큐멘터리 영상 특유의 현장성으로 인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과 비교하여, 탐미적으로 거의 완벽에 이른 한순간을 포착한 스틸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얼마나 압도하는가.

 

백곰을 찍는 살가도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 그는 오두막에 숨어 대상을 염탐하고 포복자세로 대상에 접근한다. 이때 그는 총구를 겨누듯 렌즈를 조준한다. 영화는 살가도와 백곰의 교감을 강조하려는 듯 백곰과 살가도의 유사한 행동을 평행 편집으로 보여주지만, 이 시퀀스가 상기시키는 것은 적군과 아군의 대치상황 - 전쟁영화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살가도의 사진을 다소 엄격하게 비판하며 말한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손택은 사진 이미지가 사람들을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살가도의 사진은 손택의 기준에서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했다. 살가도에게 인간은 구제불능으로 악하다. 오직 자연만이 선하다. 오랫동안 인간의 고통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살가도 역시 종래엔 정해진 수순처럼 자연으로 회귀했다. 최초엔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탐욕에 호기심을 느끼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작가가 오랜 시간 인간의 고통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끼기까지, 그 일련의 사진 여정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의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쉽게 반발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손택의 이의제기 역시 유효하다. 대상에 대한 호의로 가득 찬 연출자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소금>은 애초에 목표하지 않았던 쟁점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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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즈 야스지로 한나래 시네마 17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 한나래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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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가 재개봉한다.

 

한달 전 쯤에는 <부초(1959)>를 필름으로 다시 볼 기회가 있었고, 또 그로부터 두어달 전에는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리뷰를 쓰면서 오즈를 다시 생각할 계기가 있었다. 최근에는 야마다 요지의 <동경 가족(2014)>이 개봉하기도 했고. 지금 오즈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언뜻 웨스 앤더슨과 오즈 야스지로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아래 발췌한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을 보면서 현대 감독 중 한 사람이 떠오른다면 단연 웨스 앤더슨이 아닐까 싶다. 화면의 구도, 카메라의 움직임을 자의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오히려 전에 없던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전략. 그것이 웨스 앤더슨이 오즈와 공유하는 접점이며 데이비드 보드웰이 the Ozu Strategy라고 명명한 것이다.

 

"영화에는 언어 사용에 즈음하여 그 발화나 해독을 규제하는 절대적인 질서로서의 문법에 해당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무엇을 하든 가능하지만 그 가능성은 영화가 영화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절대적인 자유가아니다. 모든 영화 작가는 재능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 부자유를 피하기 어렵다.

이 사실로부터 오로지 고정 화면에 집착한 오즈 야스지로가 결코 풍부한 영화적 가능성을 계속해서 방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원래 시작부터 영화는 두드러지게 부자유한 환경에 속해 있다. (중략) 또한 가장 자유스러운 영화는 전략적으로 그 부자유를 철저히 함으로써 영화 자체의 한계를 두드러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더없이 자유로운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는 다시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 '날이 개인다는 것' 일부.

하스미보다 오즈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오즈를 백주의 작가로 묘사하면서, 오즈가 백주의 작가였기 때문에 드물게 등장하는 비내리는 장면의 감동이 더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다.(<부초>에서 처마 밑으로 쏟아지던 빗방울...) 오즈의 미학은 우리의 편견과 달리 생략과 절제가 전부는 아니다. 하스미 시게히코에 따르면 갑작스러움, 대담함이야말로 오즈 미학의 정체라 할 수 있다.

 

"아내가 숨을 거둔 바로 그 날, 이른 아침부터 동경과 오사카에서 달려온 아이들과 친척들이 모인 집을 빠져 나와 아버지인 류 치슈는 혼자서 조망이 트인 정원 구석에 서서 밀집된 인가의 지붕 너머로 바다를 본다. 며느리인 하라 세츠코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 옆에 머문다. <동경 이야기>의 끝 부분에 위치한 이 장면에서 아내를 먼저 보낸 류 치슈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하라 세츠코는 모두가 기다리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 때 시아버지는 아내와 헤어짐의 의식이 거행되려는 날이 더운 하루가 될 것이라고 작게 말을 한다. 사실 두 인물의 배후에는 맑게 개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이런 날씨에 대한 언급에서 사람들은 어떠한 기호를 읽어야 할까? 그는 지금부터 평소와는 달리 특히 무더운 날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평소와 같이 또한 그 날도 더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어쨌든 보는 이들이 화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쾌청하며 더운 날이 시작되려 한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오즈의 맑은 아침이다. (중략) 오즈에게는 사물의 윤곽을 애매하게 떠올리게 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는 백주白晝의 광선의 작가이며 미묘한 뉘앙스보다는 과도한 선명함을 고집한다. 하늘은 애매하게 구름이 끼거나 하는 것을 금지당한 채 단지 맑게 개어있는 것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중략)

오즈의 시정이란 이런 대담한 섬세함 속에서 촉지되어야 한다.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오즈의 화면은 계절적인 수사학의 서정에 젖는 일이 결코 없으며 그 내러티브의 지속은 놀라고 싶다는 우리의 필름적 욕망조차 넘어서 버린다."


"백주의 작가"와 재회하기 좋은 계절.(조금 늦은 걸지도.)

매일 같이 비가 내리는 요즘이지만, 눈이 아프도록 쨍한 날 하루 <동경 이야기>를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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