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 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9
박성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스카치 테이프를 뜯는다

 

가까운 속눈썹을 여기, 떨림이라고 두고

나는 한쪽으로만 집착할 각오로 발목을 자른다

 

이규가 어찌 성립되었든

마스카라 뷰러로 칼을 갈았거나 눈을 감아 얼굴에 능선을 만드는 일

눈에 혈통을 묻는 일, 다시 말해

잘린 발목으로 당신 속눈썹을 반만 붙잡는 일

감금한 내 몸 일부를 팽팽하게 당겨 소거하고, 당신의 시선 쪽으로 발자국을 놓는다

 

황색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각질들이 흰색을 띠는 것처럼

본래에서 색을 절충한, 투명은 붙잡을 것이 있어, 투명은 투명

 

투명한 피를 흘리는 나는 얇거나 지나치다

돌아보는 길을 돌려다가 대답을 만들고

끈적한 너는 바라봄으로써 날을 세운다

칼을 물고

발에게 피를 묻고, 나는 대답이 없다

 

준비된 곁으로 나는 한 번은 부딪힐 이유이다

 

그만, 그만, 너를 붙인다

의도하지 않아도 지문이 남아 있다

 

박성준, '기대심' 전문, 시집 <몰아 쓴 일기> 중

 

-

박성준의 어떤 시들은 발목이 잘려 몸이 기울어진 사람의 단말마 같다.

시집을 넘기는데 팔다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나조차 통제할 수 없는 나의 육체, 육체에 앞서거나 뒤쳐지는 자아,

관계의 부산물들이 의도하지 않은 지문처럼 남는다.

 

시인은 이 총체적인 통제불능의 상황에서 무력감에 짓눌리는 대신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을 쳐보려는 것 같다. 통증 속에서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삶에 대한 도착적인 열정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살아있다는 증명이 오직 병뿐인 당신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통증을 만든다"

 

'회복기의 노래' 부분

 

-

일기를 몰아 쓴다. 어떤 날들을 간신히 기억해낸다. 나는 내게 가까스로 붙들린다.

당분간은 이 시집을 붙들고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