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2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첨단 기술과 통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예 파편화되어 모든 개인들이 홀로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연결'에 지극한 열망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보면 거기엔 꼭 '관계'가 있더라. 아기 팬더들을 더할 나위 없이 아끼고 보듬는 사육사 할아버지, 이런 케미 저런 조합으로 불리는 아이돌 관계성, 소설/웹툰/드라마와 영화/심지어는 역사적 일화에서까지 '원앤온리'라든가 '구원 서사'라든가 하는 이름표를 달고 낱낱이 파헤쳐지는 유대와 교감. 


relationship이란 단어에서 어근 lat-는 '나르다 to carry'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실어나르며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관계(關係)'는 또 어떠한가? 밧줄로 문과 빗장을 꽁꽁 묶어놓은 모양을 따온 글자 하나, 결박당한 사람을 그려낸 글자 하나 해서 두 한자 모두에 실 사(絲)가 들어가 있다. 우리말로도 누군가와 '엮인다'고, '얽힌다'고 하지 않나. 극단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일은 끈이나 줄로 함께 묶이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여기에 무척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르고 선택할 만한 자격이 없으니까) 그냥 주어지는 걸 받을 수밖에 없다'며 자책하던 남자와 그의 곁에 있던 이들에 관한 글. 


맞다. 나는 역시 <리틀 라이프>를 한 남자가 살면서 만났던 이들과 그 자신이 무엇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새겨놓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쉰을 넘긴 나이까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뒤쫓아가면서 우리는 그에게 흔적을 남긴 인물들과도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이 자취는 칼로 쑤셔놓은 것보다 더 잔악하고, 저 상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멍 같고, 그 자국은 햇살을 받으며 핀 봄꽃 같다. 개인 심리를 장대하게 다룬 소설이지만 주변 인물들의 마음결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왔다 갔다 하는 시점 이동과 변환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안에 갇히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캐릭터의 시선으로 주인공을 샅샅이 훑어보기도 한다. 



-

글은 언뜻 청춘소설처럼 시작한다. 배경은 뉴욕. 진로라는 고민거리를 안고 걱정하는 네 친구들. 재능도 개성도 뚜렷한 20대 청년들을 비추던 조명이 이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다리가 불편하고 타인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동정과 연민을 싫어하는, 아름다운 주드. 주드는 모든 관계가 give and take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무지 친구들에게 줄 것이 없다(고 여긴다). 애정, 시간, 돈, 심지어는 정보까지. 그는 비밀 하나조차도 털어놓지 못한다. '고백은 유통화폐였고, 폭로는 친밀함의 형식'이기에 사람들은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타인과 가까워지지만, 주드는 도리어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결코 자신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 친구들 또한 묻지 않고 그를 배려하며 그의 곁에 머문다. 

맬컴과 윌럼은 주드의 양쪽에서 주드가 미끄러지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까이, 하지만 주드가 넘어질까봐 대비하고 있다는 의심은 주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제이비 자신도 그렇게 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하자고 서로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들 그냥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천애고아인 주드에게 양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어하는 해럴드 또한 주드를 '모른다.' 주드는 자신을 내보이지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친구들과 해럴드를 밀어내지도 못한다. 그들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주드를 좋은-괜찮은-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믿을수록 주드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어째서? 거짓이 밝혀지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가 드러나면, 비상한 두뇌에 근사한 외모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아보면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을 경멸하고 실망한 채 떠나갈 것이다. 그래서 주드는 팔을 긋는다. 행복한 하루일수록 불안에 잠식당한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기 때문에 자해를 한다. 
전ㅡ 좋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했어요.
그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끔찍한 일들, 부끄러운 일들을 했다는 걸, 
그걸 알게 되면 저랑 관계되는 건 고사하고, 알게 된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할 일들을요.

그가 왜 그러는지 알려지는 부분은 출간 당시부터 논쟁거리였고, 아마 오래도록 그러할 것이다. 주드의 과거에 대한 묘사가 '포르노적'이라고 비판하는 독자와 평론가들이 있을 만큼, 이 작품에는 폭력에 대한 서술이 넘친다. 읽는 이가 상상할 수 있는 학대들은 모조리 다 등장한다. 깜박, 깜박하는 플래시백 속에 흐르는 눈물과 비명들. 작가는 담담하게 쓰지도 절제하지도 않았다. 그걸 직면하는 동안 마음 어딘가가 칼로 그어지고, 나중에는 그 자리들이 조각칼로 파내어지는 것만 같을 정도로 괴롭다. 행위 자체의 잔인함도 문제지만, 그 일들을 당하는 어린 주드의 비참함이 그대로 전해져 숨을 계속 끊어서 쉬어야 할 정도였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사람들은 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경고문구가 리뷰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너무 비현실적이다. 한 인간이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악인을 만나며 또 어떻게 그리 다종다양한 불행을 겪을 수 있느냐?'라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의아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굳이 현실과의 정합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란 내 손톱 아래 박힌 가시가 제일 아픈 존재이며, 기억이란 절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제가 우리의 오늘을 구성하며, 성격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적인 진실만큼 감정적인 진실도 중요하다. 과거가 설령 30% 정도만 진짜라 해도 주드의 생채기는 120%만큼 쓰라릴 수 있고, 주드의 의식은 지난날을 정말 그렇게 인지할 수 있다. 하여 중요한 건 '이게 말이 되느냐 아니냐'보다는, 그 결과 그가 자신에 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끝없는 자기 혐오, 자해, 자살 시도를 거듭하는 성인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꼭 하나뿐인 방법이기에. 

주드는 몸도 마음도 다치고, 사건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부분에까지 극심한 손상을 입고 만다(Moral Injury). 작가는 이런 점을 두고 인터뷰에서 '결코 나아지지 않는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One of the things I wanted to do with this book was create a protagonist who never gets better. to begin healthy (or appear so), and end sick — both the main character, Jude, and the plot itself.'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은 건강하게 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것처럼 시작했다가 아프게 끝난다. 주드와 그가 사는 세상의 신이자 창조주인 작가는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주드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주드는 번번이 최선을 다해 괴로워하기에, 가끔 독자들은 1권을 덮은 다음 2권 읽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독자에게 '1,000쪽이나 되는 책을 읽으며 주인공이 별 같은 희망을 발견하기를, 빛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꺾이는 경험'만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다. 결말을 보고 누군가는 짙은 허망함을 느꼈겠지만,


매일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다시 하루를 맞이하려던 모습 그 자체에 눈이 부셨던 사람도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것이, 우리네 삶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 최종장이 어떻게 쓰여지더라도 거기까지 가기 위한 여정 역시 아프도록 무겁다는 걸 나도 이제 깨달아가고 있어서다. 작가 말대로 주인공은 최후에 낫지 않은 상태로 우리를 떠나갔다. 그렇지만 주드는 나아지려고, 이겨내려고,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시도하고 다시 시도했다. 살기 위해서 견디고 버티고 참았다. 만성적인 트라우마에 맞서 저항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런 사람더러 결국 이겨내지 못했으니 패배했다고 단언해야만 할까? 완전한 회복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기나긴 투쟁을 무의미했다고 치부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리틀 라이프>를 '기어이 그렇게 됐다'며 요약할 것인지, '도리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방점을 찍을 것인지는 우리 몫이다. 나는 주드에게 노력한 걸 안다고, 사실 열넷이나 열여섯쯤에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당신 인생이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삶은 대체로 너에게 매정했고 운명은 너를 한계까지 몰아갔지만 그럼에도 가끔 '인생이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듯한 순간들이 있었던 걸 기쁘게 지켜보았다고 말하고프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당신이 끝없는 어둠 속에만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 

그런데, 놀랍게도 이 소설은 예상보다 어둡지 않다. 아물지 않은 흉터가 내도록 터져나오고, 참담한 광경이 이어지지만 뜻밖에도 읽는 이들은 일정한, 어떻게 보면 냉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작가는 한 인간의 내면(內, 마음/심리/영혼)을 끝까지 파고들어 상처가 좀 나을라 치면 피딱지를 뜯어내게 만들었다. 대신 그의 겉모습과 배경(外, 바깥 및 표면)에는 다디단 시럽을 발라둔다. 도저히 마침표가 보이지 않는 비극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주장에 공감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말 개연성이 없는 부분은 사건사고가 아니라 '캐릭터 설정' 그 자체에 있다.


The City 뉴욕이라는 공간이 내뿜는 휘황찬란함,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주드(예술가가 그를 보고 영감을 얻은 다음 화폭에 담고 싶어할 만큼),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일궈내 부와 명예를 거머쥔 대학 동창들, 섬약하기에 더 매혹적인 주드를 아끼는 좋은 친구들과 매우 훌륭한 인품을 지닌 양부와 진심어린 치료를 해주되 진료비는 단 1원도 청구하지 않는 의사, 이 친절하고 아량있고 관대한 사람들이 피워내는 우정과 애정 그리고 헌신, 인물들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계급이며 지적인 교양도 풍부해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소위 '먹물 내음'이 난다는 점, 자주 화제에 오르는 전문지식과 예술과 아름다움, 가난이라든가 인종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깊이 파고들지도 않는 정서... 그래서 다소 장르소설 같다고 느껴질 만한 그런 과잉된 부분들이 몰입을 방해하거나 흐름을 깨는가? (그런 이들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니, 그렇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폭풍과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 같은 주드의 영혼을 따라가는 것만도 상당히 벅찬 일인데 이런저런 환경과 외피마저 처절했다면 이건 르포나 시사고발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작정하고 읽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나가떨어지거나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과 풍경에는 이따금 멜로드라마를 연상케 할 만큼 낭만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고, 그 덕분에 독자들은 불필요한 긴장을 덜어놓고 좀 더 안전한 위치에서 비극을 헤아리게 된다(그래서 나는 무겁고 어둡다는 까닭으로 이 책을 포기하는 독자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리틀 라이프>의 이런 지점은 누군가에겐 비판거리겠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큰 장점일 수 있고, 나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모든 포인트에서 핍진성을 획득하려고 노리는 것보다, 가장 보여주고픈 커다란 물줄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약하게 만드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작가는 항해의 키를 놓치지 않고 굳건하게 주드와 주드를 둘러싼 관계에 에너지를 응집하는 일에 성공했다. 



- 

이제야 겨우 처음 했던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한야 야나기하라는 무척 유려한 문장들로 소설을 가득 채워놓았는데, 특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일에 탁월하다. 특히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상호작용들을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다루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소중한 사람들과 가까워졌음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하는 주드라든가 

그는 윌럼과 하는 두 가지 대화를 다 좋아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일상적 대화를 즐긴다. 늘 큰 문제들—사랑, 신뢰—로 윌럼에게 묶여 있다고 느꼈지만, 작은 일들, 청구서나 세금, 치과 치료 등으로도 묶여 있다는 게 좋다. 몇 년 전 해럴드와 줄리아네 집에 갔을 때 일이 늘 생각난다. 그때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 주말 대부분을 거실 소파에서 담요를 두른 채 자다 깨다 하며 보냈다. 그 토요일 밤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해럴드와 줄리아가 집 부엌 수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그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너무 지루한 이야기라 세부 사항은 대부분 듣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동 생활의 역할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른들 관계의 이상적 표현 같았다. 


오랜 후에 친구들을 멀어지게 만든 제이비의 '단점'을 사랑스러워했던 윌럼

제이비는 윌럼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럴 때 그는 제이비를 완벽하게 사랑했다. 한없이 어리석고 경박한 짓을 할 수 있는, 또 기꺼이 하는 제이비를. 이런 건 맬컴이나 주드와는 절대 나눌 수 없었다. 맬컴은 아무리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예법을 지키고 싶어했고, 주드는 진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구조 작업'이 아님을 깨닫는 윌럼을 표현한 장면들이 그러하다. 

"괜찮아." 주드는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팔을 잡은 채 윌럼의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을 거야, 월럼." 그는 고객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윌럼이 가끔 들었던 그 단호하고 선언적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늘 널 보살펴 줄게, 알지?" 그는 미소지었다. "그럼." 그에게 위안이 된 건 그런 안심되는 말 자체라기보다 자기도 뭔가 줄 게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과 확신에 차 보이는 주드의 태도였다. 그걸 보자 윌럼은 그들의 관계가 결국 구조 작업이 아니라, 그가 주드를 구하고 그만큼 자주 주드도 그를 구했던 우정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 그런데도 지난 일곱 달 동안 그는 자기가 주드를 회복시켜놓겠다고, 자기가 그를 고칠 거라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고칠 필요가 없는데. 주드는 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도 주드를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내가 제일 감탄했던 대목도 빼먹을 수 없다. 최초의 빛이자 가장 깊은 어둠이었던,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어떤 죗값도 치르지 않은 채 떠나버린 루크 수사는 작중 최고의 악인이자 만악의 근원이다. 하지만 주드는 저주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루크를 일백퍼센트 증오하지 못하고 차라리 자신을 수치스럽게 간주하는 쪽을 택한다. 독자가 화를 내며 이건 명백히 흑 아니면 백인 문제니까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루크의 미소짓는 얼굴이 순식간에 마법처럼 떠오르곤 했다. 그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있던 시절, 그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애정이 그리운 어린아이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혹당하던 시절의 루크를 생각했다. 그는 온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있었다. 꽃들의 온기와 향기가 그를 망토처럼 둘러쌌다. 그건 그가 그토록 소박하게 행복했던, 복잡할 것 전혀 없는 기쁨을 알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 꼬마 미남이 왔구나!" 루크는 외쳤다. "아, 주드ㅡ 널 보니 너무 행복하다."


언젠가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반짝이는 일순간, 그러나 오래 사유하지 않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간직하다 못해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던 그런 기분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타인을 완전히 사랑하는 일도 아예 미워하는 일도 실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걸. 너를 황폐하게 만든 사람을 왜 그리워하냐고 따져묻기에는 인간도 인간관계도 너무 복잡하다는 걸.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내겐 나쁠 수 있고, 쓰레기 같은 사람이 내겐 구세주였던 시간도 있다는 걸. 사랑과 이해는 다른 영역에 있어서 사랑한다고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걸. 소설에는 모순된 양가감정이 수없이 나타난다. 창작자인 제이비가 주드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주드가 바라 마지 않는 평범한 삶을 납득하지 못할 때, 주드만큼 날 필요로 하지 않기에 제이비를 덜 사랑한다는 윌럼이 어쩌면 주드를 보며 남동생 헤밍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주드가 한결같이 낙관적인 해럴드의 순진함과 무지함에 좌절하면서도 동시에 깊이 사랑할 때 나는 두꺼운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 마음들을, 감히 이해한다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다고. 내가 말로 하지도 글로 쓰지도 못하고 어디쯤 박제해둔 채 영영 열어보지 않았던 그 감정들을 자극해 어제 일인 것처럼 회상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니. 나는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당신도 이걸 읽으면서 지진을 느꼈나요? 지층이 휘어지고 끊어지는 기분을 그대도 느꼈나요.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고 그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섬광처럼 느껴지는 짧은 행복은요? 주드와 내가 느낀 것처럼요.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 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 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

주드는 해럴드의 아들이 만들어준 컵을 깨뜨렸다. 해럴드가 먼저 보낸 아들이 남긴 머그를. 해럴드는 주드가 사과하기 위해 쓴 편지에 위와 같은 답장을 보낸다. 두 사람이 보낸 세월이 어찌 끝났든 이런 빛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주드에게는 이런 날이 있었고 이런 사랑을 받았고, 그렇기에 주드는 아주 간단한 일로 다시 절망에 빠졌던 날까지도 생각한다. 살아갈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특히, 해럴드 때문에.' 



-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서, 플롯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서, 특징적인 문체와 고유한 스타일이 멋스러워서,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충격적인 반전이나 결말을 기대해서, 몰랐던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서, 나와 공명하는 무언가를 찾고파서, 비루한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푹 빠져있다 돌아올 흡입력 넘치는 세계를 원해서...... 우리는 각각의 바람들을 충족해주길 바라며 오늘도 소설을 집어든다. 여기 몹시 다양한 면모를 지닌 소설이 있다. 감히, 당신이 바라던 것 어느 하나쯤은 여기 있을 거라 말하고 싶다. 책장이 넘어가는 걸 아쉬워하며 읽게 될 거라고 장담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수면마녀와 꿈꾸는 돌멩이 ㅣ 노란돼지 창작동화
윤미경 지음, 김미연 그림 / 노란돼지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꿈‘에 두 가지 뜻이 있는 게 참 신기해요. 지금 계절처럼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이불 속으로만 파고들고 싶을 때 어린 조카와 함께 이 동화를 읽고 싶어요. 선물해준 마리모를 보고 이렇게 겨울잠 자고 싶다던 조카를 안고 같이 드림랜드로 떠나 봄을 기다리고 싶어요. 곧 입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상당히 문제적 용어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아씨들>이나 <빨간머리 앤> 아니면<소공녀> 같은 소설들을 예전에는 이른바 '세계 소녀 명작'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와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한번씩은 꼭 이 화제를 꺼내게 된다. 얇게 축약된 '동화'로만 받아들였던 소녀들의 이야기 중에서 무얼 제일 좋아했나요? 


오래도록 질문과 대답들이 쌓여가면서 나는 우연히, 그렇지만 꽤 흥미로운 지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하루키 소설들에도 감흥이 없었다. '앨리스' 하면 떠오르는 금발 소녀와 푸른 원피스, 하얀 시계토끼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소설로서의 앨리스 스토리에 대해 묻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일단 <이상한 나라> 및 <거울 나라> 완역본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고, '정신사나운 맥락없음을 꾹 참고 독파해봤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더라'는 감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솔직한 의견은 하루키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금껏 가장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까닭으로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훨씬 더 좋아하는 편이다. 똑같이 잘 가다듬어진 문장들이어도, 똑같이 개인 내면에 깊이 천착하고 있어도, 똑같이 바람 내음이 많이 묻어나더라도, 인적사항이 명확한 에세이 속의 '나'를 이해하기가 7배 정도 쉽다. 국가, 도시, 가족관계, 학교, 직장을 모두 다 밝혀놓는다 해도 하루키 월드에 사는 '나'는 초연하여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반복되는 일상을 아무리 잘 꾸려나가도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인물은 가끔 모래나 물을 넘어서서 거의 공기에 가까울 만큼 물리적인 무게감이 없고, 심지어 '여기, 바로 이 곳'이 아닌 '저 곳(때로는 그 곳)'으로 자주 건너간다.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은 앨리스보다도 더 '이상한 나라'에 오래오래 머물러, 이러다가는 조만간 '여기'가 희미해질 것만 같다. 독자와 주인공을 이어주는 것은 '여기'에 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불 같은 에너지가 폭발하고 다음 전개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무아지경으로 책장을 넘기게 하는 글을 읽는 것은 차라리 쉽다. 책에 담긴 사나움이 나를 끌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 일은 그와는 많이 다르다. 작가는 모든 트릭을 파헤치는 추리소설과 정반대 위치에 서 있고 독자는 그가 말해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혼자 메워나가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그렇기는 하지만, 하루키 소설은 독자가 무엇으로 공백을 채웠는지가 무척 잘 드러나게 되는 창작물이다. 



- 

나는 이번 겨울이 가장 맹혹한 추위를 떨치고 있을 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심하게 앓았고, 고통과 약 기운으로 인해 하루의 절반을 수마에게 바쳐야 했다. 빛과 소음에 민감해진 육체는 가벼운 식사와 잠 이외의 모든 활동을 거부했지만 몽롱한 정신으로도 조금씩 책을 읽는 것만은 허용해주었고, 나는 가끔 무릎에서 떨어지고 마는 무거운 책을 느릿느릿 읽어나갔다. 


똑, 똑 소리를 내며 활자들이 물방울처럼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 내용물이 모조리 바닥나고 만 모래시계처럼 공허한 내 안을 채운 건 '서사'가 아니라 '묘사'였다. 


나는 지금껏 하루키 작품들을 읽으며 '왜'라든가 '어째서' 따위의 이유와 해명을 많이 요구해왔고, 그건 어떤 분석을 참고해도 만족스럽게 충족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의미를 캐내려는 노력 없이 그저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 문장들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작가가 서술하는 풍경이며 표현하는 심상들을 마음에 쌓아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 며칠 동안 내가 했던 것은 독서였지만, 사실은 그림을 그리거나 옷감을 짜거나 레이스 뜨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가까웠다. 낮과 밤이 흔적도 없이 나를 통과하는 동안 검은 글자들만이 너울대는 명주 천으로 화했다가 스케치로 변했다가 색채를 띠기도 하고 다시 빛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여기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있고 그들은 서로의 100%를 원한다. 기적과도 같은 선명한 감정과 눈부신 광경을 소년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멀고 먼 도시는 그들이 쏟아부은 시간과 감정을 먹고 자라나 완전한 실체를 갖추게 된다. 소녀를 잃어버리고 어른이 된 '나'는 갑작스럽게 그 도시로 끌려들어갔다가(1부) 또 홀연히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더니(2부), 3부 마지막에서는 1부와 다른 선택을 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계절이 바뀌고, 머무는 공간이 달라지고, 이름을 가진 인물과 성명을 짐작할 수 없는 캐릭터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이 서사의 배경을 아주 끈질기게 써내려간다.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는 사람처럼 공들여.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베 짜기를 시도한 페넬로페처럼 지치지도 않고. 긴 시간을 들여 토대를 잘 쌓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공간을 찬찬히 자아낸다. '나'의 뇌리에 박힌 장면들은 몇 번이고 리플레이되며, 토씨만 조금 달라진 문장들이 계속해서 겹쳐진다. 반복노동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되풀이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그리워하는 소녀와 그가 마음을 준 사람들과 그가 머문 자리들을 눈으로 본 것처럼 환히 떠올릴 수 있었다. 


열일곱 소년의 눈에 비친 열여섯 소녀의 뒷모습. 연녹색 원피스 자락과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 강물에 둘러싸인 곱고 하얀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있던 소년소녀. 나이든 소년이 찾아간 그 도시. 광장에 서 있는 바늘 없는 시계탑.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강. 책 대신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있는 해질녘 도서관,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김을 피우는 검은색 주전자. 그 주전자가 내는 달가닥 소리. 벽과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의 뿔피리 소리. 밤꾀꼬리가 우짖는 소리. 단각수들의 발굽 소리. '나'에게 약초차를 끓여주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가 입고 있던 노란색 레인코트.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현실'의 도서관을 둘러싼 새하얀 겨울.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타닥타닥 타는 사과나무 고목의 향을 맡으며 떠올리는 '그 도시'의 사과 과자 맛. '현실'에서 마시는 완전무결한 홍차. 선택을 앞둔 '내'가 소녀에게 '내일 보자'라는 말 대신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전했을 때 서서히 바뀌어가던 소녀의 표정. 


쓰고 있는 동안 나의 안쪽 깊은 곳에도, '내'가 느꼈던 투명하고 고요한 슬픔이 찰랑거리며 차오른다. 주인공은 자신이 흘린 단편적 정보만을 듣고 도시의 지도를 그려낸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놀라워하지만, 이 책을 손에 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 정경을 그리듯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작가가 상상한 장면이 독자의 마음에도 아로새겨지는 마법. 이것이야말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가진 회화적인 힘이다. 



-

미켈란젤로는 돌 안에 이미 상(像)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발견하는 게 조각가의 임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리석에 갇힌 신을, 천사를, 인간을 발견하고 그가 자유를 찾도록 도왔다. 그간 하루키 작품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가 확립한 본인만의 스타일(패턴, 캐릭터 조형, 자주 쓰는 소재, 스토리 구조)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동안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가 모두 모여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래된'이라는 형용사가 수도 없이 등장해 우리에게마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도시에 골똘히 빠져들었는지 알 수 있다. 후기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그의 원형(原型)이자 이를테면 그의 '씨앗'이다. 동어반복이나 자기복제에 관한 비판을 받아온 하루키지만 사과 씨앗에서 복숭아가 자랄 수는 없는 법이고 그는 최선을 다해 사과나무들을 키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그렇기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다음 열매 맺는 걸 지켜봐온 이들에게 바치는 '사과 과자'일지도 모른다. 



- 

나는 아직도 가상세계라는 메타버스 개념이 낯설다. SNS 프로필을 바꾸면서도 아바타라는 말이 생경하다.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는 나, 아니 어쩌면 나의 분신(그림자). '나'라는 한 인간이 두 곳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그리고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들처럼? 여기에 있긴 하지만 정말로는 여기에 없고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평행세계 소재를 통해 루이스 캐럴과 하루키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앨리스와 하루키 월드의 인물들은 정말로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하루키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개업했던 재즈카페 간판에 체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는 일화를 알게 된 뒤로 나는 하루키 신작을 펼칠 때마다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를 상기했다. 앨리스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곤란을 겪을 때면 나타났다가, 곧 허공에 웃음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 고양이를.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줄래?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I don't much care where.

난 어디라도 상관없는데...

Then it doesn't much matter which way you go.

그러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지. 

...So long as I get somewhere.

어딘가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Oh, you're sure to do that, if only you walk long enough.

그럼. 넌 분명히 도착하게 돼 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 


하루키는 무엇이 옳으며 그러므로 어느 길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창작자가 아니다. 그는 늘 어디로 가도 상관없다고 그건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더라도 걷다 보면 길이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줄 거라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을 때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착했구나. 그러니 '나' 역시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트렌드 코리아 2024 -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를 기원하며!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트렌드 키워드 10 중에서 ‘On Dopamine Farming 도파밍‘이 제일 와닿았다. ‘도둑맞은 집중력‘과 함께 읽어도 좋은 부분. 쪼개 쓰는 시간, 찰나의 짧은 쾌락, 쾌감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활동들. 100세 시대인데 사람들은 긴 호흡이 아니라 찰나의 반짝임에 계속 사로잡히는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SF 작가 최의택의 낯설고 익숙한 장애 체험기
최의택 지음 / 교양인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여기까지 당도한 분들을 위한 QnA

Q 1. 1991년생 SF 작가 최의택의 습작기가 그렇게 재미있다더라. 

▶ 알라딘 미리보기 22~29쪽 <아임 소 소리, 존>을 읽어보세요. 진짜 재밌음. 


Q 2. 대충 어떤 내용일까?

▶ 알라딘 eBook 미리보기 6~16쪽 프롤로그를 읽어보세요.


>Q 3. ≪슈뢰딩거의 아이들≫을 잘 읽긴 했는데 이건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주요 소재가 장애라면 너무 무겁지 않으려나. 

▶ 알라딘 미리보기 12~21쪽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을 읽어보세요. 어림잡아 그 정도의 무게와 온도입니다. 미리니름 하나 하자면 생각지도 못한 뭔가가 날아올 때가 있기는 있어요. 독자들은 그가 미래에 시도할 '탈출 계획'을 반강제로 공유하게 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 '언어'라는 틀 안에 있는 세상 

약 20년 전, 크레파스와 색연필 빛깔을 나타낼 때 흔히 쓰였던 '살색'이란 용어가 '연주황'을 거쳐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이 일은 내 머릿속에 이상하리만치 뚜렷한 모습으로 남았다. 집 밖을 나서면 바로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살았는데, 이 소식을 들었던 날 매일 보는 어린이들이 꽤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실제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건만, 이 아이들은 내가 어릴 때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는 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더하여 말과 글과 언어에 담긴 함의를 세상 모두가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내가 '장애우'란 단어의 생성과 쇠락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도 아마 그 일 덕분일 것이다.



▲ 네이버 데이터랩으로 살펴본 2016~2022년 장애인, 장애우 검색 트렌드 



애초에 '장애자(불구자)'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놈 자(者)'에 대한 거부감도 컸거니와 1989년 장애인 복지법이 개정되며 중립적인 '장애인'이 널리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장애우(友)'라는 말을 만들었고 실제로 이 단어도 이천년대 초중반 상당히 널리 쓰였다. 장애인 대신 장애우란 말을 사용하자고,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학교교육을 받은 나 같은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어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왜 많은 이들이 친근하게 느꼈던 '장애우'는 '장애인'과 달리 법적·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사어가 되어가고 있을까? 장애를 가진 많은 당사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의미상 타인이 그렇게 지칭할 수 있을 뿐, 장애인 본인이 스스로를 장애우로 부를 수 없는 의존적·비주체적 단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우리를 친구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장애인들의 말은 왜 언어가 사회적 약속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언어는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약속이어야 하는가. 그 약속은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아니면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가. 



한국이 살색, 장애우, 코시안(Kosian, Korean + Asian) 같은 단어들로 여러 혼란을 겪던 시기, 나는 선진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좀 정리된 상태 아닐까 하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장애를 '개개인의 신체 특성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특성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았으니 그런 환상을 품을 만도 했다. 해서 2008년판 콜린스 코빌드 사전을 펼쳐보니 disabled 항목에 이런 서술이 달려있었다. 

장애인을 가리키는 형용사로는 handicapped보다 disabled, physically challenged, differently abled가 더 선호된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이들을 가장 신중하게 지칭하는 표현은 people with disabilities 또는 people with special needs이다. 




▲ 구글 엔그램으로 살펴본 handicapped의 1980~2019년 사용 빈도. 

책이야말로 실제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구글 엔그램은 신문과 잡지를 제외한 책 본문만을 빅데이터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언어-개념-문화의 시대적 진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957년 발간된 ≪A Dictionary of Contemporary American Usage≫에서는 'handicapped children'이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되어있지만, 이제는 어느 사전이든 handicapped를 '구식이고 무례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인식도 제각각인지 다른 책을 뒤지거나 구글링을 해보면 꽤 말이 다르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표현들을 받아들이는 감각도 변화를 거듭해왔다. 직설적인 disabled를 가장 부정적이고 구식인 말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곡하게 돌려말하는 challenged와 differently abled가 더 나쁘다는 의견이 있고, with special needs는 우리말의 장애우와 마찬가지로 비장애인들의 시점에서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2018년 평창 패럴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disability 대신 impairment를 쓸 것을 권고했다. 장애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이는 자주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이며, 2020년대로 가까워지면 '사람 우선 언어 person first language'에 대항하는 '정체성 우선 언어 identity first language'라는 개념이 확고해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장애인이 자신을 사람 우선 언어로 소개한다면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person with difficulty/disability)이에요.'라고 말할 것이고, 

정체성 우선 언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장애인(disabled person)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눈치챘겠지만 사람 우선 언어의 경우 당연히 장애(혹은 진단명)보다 person이 앞에 위치한다. 이 2가지 발화에 온갖 사회적·의료적 맥락이 뒤엉켜 있으며, 장애는 인간이 가진 한 가지 특성일 뿐 전부가 아님을 주장하는 전자야말로 소외와 비인간화를 피한 중립적 묘사라는 목소리가 컸다. 반면 후자를 취한 사람이 전자를 향해 장애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거냐며,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다루는 일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 드는 행위 아니냐며 일갈할 때도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거칠게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사람 우선 언어가 우선적으로 권장되었지만 이제는 개개인의 의사에 맞게 스스로 채택한 언어도 함께 존중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에 대해 이토록 길게 쓴 이유는,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이 내게 이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해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현재 작가 최의택은 자신의 언어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는 여정 한가운데에 있는 중이다. 




▶▶▶▶▶ 글쓰기가 가장 만만한 소설가의 하루하루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최의택과 달리 수필은 내게 난감한 영역이다. 피천득이 아무리 수필을 예찬해도 국어 시간에나 시험을 치를 때나 늘 수필 쪽이 제일 재미가 없었다. 일상을 다룬 웹툰은 신나게 웃으면서 보는데 수필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 까닭을 나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쓴 에세이는 더욱 난처하다.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 않는 한 소설가의 개인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심한 독자인 걸 어떡하겠나. 신간을 앞에 두고 '저어... 새 소설은 언제쯤 나오나요?' 같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래놓고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을 잡은 건 여기에 소설 뒷이야기가 가득 실려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감독과 배우에게 영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작가들이 작정하고 자기 글을 주제로 삼아 수다를 떨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말해줄 때 들어야 한다. 



나는 최의택 작가를 로켓 앤솔로지 단편으로 처음 알았고 그 소설 제목이 ≪나의 탈출을 우리의 순간들로 미분하면≫이어서 그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정작 그는 EBS 고등수학 강의 오리엔테이션을 듣자마자 곧 중학수학으로 노선을 바꾸었단다. 캐릭터 작명을 잘하는 작가라고도 생각해왔는데 습작생 시절에는 주인공 이름을 '존'으로 지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염없이 까인 전적이 있었다. '핑' 던지면 '퐁'하고 날아오는 대사들이 최의택 소설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전에는 왜 인물들이 말을 안 하냐는 피드백을 받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랩을 따라불렀다는 일화를 읽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무미건조하게 옮겨 쓴 이 에피소드들은 실제 책에서는 정말 생기발랄한 어투로 이야기되며, 최근 들어 뭔가를 읽고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다. 내가 장애인 작가의 일상 에세이를 읽는 중이라는 걸 아는 가족이 거기 그렇게 웃을 얘기가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였다. 진짜 '재밌고' 작가가 '나대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는 내 말에 가족이 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말 해도 돼? 

42쪽

문장이나 대화, 인물에 대한 칭찬은 나를 일어나 춤추게 했다(말이 그렇다는 거다).



창작자들은 만들기만 할 뿐, 완성되고 나면 해석은 작품을 보고 듣고 읽는 자들에게 달려있다. 그럼에도 별점과 댓글과 리뷰를 뒤지다 말고 실제 쓰고 그리고 연기하고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찾게 된다. 그러나 보통 '작가의 말'은 길어봐야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 않나. 그러니 최의택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역시 덕질을 해본 작가라 그런지, 독자가 알고 싶어하는 A부터 Z까지 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풀어준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은 주로 무얼 읽는지, 그가 글을 '어떻게(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쓰는지, 특정 소재와 장르를 고르게 된 연유는 뭔지. 최초의 아이디어가 완성을 향해 다가가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작가는 주로 어떤 피드백을 취하고 편집자는 구체적으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 작가의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작품에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왜 어떤 주제에 천착하게 되는지. 소설가는 인물을 어떻게 조형하는지 왜 특정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특히 작가에게 쓰기 편한지. 글을 쓴다는 것이 작가에게 밥벌이와 자아실현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렇게 물음에 물음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다 보면 기어코 닿게 되는 것은 저자 최의택, 자신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현재의 그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삶과 과거와 육체도 최의택이란 존재에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도 말하게 된다. 




▶▶▶▶▶ 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 

태어나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이 평생 휠체어에 앉은 채 살아온 최의택이지만 자신의 장애명은 외우지 못했다. 펜을 들고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버거워질 무렵 그는 고등학교에서 자퇴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휠체어를 그의 연장된 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주었던 최초의 친구들과 한참 멀어진 채,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깊게 의식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장애로부터도 격리된다. 그러나 그가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모아 물었다. "장애명이 뭔가요?" 그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거의 잊고 사는 것에 성공했던 장애를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다 들이댄 것이다. 그동안은 그저 타인과 대면하지 않았기에 대상화될 일도 타자화될 일도 없었던 것뿐이었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는 그리운 유년기와 결별한다.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최의택으로 살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있었다. 

- "아이들이 뽑은 거예요. 제 맘대로 못 해요, 어머니."
그래서 나는 진짜로 반장이 됐다. 
- 그때 그 시절(글쓴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와 연관된 사람 모두가 처음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만 장애인이 처음인 건 아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적어도 그때 나는 살았다.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초등학생 최의택으로서 살았다. 
<내가 사랑한 시절> 중에서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반강제로 자각당한 그는 장애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남들이 하도 그러니 '장애인인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에 장애인 다큐멘터리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던 그였지만 이내 장애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뭔지 모를 해방감과 개운함을 느낀다. "그래, 나 장애인이다." 하지만 타인이 일방적으로 따옴표 안에 넣어 분류하고 정의한 규정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다. "나는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그의 자아 탐색과 장애 수용은 이제 막 시작되었기에, 말하자면 그는 '장애인'이라기보다는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 가깝다. 



여기서 최의택도 언급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 떠올랐다. 장애인은 어떻게 장애라는 정체성을 '수용'하게 되는가? 장애는 경험이며, 장애인은 사는 동안 그 경험에 맞서는 동시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시선으로 장애를 바라보고, 그것을 삶과 연결하고,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써내려간 '서사'의 결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는 지금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을,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을, 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취향에 관해서라면 하루 종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정작 '나'에 대해서는 몰랐던 사람. 소설 속 청소년 주인공들처럼 최의택 작가도 진보와 퇴보를 되풀이하며 성장 중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퇴하고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밝히면서도, 이제는 숨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직도 나의 장애로부터는 눈을 돌리고 싶다고, 똑바로 응시해 현실을 알게 되면 그 무게에 내가 짓눌리는 건 아닐까 싶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글쓰기가 마치 사회운동이나 투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는 계속 쓰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당사자인 본인이 쓴다 해도, 장애를 다루는 소설이 결국 장애를 대상화시켜 더더욱 밖으로 밀어내는 건 아닌지 고민 중이지만 그는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장애와는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글이 배제와 소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나'는 '내'가 알아봐주기를 기다리며 진작부터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장애 수용의 일환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더하여 스스로 쓰는 평론이기도 하고 동시에 투쟁 일지인 것도 맞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여러 가지 것들과 맞서 싸우고 분투하고 이름붙여 호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사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우리는 그가 한 인간으로서도, 여기 사람 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소수자로서도, 단어를 잣고 글을 짜는 작가로서도 확장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그는 아직 길 위에 있으며, ‘disabled person'과 'person with difficulty’ 사이에서 과도기 청소년처럼 여전히 갈등 중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언어로 말할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이 탐험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고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절망을 즐기지 않기 위하여> 



글쓴이는 자신이 쓰는 글에 담긴 가벼운 에너지를 강조하고 읽는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미리보기에 <아임 소 소리 존>' 장(章) 전문이 공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부분도 바로 거기였다. 그러나 책에는 <내가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과 <실격하는 삶>도 있다. 읽고 있노라면 치밀하고 단단한 슬픔, 새어나가지 않고 머무르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휠체어를 타고 극장에 가는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 시상식이나 행사에 참석하려면 어느 정도의 각오와 준비가 필요한지, 어떤 장애 보장구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지, 나이들어가는 부모님을 둔 그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정현종, <방문객>)'이 글에 새겨져 있다.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스스로에게 철퇴를 가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꼭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회의 틀 바깥으로 떠밀리다 못해 끝내 스스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 약해서, 이상해서, 소수라서 그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길에서 벗어나고 만다. 그들에겐 그러한 불합리를 바로잡을 힘은커녕 그에 대해 이야기할 목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 길 자체가 완전히 부서져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소리쳐 알려야 한다. 누가? 길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의 말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이 '네가 얘길 해야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게 정말 싫었다고. 그런 얘길 인터뷰로 전했던 게 올해 여름이었는데, 가을에 그는 소리쳐 알리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쓰는 것으로 이미 말하고 있었다. 인간 최의택은 아직 자기 언어를 찾아 헤매는 중이지만 자음과 모음을 굴리고 다듬는 작가 최의택은 ≪비인간≫에서 일찌감치 '말'을 결정하고 소리내어 불렀다. 퀴어, 병신, 불구자 같은 멸칭(蔑稱)은 그의 소설에서 금기어도 비속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번역기를 돌릴 필요가 없다. 듣고 읽을 마음만 있다면, 그의 언어는 우리의 말과 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최의택의 말이 내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느끼는 감각은 이상한 걸까? 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인어공주 하나만일 리는 없지 않은가. ㅇㅇ이어서 혹은 ㅇㅇ이 아니어서, 한 마디로 '주류이자 다수'가 아니기에 나의 말이 아닌 타자의 말로 나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는 무력한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맞은편에 있는 상대가 내 말을 외계인과의 교신보다 더 이질적으로 받아들일 거란 걸 일찌감치 알아서 나는 나답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공감이나 이해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듣기만이라도 하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 말고 다른 건 될 수 없는 사람들끼리 가까이 앉아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작가인 최의택은 쓰고, 독자인 나는 읽는다. 인간 최의택이 말하고 싶어한다. 그럼 그 전언을 받은 사람이 돌려보낼 답은 하나밖에 없다. 들을게요. 그리고 같이 이야기해요.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지, 나의 언어로 세상을 조립하는 일에 대해서.  

질환 이야기를 할 필요는 계속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질병이나 장애와 함께 더 오래 살아가게 됨에 따라, 의료는 그러한 삶에서의 의료 외적인 요구들을 점점 더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특수함에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낀다. 이야기는 언제나 상처에서부터 시작해왔고 치유의 한 형태였다.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몇 년 전에 읽었던 질답을 옮기며 끝맺겠다. 

Q. 개인의 언어를 존중하기 위해 장애인을 만나면 물어봐야 할까요? 사람 중심 표현과 정체정 중심 표현 중에서 뭘 선호하는지 말이에요. 

A. 언제든지 물을 수 있죠. 그게 필요하다면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지 않나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뭘 해야 하는지요.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물어주세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최의택의 대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