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의 니즈를 모르면서 그 니즈를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웹소설을 쓰다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 P44

실제로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독자가 중간에 이탈하는 현상을 ‘도중하차’라고 표현하는데요. 그렇게 보면 웹소설의 목적이란 독자를 내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면서 중간에 보여주고 싶은 풍경들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P54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는 어느 한 명 이상에게 영향을 주는 글을 쓰고 있다는 현실을 꼭 명심하라는 거예요. 이런 마음가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크게 다르거든요.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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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 사전 - 작가를 위한 갈등 설정 가이드 작가들을 위한 사전 시리즈
안젤라 애커만.베카 푸글리시 지음, 오수원 옮김 / 윌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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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란 무엇일까. 싸움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한 나에게 그것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주술과도 같은 말이었다. 정면으로 마주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일단은 못 본 척 돌아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벽 같은 것.


하지만 그런 나라도 소설을 쓸 때면 주인공 다음으로 갈등유발 인물을 설정할 만큼 작품 안에서의 갈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주인공이라면 자고로 굴러야죠!”라는 말에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하며 구겨진 이불처럼 몸이 쪼그라드는 인간도 나였다는 것이다.


『딜레마 사전』은 그런 나의 자세가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내가 갈등의 의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망쳐가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해피엔딩이라는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해피하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작가였던 것이다. 주인공을 반드시 해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적당히 못된 악당을 만들고 수습하기 쉬운 일만 벌였다. 주인공은 당연히 해피해졌다. 고만고만하게. 내가 주려던 행복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건 그 이야기를 만든 나 역시도 행복해지지 않는 길이었다.



궁극적으로 캐릭터의 위험은 작가가 쓰는 이야기의 목적이다. 작가들은 위기관리를 제대로 못하거나 갈등 수준이 너무 낮아 독자들이 책을 덮어버리는 상황을 걱정해야 한다. 46쪽



큰 성취감을 얻으려면 크게 넘어져야 한다. 이 책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곤 어떻게 해야 주인공을 크게, 치명적으로 계속해서 자빠뜨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정말 이 정도까지 해야 한다고? 지레 질릴 정도였는데, 그 질림의 크기가 내 작품이 성공할 수 없던 이유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이 부릅떠지고 책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갈등의 의미와 종류, 중요성에 대한 열렬한 가르침이 이어진 뒤 드디어 사전이 등장한다. 주제별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갈등이 다 정리되어 있는데, 단순하게 사례만 모은 것이 아니고 그 사례들로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결과는 무엇인지, 그때 캐릭터에게 생길 수 있는 감정이며 내적 갈등,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요소 등 하나의 갈등을 가지고 써볼 수 있는 설정들을 가능한 많이 제시한다.


그 갈등을 대처할 수 있는 방법과 갈등이 해소된 후의 긍정적인 결과까지 보여주어 갈등이란 어떻게 구축하고 진행해서 마무리해야 하는지를 전체적인 과정으로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론 이 부분이 정말 좋았다. 글감을 얻는 게 아니라 그 글감으로 뻗어갈 수 있는 이야기의 가지까지 함께 얻는 기분이어서 당장 채워 넣기만 하면 내 이야기가 완성될 것 같은 희망적인 기운에 휩싸였다. 이제 나는 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주인공에게 완전한 행복을 쥐여주기 위해 잘 넘어뜨리면서. 이야기의 해피엔딩이 나의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때까지.


윌북에서 출간하는 “작가들을 위한 사전 시리즈”는 글 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는 책이어서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구독하고 있는 블로그 피드에서, 가입한 카페에서 언제나 신속하게 다뤄지던 이유를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추천사를 쓴 심너울 작가의 말대로다. 이 책은 “이야기의 원천을 담은 데이터베이스”였다.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든든한.




※리뷰를 쓰는 대가로 도서와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받았습니다.

※본 글은 필자의 솔직한 감상과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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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최은숙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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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중요하며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정작 그 인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최은숙 작가의 『어떤 호소의 말들』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인권이란 추상적인 도덕 개념이거나 오랜 시간 옳다고 여겨온 막연한 믿음이거나, 떠들썩했던 몇몇 뉴스의 분류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웅크린 말들’에 작은 스피커 하나 연결해 세상에 조용히 울려 퍼지게 하고 싶었다(11쪽)”던 작가의 심정을 나의 무지함 앞에서 이해한다. 누군가가 스피커를 연결해서 볼륨을 높이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던 말. 세상에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브런치북 9회 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어떤 호소의 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년 넘게 일하고 있는 최은숙 조사관이 조사관으로서 일하면서 겪은 일들과 생각, 느낀 점들을 풀어 쓴 이야기다. “검정색 끈 대신 다정한 마음으로” 묶은 “나의 다정 기록(11쪽)”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딱딱한 보고서가 아닌 한 사람의 다정한 시선을 통해서 인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사건과 그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하는 데 일조한 사람, 기관, 사회 구조 등을 돌아보게 한다. “국가권력의 희생자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관인 인권위(76쪽)”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인권위의 권한이 왜 ‘권고’에 그치는지, 인권위의 독립성은 어째서 보장되어야 하는지 등의 심도 있는 질문도 스스로 던져보게 된다. 그것이 곧 나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는 걸 깨달을 때 이 책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인권위 조사관의 일이라면 사실 너머에 있는 다양한 무늬의 진실을 헤아려보는 것이야말로 인권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36쪽


누군가의 억울함을 밝히는 데도 법 지식이나 조사 기술 너머의 용기와 열정, 선의나 정직함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141쪽



『어떤 호소의 말들』이라는 제목 옆에는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사건 너머의 이야기”라는 건 딱딱한 문장으로 압축된 사건 뒤의 진실과 사람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권고나 호소처럼 들린다. 인권이란 결국 사람의 일이고, 사람에게 가까워지려면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건 곧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기 위함이지 않을까.


저자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가 무상으로 누리고 있는 타인의 애씀과 힘겨움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한 듯 누리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겼던 권리들이 사실은 현장에서 일하고 싸우고 버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몰랐어’, ‘관심 없어’하는 말은 함부로 뱉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에 대해 더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 그들의 귀를 거쳐 내 귀로 들어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 또한 잊지 않기 위해.


스물일곱 평범한 직장인에서 시민운동가로, 시민운동가에서 인권위 조사관이 되어 20년 넘게 인권을 수호하는 일을 해온 저자가 여전히 배우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사실 이 책은 사건보다 사람이 보이는 이야기다. 긴 세월 일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사무적인 태도를 자각하는 사람. 억울한 사람들 모두에게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도 전력을 다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을 고백하며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무능함과 무심함을 밝히는 사람. 소속 집단의 과오를 자신의 일처럼 부끄러워하는 사람. 선례가 없음이 문제라면 스스로 선례가 되어보겠다고 하는 사람. “조금씩 무심했고 조금씩 무책임했을 뿐(51쪽)”인 우리를 꼬집어 말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끝에는 “아주 옅은 농도의 다정함이나마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173쪽)”고 말하는 그런 사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인권은 언제나 피해자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59쪽


모든 일이 법과 제도를 잘 만드는 것만큼이나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해내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인권을 위한 일이라면 더욱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은 서로를 ‘조금 슬프고 귀여운 작은 존재’로 응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나는 ’인권의 마음‘이라 부르고 싶다. 그 마음이야말로 법의 그물이 구제하지 못하는 억울함이 기댈 곳인 것 같다. 160쪽




※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본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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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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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여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하야시 류이치가 경찰서 화장실에서 도주한다. 얼마 뒤 하야시 류이치로 오인 받은 중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차에 쫓기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학생의 이름은 미즈노 다이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미즈노 이즈미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슬픔에 울부짖는다. 엄마는 알고 싶다. 다이키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311쪽)”를.


가족이 전부이던 한 여성에게 가족이 망가지는 일은 세상이 끝나는 일과 같다. 이즈미의 삶은 다이키가 죽는 순간에 멈췄다. 경찰은 자신들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경찰을 보고 달아난 애는 애초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여긴다. 탈주한 살인범이 새로운 사건을 벌이고, 그로 인한 사람들의 분노와 불안감마저 죽은 다이키에게로 직행하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이즈미는 처절하게 무너져내린다. 소설은 황망하게 자식을 잃고 슬픔에 틀어박히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지나친 슬픔이 어떤 식으로 독이 되는지를. 애정에 등을 맞붙이고 있던 광기의 얼굴을 설핏설핏 드러내며 우리가 아는 사랑의 다른 표정을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2019년 신주쿠구 빌라에서 젊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을 맡게 된 미쓰야 슈헤이는 다이키 모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로 지정된 신입 형사 다도코로 가쿠토와 함께 피해자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던 모모이 다쓰히코의 행방을 찾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그 일은 묘하게도 15년 전 도주 중인 살인범으로 오인되어 사고사 한 소년, 다이키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미쓰야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질 때가 많은 인물로 주변인들은 그를 괴짜로 여긴다. 도통 속을 모르겠고, 말수도 적은 만큼 사건의 실마리도 속시원히 내주지 않는다. 그로 인한 답답함은 파트너인 가쿠토의 입을 통해서 독자에게까지 연결된다. 참고로 가쿠토는 열등감이 심해서 타인을 향한 거부반응까지 보이는 인물인데, 미쓰야의 침묵조차도 자기 비하의 건수로 삼던 그가 미쓰야와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도 꽤 볼 만한 이야기다.


미쓰야는 왜 현재의 사건을 15년 전 소년의 사건과 연관 짓는 걸까. 수수께끼는 만만치 않고, 좀처럼 예측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분할 일이다. 미쓰야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진득하게 파고든다. ‘모른다, 그러니까 알고 싶다’는 그의 단순한 논리는 한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동시에 타인의 입맛대로 해석된 후 쉽게 잊히는 어느 사건 속의 죽음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이 소설은 2018년 여름 오사카에 있었던 유사한 사건을 보고 썼다고 한다. 사망한 학생이 무면허에 훔친 오토바이를 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자업자득이라며, 사람들이 학생의 죽음을 당사자의 책임으로 쉽게 처리하는 모습에 작가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 때문에 쓴 소설이라기엔 결말이 좀 의아하게 다가오긴 하지만,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어떤 죽음은 너무도 쉽게 해석된 후 잊힌다. 그 해석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미쓰야 같은 사람이 생긴다.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매달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다이키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아이가 그 밤에 자전거를 타고 나간 이유가 무언지, 정말 집이 불편해서였는지, 엄마인 내가 잘못해서인지,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이즈미는 그 질문에서 놓여나지 못할 것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완벽한 듯 보이던 이즈미의 집에 죽음이 덮칠 때부터 예정되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다이키가 죽은 후 이즈미가 맞닥뜨려야 했던 충격 중 하나는 자신이 아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들의 웃는 얼굴을 매일같이 마주하면서도 아들이 밤 늦은 시각에 가족들 모르게 집을 나갈 거라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아들을 향한 불확신은 이즈미를 자책감의 늪으로 끌어내리며 광기에 젖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된다. 신주쿠구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던 모모이 다쓰히코의 어머니, 지에에게도 광기 어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들을 향한 애정이 지극한 지에는 그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며느리인 노노코를 화근으로 삼으며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노노코의 어머니인 요코는 자신의 애인이 딸을 겁탈하는 걸 보고 금속 배트로 쫓아내더니 어느 날 “죽였으니까”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딸에게 전한다. 맹목적인 애정은 이성의 눈을 가리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잘못된 방식을 선택하게도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인물 안에 감춰져 있었던 어두운 본성을 본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조금이라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그들의 마음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이즈미의 자문으로 들린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자책감이자, 황망하게 아들을 죽음에 뺏겨버린 어머니의 통곡, 기어이 죽음의 손에 넘어졌던 아들에게 진실을 묻는 목소리로 들린다.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진실은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진실이다. 묵묵하지만 꿋꿋하게 그 진실을 찾아가는 미쓰야 슈헤이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후속작이 이미 출간된 상태라고 하니 하루 빨리 국내로 들어오길 바랄 일이다. 가쿠토와 얼마나 더 가까워졌을지, 활약상이 더 보고 싶다.




※ 모로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본 글은 필자의 솔직한 감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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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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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은 다자이 오사무의 첫 창작집이다. 대부분 스물 서너살쯤 집필한 작품들로 다자이의 청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쓰기까지 다자이는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했고, 혼례를 치렀다. 비합법 좌익 활동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존경하는 작가와 동생이 죽었다. 작품을 집필하고 발표하는 동안에도 그의 인생의 파란은 계속됐다. 그는 또 한 번 자살을 시도했으며 맹장염 수술 후 복막염을 일으켜 중태에 빠졌다가 진통제로 사용하던 파비날에 중독되었다. 『만년』이 간행되었던 1936년에는 중독이 심각한 상태였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받은 후였다.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작가 현재 생활에 불길한 구름” 운운하며 문학잡지에 공공연하게 써낼 정도이니, 삶으로도 작품으로도 꽤나 유명세를 치렀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자이는 매우 심약한 사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면을 자꾸 보이는 주변의 인간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결국 인간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인간을 두려워하며 지옥 같은 괴로움을 겪었다.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해갈 요령이 없었기에 매사를 익살을 부리며 얼버무리는 인간이었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고, 자신의 한심함을 몇 번이고 밝혔다. 그 결정체가 바로 『인간실격』이었다. 끝내 인간다워지지 못한 주인공에게 ‘실격’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치부를 모조리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는 소설이다. 작가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다자이 오사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언급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년』은 그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다자이 오사무를 보여주는 책이다. 줄거리는 딱히 없지만 이야기 파편들을 한 몸인 양 늘어놓은 「잎」처럼, 책 안에 실린 열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다자이 오사무라는 인간에게 닿기 위한 잎맥처럼 뻗어나간다.


「추억」과 「역행」을 읽으면 유소년기부터 스물다섯까지의 다자이를 그려볼 수 있다. 친구가 고향에서 도망쳐 온 연인을 그냥 돌려보내려 하기에 자신이 덜컥 배웅을 나간다거나(「열차」)나 세입자에게 일 년이나 집세를 받지 못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모습(「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자신을 갇혀 있는 원숭이와 같은 구경거리로 인식하는 태도(「원숭이 섬」) 등은 작가 본인이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어복기」(붕어가 된 소녀의 이야기)나 「지구도」(일본에 천주교를 전도하러 왔다가 감옥에 갇히기 된 신부이야기), 「로마네스크」(최선을 다할수록 망해가는 세 사람 이야기) 같은 이야기들은 신비롭고 흥미로워서 단숨에 읽어나가게 되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도 다자이의 성격이나 취향, 아무튼 다자이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곳곳에 등장해서 ‘역시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구나’, 실감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을 쓸 때의 그의 모습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어릿광대의 꽃」에서는 작정을 하고 본문에서 튀어나와서, 실시간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오바 요조가 술집 여성과 바다에 투신한 뒤 혼자 살아남은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그 당시 (다자이가 투영된)요조의 심리와 그걸 쓰고 있는 작가(다자이)의 속내가 동일선상에 있는 것처럼 겹쳐지는 듯하다가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결국 주인공은 주인공의, 작가는 작가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미묘한 재미를 준다.


소설가 한 강을 생각하면 ‘파란 돌’이 떠오른다. 냇물 아래에 있는 파란 돌을 주우려는 모습을 그의 소설에서도 시에서도 봤기 때문이다. 이렇듯 독특하게 반복되는 이미지는 작가 본연의 세계를 드러낸다. 독자는 작가가 쓴 무수한 문장 속에서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이미지를 주워 모아가며 작가에게 가까워지는 건지도 모른다.


『만년』은 그에 특화된 책이다. 수록된 작품들 어디에서도 다자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다자이가 일기 대신 쓴 작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자이를 읽으려면 이 책은 필수여야 한다고, 얼마 전 블로그에 썼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제, 이걸로, 끝이라며 일련의 유서에 제목을 붙이듯” 책의 제목을 『만년』으로 정했다는 말을 듣지 않았어도 나는 이 책을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필독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죽음과 좌절, 공포감이 드리워진 채 흘러가는 인생의 파란 속에서도 다자이는 세 번이나 동인지를 창간하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습작만도 백 편이 넘는다고 한다. 이백 편이 넘는다는 말도 있다. 회피하고 단념하기가 일상이던 인간이 끝까지 놓지 않던 것. 그 첫 결실이 『만년』이었다고 생각하면 책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지는 않다.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욕을 해가며 그의 글을 읽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남아있다. 그것에 대해서 나는 자주 생각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는 내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문장이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인간실격』)”, 역시 마찬가지다.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책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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