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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 개정판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3년 4월
평점 :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지만 배설물을 창조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어느 날 변기에서 튀어나온 ‘머리’가 “어머니”하고 부른다. 충격적인 도입부로 시작하는 「머리」는 한 여성이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 뒤 그 아이가 한창때의 자신만큼 자라게 될 때까지 ‘머리’와의 불쾌한 동거 생활을 그린다. 아이와 머리가 자라는 동안 모체인 ‘그녀’는 늙는다. 젊음이 그립고 애틋해 보일 시기에 접어든 여성의 쓸쓸함과 헛헛함이 고조될 때 창조물과 대체되는 결말은 모체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걸 보여준다. 엄마의 자리는 없고 아이(혹은 머리)의 존재만 남아있다는 듯이.
이러한 모체의 존재감은 「몸하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생리가 멈추지 않아서 피임약을 오래 복용했다가 임신을 하게 된 김영란은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아이 아빠가 돼줄 사람부터 찾으”라는 말을 듣는다. 아빠가 있어야지 태아가 제대로 발육할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를 위해 가족들은 맞선을 주선하고 아이의 아빠를 찾는 신문 광고를 낸다. 불가능한 임신 과정과 태아 발육에 직접 관계된 산모를 차치하고 주변인도 사회도 오로지 아이의 아빠만은 요구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산모에게 묻는다. 임신이 혼자만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일이라면 모체의 고유한 영역의 일일 텐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바는 한결같다. 우리는 이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 표제작인 「저주토끼」에서는 복수로 반응한다. 화자의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가업의 불문율을 깨고 토끼 전등을 만든 적이 있다. 천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자신을 차별 없이 친구로 여겨주던 양조장 집 아들의 복수를 대신하기 위해서다. 양조장 집 아들은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는 좋은 술을 만들기보다는 싸구려 술을 많이 팔아 이익을 남기기를 원했고, 그를 목적으로 국가도 기업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할아버지의 친구는 뇌물과 뒷거래가 중요해지는 시대에 편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본인도 가정도 박살 났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용납할 수 없던 그의 친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그가 만든 토끼 전등을 건물 안에 놔둔 것만으로도 회사가 망하고 사장 일가 3대가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토끼의 끈질긴 공격과 번식은 이윤 추구와 물질적 풍요만을 중요시하다가 썩어버린 사회의 부도덕한 부분을 어떻게든 징벌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읽힌다. 불륜의 대가로 영원한 어둠에 갇히도록 만든 「차가운 손가락」도 같은 선상에 두고 읽을 수 있겠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내가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자와 단둘이 영원한 시간 속에 남겨지는 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칼자루는 죄가 더 가벼울 쪽이 들게 되어있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기존 사회에 역행하려다 실패한 부부가 등장한다.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맞아서 결혼했던 부부가 결국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조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삶은 불가능했고, 그 삶이 남편에게나마 가능하게 보였던 것은 아내가 그만큼의 몫을 더 해냈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7년에 걸쳐 빚을 청산하고 드디어 자가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 집은 아내가 “세상에 부딪혀 몸부림치며 일구어낸 전부”였다. 때문에 아내는 집을 잃을 수 없다. 아내는 결국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자신이 바라던 집을 온전히 얻게 되지만, 그 과정이 미스터리하다. 아내가 바라던 결말이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집과 일체화되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공포마저 불러일으킨다.
사회는 결국 구성하는 이들이 가지는 욕망의 총합으로 구현되는 것일 테다. 인간이 자본에 뒤처진 듯 보인다면 자본을 향한 인간의 탐욕이 그만큼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덫」과 「흉터」,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덫」에 나오는 남자는 덫에 걸린 여우의 피에서 황금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도록 상처를 쑤셔가며 황금을 모아다가 판다. 후일 딸의 피를 먹은 아들이 황금 피를 흘리는 걸 알고서는 딸을 먹이로 내어주고 아들의 몸에서 피를 내는 끔찍한 짓마저 서슴없이 저지른다.
「흉터」의 주인공은 모르는 사람에게 붙잡혀 동굴에 갇힌 뒤 괴물에게 뼈를 찢기고 골수를 빨아먹힌다. 우여곡절 끝에 동굴에서 탈출하지만 거두어진 사람에 의해 싸움판에 던져지며, 그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당한다. 괴물에게 잡혀가야 했던 이유도 그런 괴물에게마저 기생하여 생존하는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한 상실감을 느낀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에 등장하는 초원의 공주는 결혼 상대인 사막의 왕자의 눈을 고치려 황금 배의 주인을 찾아간다. 황금 배의 주인은 자신은 인간에게 저주를 걸지 않았다며, “그들이 저주에 걸린 이유는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주는 믿지 않지만, 시력을 되찾은 사막의 왕자는 그 믿음을 여 보란 듯 배반하고 전쟁 선포에 동의하며 공주를 마녀로 몰아간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해주며 황금 배의 주인은 말한다.
저주는 풀 수 있으나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 뜨게 할 방법은 없다. 저들이 언젠가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정보라,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中
인간은 탐욕스럽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기억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죽은 반려자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봇과 인공지능 연구에 그토록 열심히면서도 10년 20년도 더 쓸 수 있는 기계들을 멋대로 쓰레기 취급하고 폐기 처분한다 (「안녕, 내 사랑」). 인간이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저들끼리 판단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산 자도 죽은 자도 불행한 시간에 묶이며, “과거의 유령”이 된다(「재회」).
책에 실린 열 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저주토끼를 받아야 할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저절로 헤아려보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요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라고 말하던 한 여인의 목소리가 이 책이 거는 주술처럼 남아있다. 저주하고 싶은 사람에게서 인내하는 사람에게로 눈을 돌리게 된다. 미워하는 일보다 위로하는 법을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며. 기어이 희망의 방향으로, 인간을 한 번 더 믿어보는 길로 스스로 걸음을 옮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