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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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한반도로 들어온 이후 조선은 그의 세상이 되었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편리하게 수탈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근대화시켰다. 조선의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새로 즉위시킨 황제를 부하처럼 부리고,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어린 황태자를 일본으로 데려가 인질로 삼았다. 이토의 말 자체가 세상인 때였다. ‘문명개화’라는 미래지향적인 단어 속에 숨은 억압과 수탈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세상에 익숙해졌다. 혹은 그 실체를 알았기에 모른 척하거나 묵음으로 괴로워했다. 어느 쪽도 할 수 없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토의 말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기어이 자신의 말을 붙여보려고 한 이들이. 말로 안 되니까 몸으로, 목숨으로 전력으로 부딪치던 사람들이. 그중 어느 말은 총성처럼 터져 나왔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 우리는 그때 터진 말을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하얼빈』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을 받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이 저마다의 질문을 마주하며 행로하는 전개 방식이 흥미롭다. 평행한 채이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는 전차들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곧 한 플랫폼에서 만나게 된다는 걸 독자는 알고 있다. 소설 역시 사건보다는 사람에 더 집중해있다. 이토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세상에 고하고, 안중근은 삼켰다. 안중근이 삼키고 삼킨 말들은 몸속에서 들끓으며 그를 운명의 철로로 이끌었다. 소설에서 안중근은 처음부터 이토를 죽여야겠다고 작심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 찾았고, 그것이 곧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89쪽)”는 것이었다. “죽음을 잇대어서는 국권회복을 이룰 수(93쪽)” 없고, “지금 당장과 연결되지 않는 백 년 앞을 이해할 수 없었(24쪽)”으므로 안중근은 권총을 품에 넣고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토가 전 세계로 뻗어갈 발판으로 만든 그곳에서 안중근은 몸 안에 눌러 담고만 있던 말을 총성과 함께 터뜨렸다. “코레아 후라.”


역사가 알려주듯이 안중근의 말은 일본 외무성의 의도대로 각색되고 폄하되었다. 일본은 안중근의 의거를 정치성이라고는 가질 수 없는 인간이 벌인 무지의 소치로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는 진실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흐르는 법이었다. 안중근의 말은 조작된 역사를 부수고 100년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과녁에 쏘아진 총알처럼. 거짓된 정의로 약자를 짓밟고 죽이던 자들 보란 듯이. 그의 말은 추진력을 잃지 않고 세기의 허공을 가르며 반복해 물었다. 소위 배웠다고 하는 자들의 헛된 언어로 지배된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건 죄악이 아닌가. 풍진시대 속에서 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념의 뿌리로 돋아나는 말. 영웅이 된 자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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