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박이서 등 16명 지음 / 푸른약국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유재석이 부캐를 하나씩 늘릴 때마다 나는 묘하게 안도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다며 여러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내가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정반대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한 사람이 그 모든 역할을 다 하겠다니 진짜 별난 사람 아닌가.


김밥천국 옆에 붙은 작은 약국에선 책을 파는데 이번엔 아예 책을 내버렸다, 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내 반응도 비슷했다. 나는 좀 벙벙해져서 평소 입버릇처럼 하곤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인간, 대체 뭘까. 사람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동물인 걸까.


‘푸른약국’의 약사님은 책을 만들었고, 푸른약국은 ‘푸른약국 출판사’가 되었다. 푸른약국 출판사가 야심차게 출간한 첫 책은 약국 내에 자리한 ‘아직 독립 못 한 서점(이하 아독방)’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달았다.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본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이름 안에 ‘변화’의 느낌이 실려 있는 게 인상 깊었다. ‘독립 못 한’에서 ‘독립한’으로, 약국에서 태어난 서점이 이제는 저만의 지평을 열며 새롭게 달려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아독방의 2막’ 같은 느낌이랄까.


이 한 권의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2막이 되어주고 있는가는 애정하는 두 작가의 추천사를 읽을 때부터 알았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 오랜 시간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나는 고백해야겠다. (……) ‘독자들의 책’은 그 자체로 무섭도록 놀라운 서사이자 세계다. 6p


한 번도 노면에 직접 닿은 적 없는 바퀴의 안쪽 면과 이 땅을 드디어 접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쓰고 읽는 모든 사람이 연루된 상태가 아닐까. 놀랍게도 이 상태는 “한번 장착하면 거의 무한대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9p



염승숙, 윤고은 작가의 추천을 나란히 받은 책 안에는 무려 열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우연’, ‘사랑’,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한 ‘아무거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품들이었다.


“‘아’독방 ‘무’명 작가들 ‘거’리낌 없이 ‘나’를 표현하다”는 프로젝트 명이 단박에 납득이 될 정도로 정말이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거리낌 없는 이야기들이 순차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뽐냈다. ‘죽음’만 하더라도 저마다 얼마나 다른 톤의 분위기를 보여주던지, 이쯤 되면 작가들끼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미리 짜기라도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다 들 정도였다.


의심은 곧 놀라움으로 잊혔는데,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연인이 죽어버려서 ‘뭐야, 진짜 죽은 거야?’는 말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오그라들기도 했다. 정부에서 권고 사망을 추진하는 시대가 오는가 하면 한 클럽에선 죽은 자들이 술잔을 부딪치고 춤을 췄다.


어떤 젊음은 늙음이 꿈이자 희망이었는데 어떤 늙은이는 바로 그 뒷면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집을 떠나고 있었다. 낯선 이와의 상상어린 대화 뒤에 속이 꽉 조이며 답답해지는 망상이 곧바로 따라붙던 걸 기억하면, 이 책은 구성 면에서도 남다른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치켜세우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실제로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다음으로 내가 많이 한 말이 “어떻게 이 글 뒤에 이 글이 나와?”였다. 한 권의 책이 독자의 마음에 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디디며 나오는지를 알면서도 그 노력의 일부를 실감할 수 있던 순간은 특별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선물 같다. 그 이야기가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맛인 동시에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간다면 그보다 더 신이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는 기성작가와 신인작가, 심지어 처음 글을 쓰는 사람도 함께했다고 들었다. 노련한 작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동시에 언젠가 이 날을 기다리며 마음에 꽁꽁 숨겨왔을 신인작가들의 아껴둔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이런 말을 하다 보니 윤고은 작가의 추천사가 눈 안에서 떠오른다. 아독방이라는 하나의 문 안으로 졸졸졸 걸어 들어가는 열여섯 편의 소설이. 문 밖으로 나온 소설들이 어깨를 맞댄 채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도.


익명의 얼굴은 도저히 그려볼 수 없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다. 이제 막 세상에 터진 열여섯 개의 웃음소리가 “국경 열 개를 단숨에 넘”을 수 있을 듯 즐겁게 울려 퍼지는 것을. 한 목소리인 듯 어울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읽을 때면 컴컴한 영혼이 빛으로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의 플래시는 어둠의 영역에 존재하던 내 안의 오래된 기억과 생각들을 끄집어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유라는 이름의 비눗방울은 투명한 빛으로 한참을 부유하다가 어딘가에서 터졌다. 책은 끝없는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내 영혼을 자유롭게 했으므로 나는 책 읽기를 사랑했다. - P83

내 마음속에 시적인 감성이 들끓고 있는데, 그는 그 감성이 피어오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거야. 무슨 말을 더 하겠니? 나는 증기가 가득 차 있는데 꼭 닫아둔 커다란 솥단지 같았어. - P99

뭔가를 이룰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을 때 나는 나로, 너는 너로 거기 있었는데, 무엇이든 이룬 것이 있어야 할 순간에 우리는 이룬 것들로 불렸다. - P116

살아 있으면 뭐하니,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데. - P162

훈훈한 훈민정음을 쓰는 골골거리는 골룸이 힘센 임꺽정에게 까칠한 까나리 액젓을 먹이는 인생이란 생각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지고 세상은 행동하지 않아도 편리해지지만, 재미는 잃지 말자. 그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살고 싶다. - P244

신에게 무엇을 바쳐야 내가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 P23

소질 없는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이야기인데. 아무 말이나 해봐요.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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