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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 혼자여서 즐거운 밤의 밑줄사용법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귀퉁이에 좋아하는 문장을 써서 보낸 적 있다.
절절한 고백의 대목이기도 했고 다 잘 될 거라는 응원의 말이기도 했다. 그때의 문장은 단순히 ‘멋들어진 작문’이라거나 ‘왠지 좀 있어 보이는 표현’을 넘어섰다. 내 마음의 일부가 되었고, 어쩌면 내가 전하려던 것보다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내 마음을 전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비슷한 흐름의 책 구절들로 답을 받곤 했다.
마음은 넘치지만 아는 표현이라곤 별로 없던 십대에겐 더 많은 문장이 필요했고, 가진 게 열정뿐이던 우리는 부지런히 책 사냥을 나섰다. 책에 밑줄을 긋고 좋아하는 문장을 옮겨 쓰는 지금의 버릇은 그때 완성되었을 것이다. 때론 많은 말보다 한 번의 포옹이 위로가 되듯, 친구가 생뚱맞게 보내 온 어느 작가의 글귀가 그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된다는 것 또한 그 시절에 배웠다.
그렇게 커서인지 나는 타인의 밑줄에 무지 관심이 많다.
문장이 힘이 된다는 걸 거의 확신조로 말하게 된 후로는 더 많아졌다. 밑줄을 긋는다는 건 결국 마음이 동했다는 것, 남들은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움찔하는지 궁금하고 기회가 된다면 그 대목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좀 들어보고 싶다. 솔직히 그중에서 내가 쥐고 살 만 한건 없을까 기웃거리는 심정도 좀 있다. 좀 많이 있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작가 백영옥이 일상 곳곳에서 수집한 치유의 밑줄들’이란 카피는 꼭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서점 직원 시절부터 늘 책방을 열고 싶었습니다. 그 서점이 약국 같은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책 속의 문장을 약 대신 처방해주는 동네 약방처럼요. (……) 저는 연애 불능자예요, 저는 선택 장애가 있어요, 저는 거절을 못하는 병이 있습니다, 라고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해열제나 감기약 같은 책을 골라 처방해주고 싶었습니다. (8p)
카피 문구대로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에는 백영옥 작가가 일상 속에서 수집한 치유의 문장들이 담겨있다. 조곤조곤 얘기하는 듯한 문체라 늦은 밤 라디오를 듣는 기분이 들곤 했다. 실제로도 라디오에서 흐름직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편한 자세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스티븐 킹이 아침 여덟시 삼십 분부터 오후 한시 삼십분까지 매일 2천 단어씩 쓴다는 것을 배웠고, 평균이란 건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이란 것을 배웠다. 감정의 민첩성과 자세의 중요성, 진정한 의미의 무소유와 느슨함 같은 팁들도 쏙쏙 흡수할 수 있었다. 책장은 술술 넘어가지만 머릿속에 들어앉는 정보가 상당했다. 쉽게 잘 가르치는 것만큼 좋은 재능도 없는데, 읽다 말고 실없이 웃던 기억이 난다. 기대보다 더 유익한 독서를 했다.
작가는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반복해 읽는다던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시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세상에 누구도 없는 듯 아픔이 찾아오면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해요. 이 시를 서랍 안에 포개어 잘 넣어두세요. 저처럼요. (222p)
이런 때까지 남의 문장을 빌리는 건 좀 그렇지만, 이 이상 이 책을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찬바람이 마음까지 들어차는 계절, 꼼질꼼질 꺼내보기 좋은 문장들이 이 책 안에 많이 있다. 차곡차곡 쌓인 밑줄들을 보자니 한동안 내 마음은 안녕하겠구나 싶어 든든하다. 이렇게 나는 또 어제보다 강해진다. 문장이 힘이 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95p
때로는 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게 진짜 용기이니까요. 가끔은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된다죠. 비 온 후,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 거예요.
◆152p
행복의 다른 이름에 대해 생각했어요. 고마움이 아닐까 싶어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귀함을 아는 마음. 주위에 이미 존재하는 행복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싶습니다.
◆179p
열창이나 열연보다, 담백하고 자연스런 노래와 연기가 더 좋아지는 요즘입니다.
살면 살수록, 힘주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게 더 어려운 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