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1부 - 전3권 세트 (1,2,3 권)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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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 2006-10-0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림

제1권 조광조에 대하여,
제2권 공자에 대하여,
제3권 퇴계에 대하여,
대략 큰 줄기로 요약하면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지루한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읽기만 하고 느낄줄 모르면 독서의 참맛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새로운 앎 또한 발견 못했다면 독서의 매력을 발견치 못한 것이리라.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고 지식을 더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느껴 생활에 실천을 한다면
독서의 소규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시간이 나는대로 조광조와 공자, 퇴계선생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보자.



유림(儒-선비유 林-수풀림) / 최인호 / 열림원

작가는 책머리에 이렇게 시작한다.

유림에 대한 구상을 15년 전부터 했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와 공자의 사당이 있는 태산, 주유열국을
시작했던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에 올라 사전답사를 하며
10년 전에 이미두 차례나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다.
공자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소설의 제목을 미리 정해두었다고.

한 사람의 개인에게 인격이 있듯 한 국가에도 국격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이룬다면 이러한 국격을 가진 국민들이
그 나라의 국민성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며, 우리의 국격은 어떠하고 우리의
국민성은 도대체 어떠한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세계적 성리학자 이퇴계의 초상은 천원짜리 화폐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율곡의 초상 역시 오천 원짜리 지폐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화폐속에 그려져 있는 그 인물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에 젖어 이퇴계의 사상보다는 이퇴계의 열굴이
그려진 그 화폐만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던지며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종 13년(1842년)에 태어나 중종 14년(1519).
3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치개혁자.
썩어빠진 정치를 바로잡으로려다 실패하였던 이상주의자,
조광조 역시 유교의 사상으로 나라를 구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의 나이 33세 때 중종은 직접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에 나아가
직접 다음과 같은 알성문과 시험문제를 낸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 그러니 그대들은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조광조는 그 유명한 답안을 쓰기 시작한다.

"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임금과 백성 역시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
본인은 작가로서 이 혼란한 시대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나약한 펜을 들어 글을 써 질문을 던지려 함이니, 공자여, 과연 그대가 2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의 경세지략(經世之略)을 펼칠 수 있겠는가.

내가 굳이 박수무당이 되어 공자의 혼을 불러들이고, 이퇴계와 조광조를
초혼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니,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나폴레옹에게 패망한 국민들에게 '독일 국민들에게 고함'이란 글을 썼다.
비탄에 빠져 있는 독일 국민드에게 '불행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나도 감히 내 사랑하는 조선민족들에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글을
바치려 함이니......
그 효(孝)와 그 충(忠), 그 예(禮), 그 경(敬)으로 가득 찼던 숲으로 가자.
유림의 숲으로 가자.


2005. 여름 無二堂에서
최인호



책 속으로
제1권

제1부 왕도(王道) - 하늘에 이르는 길
전체 4장으로 나뉜다.

'조광조 하늘 아래 지극한 도를 구하다'

작가는 맨 처음 화순의 너릿재 터널에서 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책의 한 귀퉁이를 접기 시작했는데
온전하게 그냥 넘어간 그리 많지 않다.
그것도 모자라 펜을 들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어나갔다.

화순읍 네거리에서 우회전 29호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능주도착.

그곳에는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유허비'가 있다.
역사적 인물 조광조가 귀양와서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어간 바로 그 장소.
거의 5백 전의 일. 능주는 그의 옛 이름이 '능성'이라고 한다.
불과 이곳에 1개월간 머물며 능성에서 유배 중에 지은 시라는 뜻의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를 썼다고 한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적려유허비에는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중종반전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다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중종14년(1519년)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
되어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현종 8년(16667년) 당시
능주 목사인 민여로(閔汝老)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7세의 짧은 인생을 살고 갔지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던 조광조.
기념관의 강당 천정에 '애우당(愛憂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근심 걱정을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
건물 안 벽 천정을 따라 현판이 죽 둘러서 있다고 한다.
그의 '절명시'도 걸려있다고 하는데 절명시란 말 그대로 죽기 직전에 쓴 시로
일종의 유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임종게(臨임할임, 終마칠종, 偈쉴게)인 것.

그는 사약을 가지고 군사들이 내려오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무릎을 꿇고 주위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이르고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종이 위에 절명시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고 한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밝게 비추리.



적려유허비는 조광조 死 후, 150여 년 후에 이곳 능주의 목사인 민여로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신이 능주 목사로 재직하던 70세의 노년
때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조광주와 유허비를 건립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송시열로 조선 후기 최고의 문신이자 학자로 흔히 노론(老論)의
영수(領-거느릴영 袖-소매수)로 알려져 있는 대유학자로 주자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어왔던 빼어난 학자. 그도 역시 말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후 제주로 유배되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자신도 사약을 받고 죽은 비참한 운명 예감하고 있었음인가. 송시열은 민여로의 부탁을
받자 망설임 없이 조광조의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은 비문을 가다듬어 전서한 사람은 민유중(閔維重)으로 그 역시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중신으로 사림(士林)안에 명성이 높았던 대유학자로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자신의 문중인 민여로의 부탁을 받고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가다듬는 데 흔쾌히
동참했다고 한다.

송시열과 민유중의 합작품인 비문을 직접 글씨로 쓴 사람은 송준길. 그도 역시 송시열과
같은 동종(同宗)으로 뛰어난 성리학자로 이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
다고.

조광조는 그의 사후 26년 후인 인종 원년(1545) 신원되어, 그로부터 23년 뒤인
선조 원년(1545)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짐으로써 정식으로 복권된다.

조광조는 29세에 진사시험에 일등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일등으로 장원급제하였던 '춘부'의 한 구절,

'나는 어떻게 해서든 샘물이 강물이 되어 바다에 도달할 때까지 맑음을 유지하려 애썼고,
하늘의 맑은 명(天之明命)을 깨끗이 하여 지키려고 생명을 바쳤던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의지'를 엿볼 수 있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는 하늘의 밝은 뜻이 완성되려면 무엇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성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정치철학은 제도와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에 있는 지도자들의 도덕적인
천선(遷-옮길천 善)과 진덕(進德)으로 본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사람이 어진 마음으로 수양을 하여 하늘에 가깝게 되고 임금이 먼저
군자가 되어 스스로의 허물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개혁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이 군자가 될 때 비로소 소인들은 사라지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되며, 임금과 백성이 하나인 이상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것.

바로 도덕주의가 그의 정치철학이었다.


남곤과 심정은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 궁궐 안 나뭇잎에 벌레들이 잘 갉아먹는 과일즙으로
'주초위왕'이란 글자를 미리 써놓고 이를 벌레들이 파먹도록 한 후 일부러 궁녀로 하여금
왕의 후궁인 희빈에게 건네어지도록 흉계를 꾸몄다.

중종 원년(1506년 9월) 박원종가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오른 중종은 왕도정치를 펼치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자신의
지지세력이 약하자 신진세력인 조광조를 등용, 철인군주정치를 펼치려 했던 사실을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세력들의 개혁정치는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중종 자신도 지나친 도덕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심정의 작품이었던 '주초의 술수'는 중종의 심중을 꿰뚫어본 심정의 작품이었다고.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뒤 똑깥은 조작사건으로 심정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1527년 2월 후에 인종이 되는 세자의 생일날 작서의 변으로 인함이다.
동궁안의 은행나무에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진 쥐 한마리가 걸려있다.
이는중종의 계비인 윤시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경빈 박씨가 자기 소생인 복성군
을 세자로 책볻하기 위해 저주를 내린 사건이라 하여 '작서(灼사를작 鼠쥐서)의 변'이라부름.

남곤은 기묘사화 후 좌우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탁월한 시인 남곤은 부인의 들려주는 허종에 관한 얘기를 들려준다.
부인의 얘기는 갑자사화(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복수극을 펼친
사건)의 우찬성 허종의 얘기.
그는 조광조의 사사는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은 조광조에 대해 사약을
내리는 어전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부인의 충고에 깨달아 칭병하여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곤은 말년에 자신의 죄를 자책하고 자신의 사고를
모두 불태우고, 자신의 무덤가에 비조차 세우지 않을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다만 한 수가 전해진다고 한다.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신음하다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독이 몸안에 빨리 퍼져 죽음에 이르는 뜨거운 방안보다, 빨리 죽게 하려고
밧줄을 들고 달려오는 군사를 향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대신 남아있는 사약을 한꺼번에 들이켰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37세, 정치개혁의 웅대한 뜻을 품고 나선지 불과 4년 만의 일.

조광조가 집주인에게 마지막으로 '죽어 너희 집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유언을 남긴 이 초가집.
그러나 오히려 후세에 교훈을 전하는 기념관으로 복원되었고, 흉가라고 하지 않겠느냐던
그 초가집은 조광조의 넋을 기리는 장소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더럽혀진 것은 조광조의 이름이 아니라 그를 죽인 역사의 이름이며, 흉가가 되어버린 것은
이 초가집이 아니라 그런 오욕의 역사를 만들어낸 조선왕조인 것이다.
흉가와 같은 왕조는 사라졌어도 조광조의 이름은 이렇게 남아 전항고 있음이다.

영정각(影幀-그림족자 정 閣-누각각)에는 조광조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퇴계는 '퇴계언행록'에서 조광조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고.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시대는 환경과 역경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묘(己卯)의 실패도 이와 같은 것이다. 당시 공은 실패할 것을 이미 알고 자제를
하였지만 그 동료들이 탄핵하여 오히려 공을 탄핵하려 하였으니 그도 어찌할 수
없었다."

선조가 경연에서 이퇴계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물었을 때
"조광조는 천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고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 여러 사람들과 서로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하였습니다.
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구신들을 물리치려 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평생 조광조를 존경한 나머지 자신이 세운 사당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은 이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전한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후에이론을 실천하였으며 이론을 실천하는 목적은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아깝다! 공은 어질고 밝은 성정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게로 나아가 위로는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수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으니, 비록 임금에게 간청을
하기는 하였지만 공을 비방하는 입이 한 번 열림에 결국 몸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에게까지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던 것일까?"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전에 성금하게 정치에 띄어든 아마추어 정치가였던가.

그는 스스로 때를 만들었고 스스로 원칙을 세웠고 명문을 만들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정치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의 실패를 우리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 그 교훈의 뜻을 새겨
'명분 있는 정치, 원칙 있는 정치'를 완성해 가는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몫이라고.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천자로 추앙받는 문와이 남긴 세가지 유언
첫째, 좋은 일을 보면 게을리 하지 말고 즉시 가서 행해야 한다.
둘째,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잡아야 한다.
셋째, 나쁜 일을 보면 급히 피해야 한다.

문왕은 강태공을 국사에 임명한 왕이다. 문왕 사후 강태공은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역린(逆-거스를역 鱗-비늘린)은 문자 그대로 용의 목 근처에 난 비늘로
이 비늘의 특징은 거꾸로 나 있다는 것. 이를 건드리면 용은 성을 내어
건드린 사람을 죽여버린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 기묘사화를 일으킨 중종도 이런 역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산군을 쫓아내는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 중종은 처음에는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훈구
파들에게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10년 동안 중종은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강력한 자신의 친위세력을 조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알성시에서 중종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문과시험을 출제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시험문제 출제에서 중종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답은 근독의 두 사상, 하늘의 천성인 명도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왕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작가는 썼다.

조광조의 묘는 용인에 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이었던 조원강의 묘소가 있고 그의 조부와 그의 부인 이씨, 아들 정과 용,
모든 가족들이 묻혀 있는 선산이 있는 곳이라고.

조광조는 그의 부친의 묘소 앞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는 한편
부친의 묘 아래 여막을 짓고 잠을 잘 때도 참최복을 벗지 않고
아침저녁 드리는 제상의 제기들도 손수 씻어 제사를 올렸다고.
3년의 시묘가 끝났어도 그는 이곳을 뜨지 않고 여막이 있던 자리에
초당을 짓고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꽃과 잣나무도 심어놓고
학문에 정진했던 곳으로 조광조의 정치사랑이 완성된 곳이라고 하는데,

유배지로 떠날 때 이자가 이곳 선영에 잠시 들러 가자고 권유하자
'국법을 어긴 강상 죄인이 되어 어찌 선영에 참배할 수 있겠소'
대신 문충공의 묘소에는 잠시 들러 예를 표하고 떠나겠소. 라고 했다고
문충공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이다.

그는 이성계가 고려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보이자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 위에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에게 격살된
천품이 높고 충효를 겸하였던 충신이다.
단심가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든없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줄이 있으리오.
문충공이 죽음을 당함에 그의 곁에는 죽어가는 그를 함께 부둥켜안고 죽은
정몽주를 모신 녹사가 있었다.
'그때의 일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한 이가 없어
뒷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다.'고 [포은집]에 실린 이 기록은 훗날 심광세에
의해 정리되었으나 정몽주의 단심과와 정뭉주를 위해 죽음을 바친
이름없는 녹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다.

조광조는 평소에 정몽주와 그의 스승이었던 한훤당 김굉필. 두 사람을 사표로 삼았다고.
조광조는 17세 되던 해 부친 조원강이 평안도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가
마침 그곳 회천에 정치적 이유로 유배 와 있던 김굉필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

조광조와 인연이 있는 갖바치와 비녀에 얽힌 여인, 두 사람의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조광조는 평생 동안 한 사람의 부인만을 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서경덕 같은 빼어난 성리학자들도 대부분 축첩(蓄妾)을 하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이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었던 조광조.

그에게 20세도 안되었던 젊은 시절 여인숙에서 마주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쪽진 머리의 비녀를 뽑아 조광조에게 건넸던 것이다.
여인이 비녀를 보낸다는 것은 풀어헤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암시.
여인의 유혹을 거절한다고 해서 비녀는 사람을 시켜 돌려줄 수 없는 물건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여인에게 직접 비녀를 돌려주지 아니하고
여인숙의 벽에 이를 걸어놓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갖바치는 조광조를 놀리면서 말한다.
"나으리는 화보시란 말씀도 모르십니까. 정에 굶주린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를
쓰다듬어 비녀를 다시 꽂아주는 행위도 훌륭한 보시이며 자비행위인 것입니다."라고.

갖바치는 조광조가 유배지로 떠날때 한참을 따라오다 걸망에 자기가 손수 지은
가죽신을 넣어 전해주면서 유배지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망태를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조광조는 그 약속을 지켰고, 마지막 가는 길에 양팽손의 손에 의해
한짝은 흰색이고 다른 한짝은 검은색인 짝짝이 신발인 가죽신을 신고 이 세상을 떠났다.

유배지로 가는 길은 한양에서 능성까지 정확히 열흘.
11월 26일 초겨울날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것은 1519년 12월 20일.
일찍이 전제 왕조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던
한국의 마키아벨리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사액(賜줄사 額이마액)이란 '임금이 하사한 편액'으로 조광조는
'심곡서원'이라는 효종이 직접 쓴 현판을 조광조 그의 사후 130년 만에 내린다.
효종은 직접 이곳에 채지연을 보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했다.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
효종이 형인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신도비란 지난날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비였다.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의 남쪽을 향해 세우는데, 여기서 신도란 말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
곧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조광조 그의 무덤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라고 말한다.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 죽어서도 단애(斷-끊을단 崖-낭떠러지애)의 운명이었다.

그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에 대한 얘기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한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고 한다.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로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썼다는 선비.


그 한훤당의 '한빙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1. 동정유상-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 정심솔성-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 정관위좌-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4. 심척선불-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고를 깊이 배척하라.
5. 통절구습-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 식욕징분-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 지명돈인-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 안빈수분-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 거사종검-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 일신 공부-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 독서궁리-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도록 하라.
12. 불망어-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 주일불이-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 극념극근-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 지언- 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 지기-일의 기미를 알도록 하라.
17. 신종여시- 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한빙계'는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이 되었다.
조광조가 한훤당의 수하에서 학문을 배운 것은 일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한훤당이 희천으로 유배된 지 2년 만에 순천으로 이배되었기 때문.

붕당죄로 기소된 조광조.

붕당죄란 무엇인가?
사라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지 모인 죄.
이는 국가를 정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불렀다.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
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다.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였다.
나이 55세에 왕도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나라의 사구(司寇)는
벼슬을 내던지고 국외로 여행길을 오른 공자는 86세에
노나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13년 동안 70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실패하게 된다.
그의 왕도정치의 핵심은 무엇이며 왜 70여나라로부터 배척당하였는가?
조광조기 스승 한훤당에게 물은 질문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 방법을 필요로 한다.
용현정신-현인군자를 정치에 적극 참여시켜야 한다.
사기진작-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
개혁정신-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
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놓아야 한다는 언론자유정책이엇던 것이다.

조광조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