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는 장비들을 꼼꼼히 점검해서 고장 난 곳을 고쳤다. 그리고 아버지는 고장 나기 전에 미리 장비를 뜯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어쩔 수 없이 고장이 나면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셨다. 무엇을 고장나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는 것,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지내니?‘ 하는 일상적인 인사도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 말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서 식량을 비롯한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길고도 어두운 겨울을 지나면서, 불필요하게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옛 바이킹 생존 전략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생물의 종이나, 새로운 무기물, 새로운 소립자, 새로운 분자, 혹은 새로운 은하계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는 어느 과학자든 바라 마지않는 가장 높은 명예이자, 위대한 임무이다. 각각의 과학분야는 이름 짓는 관습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 막 발견한 새로운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한 다음 지금까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서 현대적이면서도 영구한 이미지를 암시하는 표현을 생각해내면 마침내 그 소중한 대상에 세례명을 붙일 수 있다. 그러고는 이 서투르게 이름 짓는 결과의 작은 부분이라도 앞으로 영원히 변치 않고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가망 없는 염원을 한다....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그는 내게 "적어도 네 가지에서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혈액형이 있어서 잘못된 혈액을 보내면 "누군가가 죽기 때문에 완전히 그 혈액을 낭비해버릴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과 혈액의 낭비가 클로드의 마음속에서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병원은 아픈 사람을 가둬두고 그 사람이 죽거나 나을 때까지 계속 약을 주입하는 곳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행동한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그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팽나무의 씨를 강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싸구려 장난감이라도 새것일 때는 빛나 보이듯, 내 첫 과학적 발견도 그렇게 반짝였다.

..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버섯이 곰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가 곧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버섯의 머리는 그것이 엄청나게 맛있는 것이든 치명적인 독을 가진 것이든 더 복잡하고 완전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유기체에 부착된 생식기에 불과하다. 모든 버섯 머리 아래에는 길게는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균사 조직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흙덩이를 감싸며 그물처럼 퍼져서 땅의 모습을 보존한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나는 잠들기 전에 하고 있던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빌은 내 가족이었다. 학생들은 계속 오고, 그리고 떠날 것이다. 학생들은 학생들이다. 어떤 학생들은 큰 희망을 품고 오고, 어떤 학생들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애착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와 빌이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 소음에 지나지 않는 일들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잘난 척하고, 욕심 많고, 젠체하는 학계의 기대들로부터 해방시켰다. 나는 세상을 바꾸지도, 새로운 세대를 교화하지도, 내가 속한 기관에 영광을 가져다주지도 않을 것이다. 실험실에 몸을 담고, 모든 것, 육체와 영혼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그 밴에서 산 채로 기어나왔을 때 내가 가진 것을 확인해보니 중요한 것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신의였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비커와 온도계와 접지봉을 관리할 것이다. 내가 은퇴할 때 전부 다 쓰레기 취급 당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해는 절대, 절대 지지 않는다. 그냥 하늘 주변을 빙빙 도는 느낌이다. 가운데 서 있는 나를 중심으로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하늘에 낮게 뜬 채 빙빙 돌아갈 뿐이다. 삶은 조용하고 비현실적이 된다.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이 몇 시인지를 확인하는 습관을 버리게 된다. 깰 때까지 자고, 배부를 때까지 먹고,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세 활동을 돌려가며 되풀이한다. 북극에서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에 상관없이 결국 있는 기간은 단 하루다. 그런 다음 겨울을 피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겨울에는 석 달 동안 밤이 계속되고 태양은 한 번도 뜨지 않는다. 나는 거기 없지만 그 이끼랑 그 새들, 그 사향소는 거기 남아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먹을 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나는 절대 아물지 않는 이 상처가 신물 나게 지겹다. 누가 작은 친절만 베풀어도 그 빵부스러기를 따라가면 엄마의 부드러운 사랑과 할머니의 애정 어린 칭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치한 내 마음이 죽을 만큼 싫다. 이제는 놀라지 않지만 매번 그런 실수를 할 때마다 상처받는 것은 변함없다. ‘이 여자는 내 의사지 엄마가 아냐.‘ 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엄하게 이른다. 그리고 이런 욕구를 갖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치욕을 느낀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는 어디에선가 일정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우리 둘 사이의 시간이 정확히 12분 남았다고 정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의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산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에 보내는 데 45초밖에 걸리지 않아요" 하며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가까운 곳에 이곳보다 더 많은 (심지어 더 정교한) 기계가 있는 병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마음을 뺏긴다.
..그리고 그녀는 클린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아기 아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예를 들어 기절하거나 하면 말이죠. 그러면 그냥 옆으로 차버리고 하던 일을 계속할 겁니다." 클린트의 어머니가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였기 때문에 그는 다양한 난산에 관한 이야기를 저녁 먹으면서 일상적으로 듣고 커왔다. 그런 그가 기절할 위험은 없지만 그는 그 시나리오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퇴원하기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내가 자주 그렇듯이,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N21을 타고 남서쪽으로 여행하면서 우리는 5년전 처음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되새겼다. 세상에서 가장 녹색이 많은 곳에 온 경험 말이다. 너무도 사방이 녹색으로 충만한 아일랜드에서는 녹색이 아닌 것이 오히려 눈에 띄었다. 길, 벽, 해안선, 심지어 양 한 마리 한 마리마저 녹색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거기 놓여서, 서로 너무도 다른 수많은 종류의 녹색을 광활한 풍경 속에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소품처럼 보였다. 사방은 옅은 녹색, 짙은 녹색, 누르스름한 녹색, 초록빛이 도는 노란색, 푸르스름한 녹색, 잿빛 회색, 진짜 녹색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지구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이 우월한 생명체들에 의해 우리가 운 좋게도 수적 열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누릴 수 있다. 딩글에 있는 토탄 늪 가운데 서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 다른 영장류가 이곳 해안에 도착하기 전 아일랜드는 어떤 곳이었을까 상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주에서 보면 그것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는 털복숭이 에메랄드처럼, 거대한 해양 플랑크톤 꽃 같은 땅처럼 반짝였을까?

...나는 누군가가 95세가 돼서도 죽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햇살이 눈부신 오늘 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병을 띄워 보내고 싶다. 누군가 기억해주길. 누군가 언젠가 내 손녀를 찾아서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부엌에 앉아 손에 펜을 쥔 채 창밖을 보던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는 결정을 내리느라 바빠서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도, 창틀에 쌓인 먼지도 볼 겨를이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결국 할머니는 수십 년 먼저 손녀를 사랑해버리기로 결정했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햇빛을 받고 앉아서 나무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꿈꿨다고 누군가가 말해줄 수 있기를.

..그러나 나무는 그것 말고도 다른 데 이 영양분을 써야 할 곳이 많다. 늙은 이파리들을 대체하고, 감염된 곳을 치료하는 약도 만들고, 꽃과 씨앗도 생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원자재를 사용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원이 남아도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 자원을 찾기 위해 위로 아래로 뻗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충분히 높이, 충분히 깊게 뻗지 못한 가지와 뿌리는 그 영양분들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자원보다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더 적어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옮긴이)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의 손주들의 손주들이 경외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있고, 그것을 건설하는 동안 할아버지들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투박한 지시사항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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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p.
.."위대한 작가인가 누군가 한 말인데 시종이 보기에 영웅인 남자는 없대요. 누구나 그런 시종을 한 명쯤은 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항상 남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면서 살려면 너무 힘들잖아요."

130p.
...이 세계는 이상하리 만큼 단순했다. 사치를 위한 사치 수준을 넘어섰을 때 찾아오는 단순함이 이 세계의 특징이었다. 인간은 요트를 세 척, 자동차를 네 대씩이나 가질 필요가 없고 하루에 세 끼 이상 먹을 수도 없다. 그리고 값비싼 그림을 사더라도 한 방에 한 점 이상 걸어 놓을 이유가 없다. 누가 들어도 단순한 이치이다. 이 세계 사람들은 무엇이든 최고를 고집한다. 최고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물건이 마음에 들거나 갖고 싶으면 사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 사람들은 "사고 싶지만 여유가 안 된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상하리 만큼 단순하게 돌아갔고 나는 그 이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276p.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우리 집과 그레타 생각뿐이었다. 더는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레타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막 시작한 찰나였다. 많은 것들을 원하기 시작한 찰나였다. 원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가기 시작한 찰나였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몸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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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1p.
..젊은이의 언행에 연장자가 참을 수 있는 것도 ‘저 놈도 곧 늙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연장자의 언행에 젊은이가 참을 수 있는 것도 ‘저 놈도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방이건 고통이건,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어떻게 생각할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만약 고통이 1분이 될지 1년이 될지 잘 안다면 일시적인 불안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고 해도 일시적인 것인지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로 견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이 없다.

151p.
..자신의 진짜 모습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성실한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이 사실은 성실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161~162p.
..도대체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가. 번트에 실패한 후 아웃, 다시 타석에 섰을 때 홈런을 쳤을 경우 실패인가 성공인가. 성공과 실패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성공과 실패를 측정하는 척도가 많기 때문이다. 돈·권력·명예·가정의 평화·사랑·건강·장수·평온 등에서 어느 것을 목표로 하는가에 따라 똑같은 것이 성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실패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권력 싸움에서는 패했다 하더라도 조용한 생활을 보내는 것에는 성공한다. 가족과 헤어지고 친구가 없어지면 인간관계의 고민에서 해방되고 누구한테도 불평을 듣지 않고 청풍명월을 맛본다는 면에서 성공한 것이 된다. 직장에서 잘려도 일에 있어서는 실패지만 만족할 만큼 잘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갑을 떨어뜨려도 ‘이걸로 당분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라며 가슴을 쓸어내려도 좋을 것이다.
..이것을 응용하면, 실패를 모두 피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실패라는 것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실패를 근절하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무리라면 결과가 나온 뒤에 바라면 된다. 실패라고 해도 ‘이 결과를 바랬던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된다.
..적어도 성공과 실패에 담담해지고 싶다. 실패를 너무 두려워해서 어떤 선택을 할 때에도 ‘여기서 실패하면 끝이다.‘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보기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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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p.
..이사 오고 나서는 한동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집도 내 것이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가 고른 내 것인데, 그런 집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내 것 같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이상한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잠들었다가도 쉽게 깼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일어나 침실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마치 처음 와보는 것처럼, 손님의 시선으로 집을 둘러봤다. 무광의 골드로 포인트를 준 방문 손잡이와 날렵한 곡선의 싱크대 수전을 매만졌고, 세겹의 셰이드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퍼져나오는 루이스폴센의 펜던트 조명을 껐다 켰다 해봤다. 내가 신경 쓰고 힘준 것들을 하나씩 짚어본 다음에야 편히 잠들 수 있었다.

142p.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193p.
..나에겐 고심 끝의 결정이자 엄청난 도전이고 인생의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다 준비하고 나서 보니 결국 남들이 한번씩 해보는 걸 나도 똑같이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게, 유행의 일부일 뿐이라는 게, 그저 준비운동을 마친 것일 뿐이라는 게,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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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마, 돈벌이의 핵심을 가르쳐 줄까? 예를 들어서 여기 만 엔이 있다고 치자. 이걸로 백 엔짜리 인스턴트 라면을 사면 9천9백 엔이 남지? 거기서부터는 순식간이야. 먼저 잔돈 9백 엔이 사라지고 그 다음엔 천 엔짜리 지폐가 한 장 두 장 사라지지. 눈 깜짝할 새에 다 써 버리고 마는 거야.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늘리려면 그 반대로 하면 돼. 만 엔을 먼저 만 백 엔으로 늘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그 다음에는 만 백 엔을 만 2백 엔으로 늘리는 거야. 이것도 별로 어렵지 않아. 이 어렵지 않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만 엔이 쉽게 2만 엔이 되지. 사람들은 대부분 멍청해서 만 엔을 갑자기 두 배로 늘리려고 하니까 실패하는 거야."
.."네 얘기를 듣다 보니 이 세상이 바보로 가득한 것 같네."
.."바로 그거야. 정말이지 놀랄 정도로 머리 나쁜 녀석들이 가득해."
..구라모치가 무척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리고 그 공백의 스크린에 어떤 광경이 비쳤다.
..할머니 시체였다. 내가 지갑을 훔치려 했을 때 할머니 눈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장례식 때 내가 할머니 시체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던 건 내 안의 할머니가 여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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