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p.
...이 년 전쯤 어쩌다 「로링 캠프의 행운」을 다시 들춰보게 됐는데 하도 펑펑 울어서 내 도버 염가 문고판이 수해를 입은 걸 볼 수 있을 거다. 생각건대, 중년이 되니 물러진 것 같구나. 그러나 또한 생각건대, 근자의 내 반응은, 인생의 시기마다 그에 딱 맞는 이야기를 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는구나. 명심해라, 마야. 우리가 스무 살 때 감동했던 것들이 마흔 살이 되어도 똑같이 감동적인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나 인생에서나 이건 진리다.

98p.
...에이제이는 분홍색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마야를 보고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뭔가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속에서 간지럽게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거나 벽이라도 쾅 치고 싶었다. 술에 취한 기분, 아니면 적어도 탄산이 들어간 기분이었다. 미치겠군. 처음엔 이런 게 행복인가 보다 했다가, 이내 이건 사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빌어먹을 사랑,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감정인가. 그것은 죽도록 술 마시고 장사를 말아먹겠다는 그의 계획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제일 짜증나는 것은, 사람이 뭔가 하나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전부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109p.
..마야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잠이 들어서 깨어나지 않는 것임을 안다. 마야는 어머니가 무척 안타깝다. 깨어나지 않는 사람은 아침에 아래층 서점에 내려갈 수 없으니까.
..마야는 어머니가 자신을 아일랜드 서점에 두고 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일정 나이가 되는 모든 애들한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아이들은 신발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장난감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샌드위치 가게에 남겨진다. 그리고 인생은 어떤 가게에 남겨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다. 마야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중에, 마야가 좀더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좀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301p.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은 이 책들 안에 있어, 그는 마야에게 말하고 싶다. 이 책들을 읽으면 내 마음을 알 거야.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그가 찾고 있는 비유에 거의 다가간 것 같다.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303~304p.
..그는 다시 시도한다. 절대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마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다."
..마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빠,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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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p.
.. 요리란 원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행위다. 여자든 남자든 아이든 누구나 그럭저럭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새 그 요리가 체력이 받쳐주고 재능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면, 뭔가가 잘못된 게 아닐까.

54p.
..뜨끈뜨끈하게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쌀알이 한 알 한 알 자기주장을 하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갓난아기 같아, 몇 번을 다시 봐도 밀려오는 감동을 억누를 길이 없다. 나는 무사히 출산을 마친 어머니처럼, 아끼는 나무 주걱으로, 아기를 안 듯, 냄비 바닥에서 밥 등을 살짝 들어올린다. 그리고 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주걱을 세워 빠르게 섞어 밥알 하나하나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준다.

134p.
..껍질과 씨. 사실 딱딱하긴 하다. 잡미와 쓴맛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건 채소와 과일 본연의 맛이 응축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드러운 부분은 흐릿하고 밋밋한 맛, 어쩌면 ‘아직 아이‘인 맛이 아닐까.

253p.
..아니, 당신은 무력하지 않다.
..요리만 할 수 있다면.
..유사시에 아주 적은 돈으로 스스로를 기분 좋게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어떤 천재지변이 닥쳐도, 파산을 하여 궁지에 내몰려도, 모두에게 버림을 받아 혼자가 되어도 앞을 향해 살아갈 수 있다.
..그 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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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p.
..하미가 왼팔을 뻗어 다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몬은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하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쓸데없이 으르렁대지 않는 것은 강한 개만의 성질이다.

143p.
..클린트—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이름을 불러 본다.
..개가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사에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개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어떻게 잊고 살았지. 개가 주는 사랑과 기쁨이 왜 떠오르지 않았지.

338p.
..사람 한 명과 동물 한 마리가 나란히 자고 있는 모습은 종교화(宗敎畵) 같기도 했다. 우치무라는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히카루와 다몬이 자는 모습을 몇 번이나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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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담당 교수 뒤에 의자도 없이 서 있던 젊은 의사가 위를 올려다보며 고개의 각도를 조금씩 계속 바꾸었다. 수정은 알아채버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이라는 걸. 작은 컵을 빙글빙글 돌려봤자 컵이 커지는 건 아니에요, 수정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40p.
..애선은 한때 자기가 얼마나 딸을 가지고 싶어했는지를 떠올렸다. 두 며느리를 생각하자 딸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자식이 넷이구나, 넷. 보살이 아니라 아수라가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식이 넷. 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건 팥밖에 없고. 팥 정도밖에 없고.

64p.
...효율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뇌였다. 적재적소에 귀신같이 배치된 사람들이 각자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런 뇌. 채원도 자신의 자리를 오래도록 탐색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다리고 찾았던 그 적소가 어쩌면 여기일지도 모른다고 최근에야 드디어 생각이 들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하중이 걸리는 자리였다. 하지만 채원은 스스로가 단단한 부품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중을, 타인의 생명이라는 무게를, 온갖 고됨과 끝없는 요구를 견딜수 있는 부품이란 걸 어떤 자기애도 없이 건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바닥 위의 티타늄 볼트를 내려다보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어려운 구석에 놓여도 기능할 수 있는 조각이니까, 제 역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태도는 언어가 아닌 형태로 채원의 머릿속 어딘가를 흐르고 있었다....

118p.
..아이는 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유학생 출신답게 호 선생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라이드‘였다고. 그 좋았던 라이드가 이제 끝나간다. 그렇다면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내가 운을 좀 나눠줄게. 악수."

251p.
...선들. 선들이 보였다. 세훈은 대학에 들어가 이상한 종교단체나 피라미드 업체에 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거절하며 희미한 선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넘기 전에는 희미하다. 넘고 나면 선이 아니라 벽이 된다. 아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꽤 힘들어진다. 살면서 그런 선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까. 넘어가게 될까.

380p.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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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 프로젝트는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주변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노력이 있다면, 치매 환자도 얼마든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치매 환자를 과소평가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점이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이해하려는 관용과 배려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소중한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도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가득 채워졌을 때는 상대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요시코 할머니는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아직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간병이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필요한 곳에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살아가고, 더 이상 그 힘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게 되면 치매가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사용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닐까요."

.."치매 환자는 평생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억제당해 온 역사 그 자체인 거지. 하지만 인간이 왜 멋진 존재인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뇌가 무너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가장 멋진 것을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그것을 지켜주는 것, 그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우리에게 스스로 선행을 한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응석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좋은 일 하는 건데 약간의 빈틈은 용서되겠지’라는 생각은 절대 안 된다. 그런 응석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타협이 생기고 질 떨어지는 요리가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껏 틀린다는 행위 또는 치매라는 병은 사회적으로 볼 때 ‘비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비용’으로 여기던 것이 돌변하여 어마어마한 ‘가치’로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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