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p.
..미니멀리즘의 본질은 어느 한 부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걷어내는 ‘강조‘에 있다.

68p.
..사람을 바꾸는 것은 의지력이 아닌 환경의 힘이다. 따라서 버리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도 먼저 환경을 바꾸는 데 100%의 힘을 쏟을 것. 그럼 행동은 환경에 맞춰서 저절로 바뀌어간다.

99~100p.
..유명한 화가 오카모토 타로 씨는 인생은 쌓고 줄이기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계속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쌓았다가 줄여가는‘ 것. 미니멀리스트의 삶이 바로 쌓고 줄이기다. 늘리고 줄이고를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필요 최소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우리는 줄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여백을 만들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계속 변화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미니멀리스트의 진면목이라 할 수있다.

107p.
..다만 버리든 사든, 왜 그 물건에 끌렸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왠지 그냥‘이란 한 마디로 끝내지 말고 원인 분석까지 세트로 해보자. 예를 들어, 옷 한 벌을 버리더라도 ‘색이 독특해서 매치해 입기 어렵다‘ ‘세일 상품이라 그닥 끌리지 않는데도 샀다‘ 식으로 버리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불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지 않는 요령을 알게 된다.

126p.
..사람이 충실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조건은 최소한으로 보장되는 의식주,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몸과 정신이다. 거기에 넘쳐날 정도의 호기심만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134p.
..‘그것이 없으면 불안하다, 초조하다‘라는 중독 상태는 본래의 나와 다른 모습인 듯하여 때론 불쾌하기까지 하다. 늘 자신답게 살고 싶다면 먼저 중독에서 벗어나자.

180p.
...최대화란 모든 선택지를 찾아서 검토한 후에 최고의 것을 얻으려는 생각이다. 반면 만족화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욕구를 채워줄 만한 최초의 것을 선택하는 방법.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삶의 방식이다.

182p.
...‘이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결코 타협이 아니며, 자신의 인생을 컨트롤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인 것이다.

185p.
..노력은 미덕이라지만, 어떤 일을 하기 전 ‘노력하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증거다. 정리도, 청소도, 노동도, 정말로 좋아한다면 절로 몸이 움직일 테니까.

185p.
..따라서 나는 귀찮은 일을 배제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좋아하는 일에만 힘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노력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나지만 유일하게 노력을 하지 않는 노력만은 하고 있다. 귀찮다고 느끼는 일이 있다면 효율화와 자동화를 꾀할 수 없는지, 혹은 아예 없앨 수 없는지를 늘 생각해 봐야 한다.

186p.
..나는 즐거운 일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므로 귀찮다는 감정에 계속 민감하게 촉을 세우며 살려고 한다. 미니멀리스트는 노력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노력하지 않는 천재‘가 될 소질을 내면에 감추고 있는 이들이다.

210p.
..자신을 모른다는 건, 깜깜한 어둠 속을 끝없이 헤매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반대로 자신을 알고 있으면 주저 없이 직진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물건에 둘러싸여, 어떤 사람과 교제하면 행복한가를 알게 된다면 불필요한 선택지를 늘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된다.

226p.
.."뭘 싫어하는가보다 뭘 좋아하는가로 자신을 말해!"
..만화 『누더기 표류 작가』에 나오는 대사다. 만화는 읽지 않았더라도 이 대사가 익숙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서로가 결점만 찾아서 상처 주는 거야. 백 마디 욕을 퍼붓는 것보다 가슴 펴고 좋아하는 것 하나 얘기하는 게 훨씬 멋져."로 이어지는 이 대사에, 예전의 나라면 격하게 공감했을 테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좋아하는 것을 표현할 거면 싫어하는 것도 표현하라가 온당한 자세라고 생각하며, 좋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세계는 따분하다고 생각한다.

231p.
..‘인류는 모두 형제이니 이야기하면 이해할 터‘라는 생각이 훨씬 더 폭력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해해줄 것이란 기대가 있을 경우, 그 기대가 배신당했을 때 분노의 화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240p.
...그래서 나는 싫어하는 부분마저도 용서가 되는 사람과 교제하고 싶다. 예컨대 입은 거칠어도 이야기의 내용이 존경스러워서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일수록 더욱 소중하니까. 물론 나에게 교제할 만한 가치가 없다면 상대가 먼저 관계를 끊어도 상관없다. 나도 남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이익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242p.
..‘인간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많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의존할 곳을 늘리되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의존도를 낮추면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바로 이 상태가 자립이다.‘

244p.
..그리고 이것은 인간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수입원, 가진 기술, 마음 둘 곳처럼 ‘형태 없는 것‘은 늘리면 늘릴수록 다양한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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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가책〉 청년(그가 짐작하기에는 조이스를 너무 좋아하는, 모든 문제를 문학적으로만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 같았다)

41 Agenbite of inwit. 중세 켄트 지역 방언으로 번역된 기독교 책자의 제목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제임스 조이스가 소설 『율리시스』에서 자주 썼다.

45 Nobodaddy. 원래 〈신〉을 가리키던 고어였으나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의 시 「To Nobodaddy」에서 〈nobody〉와 〈daddy〉를 합친 단어처럼 사용했다.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을 통합하는 일, 그게 퍼거슨이 하려는 일이었다. 가장 헌신적인 현실주의자처럼 세상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동시에 다른 시각으로, 조금은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 일. 익숙한 것만 파고드는 책들은 필연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가르쳐 줬고, 낯선 것만 파고드는 책들은 알 필요가 없는 것들만 가르쳐 줬다. 퍼거슨이 무엇보다 원했던 건 감각적인 대상과 무기력한 사물만 있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보이는 것 뒤에 숨은 거대하고 신비한, 보이지 않는 힘까지도 담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일이었다.... - P-1

...그런 산문을 읽을 때의 짜릿함은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소로가 얼마나 크게 걸음을 옮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왔는데 ─ 어떤 때는 몇 센티미터에 불과했고, 어떤 때는 몇 미터나 몇 킬로미터, 또 어떤 때는 대단히 먼 거리였다 ─ 그런 불규칙한 거리감이 주는 불안정한 느낌에서 퍼거슨은 자신의 글쓰기를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소로가 했던 작업은 자신이 쓴 모든 문단에서 반대되는 두 가지,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충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었는데, 퍼거슨은 그 두 충동을 각각 통제하려는 충동과 위험을 무릅쓰려는 충동이라고 불렀다.... - P-1

...그게 그 집안의 분위기였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부터는 각자의 방식대로 살면 되고, 신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영원히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 P-1

..그녀는 칠판에 늘 같은 문구를 적어 뒀는데, 미국 시인 케네스 렉스로스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로,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도 볼 수 있게 큰 글씨로 쓰여 있었다. 퍼거슨은 수업 중에 자주 그 문구를 쳐다봤고, 나중에 계산해 보니 그녀의 수업을 듣는 동안 그 문장을 수천 번은 되뇌었던 것 같았다. 〈세상의 폐허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책은 창조적 활동이다〉라는 그 문장을. - P-1

..전례 없이 균형 잡히고 내적으로 충만한 시기였다. 지금 케이크를 먹고 있는데 남은 케이크도 잔뜩 있는 것 같았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 정도로 행복했던 적은 없을 것 같았다. 『지상의 삶의 기록』이라는 책이 있다면, 퍼거슨은 자신이 그 책의 저자에게 무슨 속임수를 썼고, 그래서 그 저자가 그해를 기록했어야 할 면을 너무 빨리 넘겨 버린 나머지 몇 달이 백지로 남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 P-1

..오디세우스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노인의 변신에 벼락을 맞은 듯 놀란 텔레마코스는 그가 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꺼낸다. 〈신이 아니다. 왜 나를 신이라 생각하느냐? 아니, 아니야. / 나는 너의 어린 시절에 함께 있지 못했던 아버지다. / 아버지가 없어서 힘들었겠지. 내가 그 사람이다.〉
..그게 첫 번째 공격, 퍼거슨의 갈비뼈와 아랫배 사이 뼈가 없는 부분을 파고들어 오는 칼끝 같은 문장이었다. 오디세우스의 그 짧은 대답이 그에게는 다음의 문장과 똑같은 효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날이 추울 것 같구나, 아치. 학교 갈 때 목도리 꼭 챙겨 가. - P-1

..6개월 동안 자신에 관한 글을 쓴 결과로 나온 157페이지짜리 그 책 덕분에 퍼거슨은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좀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그 감정에 거리를 두고 거의 거기서 떨어져 나와 무관심해질 수 있었는데, 마치 그 책을 쓰는 동안 모순되게도 자신이 더 따뜻하면서 동시에 더 냉정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따뜻해진 건 안에 있던 걸 꺼내 세상에 보여 줬기 때문이었고, 냉정해진 건 그렇게 안에 있던 걸 마치 다른 사람, 낯선 사람, 익명의 누군가에게 속한 것처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

...그리고 다시 한번 퍼거슨은 오래된 주먹질-키스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참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무언가는 그저 존재할 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 무언가의 운명은 누군가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하나의 무언가가 있고 여러 명의 누군가가 있는 거라면,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는 건, 비록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누군가에게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그건 책이나 80층짜리 건물의 설계같이 큰 문제뿐 아니라, 아무런 악의가 없는 바보 같은 농담 목록처럼 작은 일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 P-1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자라서 성인 남성이 될 것이며 그때까지는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소년으로서의 자의식이 생긴 이후로, 그는 또한 자신이 아버지가 되리라고, 결국 어린 퍼거슨들을 낳고 그들이 다시 자라 성인 남성 혹은 성인 여성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일몽 속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미래 모습은 그랬고,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어린 사람이 자라 성인이 되고, 그들이 다시 더 많은 어린 사람을 세상에 낳는 것, 그럴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모두들 그렇게 한다는 것. 심지어 지금도, 염세적인 열아홉 살 철학자이자 오래된 책들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런 미래 모습만은 계속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 P-1

...하지만 그의 안에서는, 퍼거슨이 홀로 자신의 의식을 대면하는 깊숙한 정신의 방에서는, 한 가지가 크게 달라졌다. 웨스트 110번가와 브로드웨이의 모퉁이에 있는 퍼스트 내셔널 시티 은행의 그의 계좌에는 2만 달러가 버티고 있고, 그게 거기 있다는 사실이, 딱히 그 돈을 쓸 생각이 없었음에도, 하루에 740번씩 돈 걱정을 해야만 하는 고충을 덜어 줬다. 결국 그런 고충 자체가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만큼이나 해로운 것,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축복이었다. 그게 돈이 없는 상황에 비해 돈이 있는 상황이 갖는 이점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돈으로 뭘 살 수 있다는 점이 아니라, 머릿속에 거품처럼 일어나는 끔찍한 생각들을 담은 채 이리저리 배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말이다. - P-1

...전쟁이 커지면 커질수록 동심원 안의 다른 원들을 짓눌렀고, 원들이 압착되며 그것들 사이의 공간은 아주 적은 공기만 통할 정도로 좁아졌고, 한가운데 있는 외로운 존재는 점점 더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사람은 숨 쉬기가 힘들어지면 공황에 빠지는데, 공황은 광기에 가까운 무엇, 정신을 잃어버리고 곧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1968년 초, 퍼거슨은 모두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느낌, 모두가 브로드웨이에서 큰 소리로 혼잣말하는 사람들처럼 미쳐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조금씩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쳐 가는 것 같았다. - P-1

...자신들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 앉은 퍼거슨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미는 본능적으로 등을 벽 쪽으로 두고, 그러니까 식당의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고, 퍼거슨 역시 본능적으로, 그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오직 에이미만, 에이미와 벽만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이 그는 신경 쓰였다. 그게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난 4년 8개월 동안 늘 그런 모습이었다고, 에이미는 늘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고, 자신은 오직 에이미만 바라봤다고. - P-1

..허전하다. 그 말이 정확할 것 같다고, 그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비비언이 자기 책을 마친 후에 느낀 감정을 묘사하며 말한 허전한 공간과 같았다. 가구 없는 방에 홀로 서 있다는 의미에서의 허전함이 아니라 ─ 속이 텅 비워진 것 같은 느낌의 허전함이었다. 그래, 그거였다. 아기를 낳은 후 여성이 느낄 법한 비워진 느낌. 하지만 이 경우는 사산이었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절대 달라지거나, 자라거나, 걷는 법을 배울 수가 없었다. 책이란 그걸 쓰는 동안 내 안에서만 살아 있을 뿐, 일단 밖으로 나오고 나면 할 일을 다하고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 P-1

...그의 안에 여러 자아가, 심지어 많은 자아가 있었다. 강인한 자아와 연약한 자아, 생각이 깊은 자아와 충동적인 자아, 너그러운 자아와 이기적인 자아 등, 자아가 너무 많아서 그는 그 모든 자아를 합친 것만큼 큰 사람이거나, 그중 어떤 것도 아닌 작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에게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실일 테고, 그건 곧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모든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 P-1

..〈주홍색 노트〉는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았다. 퍼거슨이 시도했던 작업들 중에 단연 가장 도전적인 글이었고, 그는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 깊이 의심스러웠다. 책에 관한 책, 독자가 읽으면서 동시에 써나가는 책, 마치 3차원의 물리적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책, 세상에 관한 책이면서 한편으로는 정신에 관한 책, 수수께끼이자, 아름다움과 위험으로 가득한 위태로운 풍경이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가상의 저자 F.가 자신의 가장 어두운 면모를 마주하게 되는 책. 꿈 같은 책이었다. F.의 면전에 펼쳐지는 즉각적인 현실에 관한 책, 절대 쓰일 수 없는, 분명 아무 관련이 없는 무작위의 파편들만 혼란스럽게 펼쳐지는, 무의미한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불가능한 책이 될 것이었다. 왜 그런 시도를 하는 걸까? 왜 다른 작가들처럼 그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지 않는 걸까? 왜냐하면 퍼거슨은 이제 그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퍼거슨은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에 맞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자신이 그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P-1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라. 길게 보면 우리 관계가 계속 유지될 건 아니었으니까. 짧게 보면, 우리는 뭔가를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우리 둘에게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밤 머저리 하나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협박한 거야. 우리는 우리가 하려는 말을 분명히 전했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일에 본인들의 삶을 바치는 사람들을 자신 역시 노려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삶이란 그 정도로 힘든 거고, 나는 지쳐 버렸어, 아치. 쥐고 있던 밧줄의 끝자락에 닿은 것 같아. - P-1

...금요일 오후에서 일요일 밤까지의 2.5일, 통상 주말이라고 불리는 그 시간은 프랑스나 미국 같은 산업 사회, 혹은 후기 산업 사회에서 일주일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그건 매일 일고여덟 시간씩 잔다고 가정했을 때 개인이 일생에서 잠을 자는 시간과 같은 비율이었다. 즉 개인이 꿈을 꾸는 시간이, 그들이 사는 사회가 꿈을 꾸는 시간과 나란히 가고 있었는데, 무정부주의적이고, 자동차 사고와 야만적인 섹스가 등장하고, 피가 튀기는 고다르의 그 영화는 대중의 악몽과 다름없었다. 바로 그 점이 지금의 퍼거슨에게는 깊은 울림을 줬다. - P-1

..저는 아버지가 먼저 연락해 오기를 기다렸고, 아버지는 제가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린 거죠. 어느 한쪽이 움직이기 전에, 시간이 다 되어 버린 거예요. - P-1

..그는 여전히 열네 살 때 상상했던 두 개의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었고, 래즐로 플루트와 함께 세 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며, 그러는 내내,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그런 갈림길을, 선택받은 길과 선택받지 못한 길들을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걷고 있다는 그 평행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그림자 같은 사람들, 지금 이대로의 세상은 진짜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느낌,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길은 그 어떤 다른 길들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단 하나의 몸 안에 살아 있는 것의 고통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단 하나의 길 위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길을 선택하고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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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p.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혼자 사는 중년 여성 본연의 자세라고 마음 깊이 수긍했다.

154p.
..‘시간이 아깝다‘는 말은 사실이며, 만드는 즐거움은 시간을 소비한다. 거기서 만족감이 생기는데, 그걸 부정한다면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손수 만드는 것이 좋다고 해도, 현실을 생각하면 손수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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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p.
..남자라는 인간은 육체적 관계와 경험이 풍부해지면, 허세를 부리지 않고, 여자를 차분하게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침착해 보인다.

43p.
..결국, 나는 ‘어쩐지, 기분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런 퇴폐적이고 주체성 없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간다고 꽤 한심하다고 말할 어른들도 있겠지만, 신세대라는 혹은 신세대로 태어난 나는 ‘내 기분‘이 내 행동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84p.
..브랜드에 약한 거야: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마네킹이고, 내용은 공허하다.‘라고 하는 ‘문예지‘ 평론가라고 해도, 학력이나 직함이라고 하는 브랜드에는 구애받는 게 인간입니다. ‘이 소설에는 생활이 없다‘라는 ‘문예‘ 기자라고해도, 신문사의 배치라고 하는 브랜드를 떼버린다면 평범한 인간인 것입니다.

127~129p.
.."크리스탈이란 말이지...... 지금 생각해봤는데 우리들의 청춘이란 뭘까. 연애란 뭐지...... 이따위 것들. 철학을 생각하는 소년처럼 생각해본 적이 내겐 없어. 책도 그다지 많이 읽지 않고. 바보처럼 한 가지 일에 열중하게 되는 일도 없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렇다고 머리속이 텅텅 빈 것도 아니고, 흐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도 아니고, 암울한 느낌은 물론 아니고.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여과없이, 수용할 정도로 단순한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게 말하곤 담배불을 껐다.
.."차갑다라는 느낌이 아닐까. 제대로 딱부러지게 말할순 없지만, 역시 크리스탈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191p.
.."저, 두 커플이 차에 탔을 때 남자끼리 앉는다든지, 커플끼리 앉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아."
..준이치가 말하길 원래 커플이 전후로 교차하여 앉는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차를 타는 방법이라 한다.
..준이치는 이러한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알고 있어도, 알고 있지 않아도 될 법한 것이라면 정말로 상세하게 알고 있다. 그런 딜레탕트(dilettante)한 점이 가정교육을 잘 받은 걸 느끼게 하고...... 아무튼 그런 점들이 내가 좋아하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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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p.
소유욕은 중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지구가 우리를 붙잡아두려 하는 마음처럼

85p.
그애에게
가는 순간
그 허둥지둥한 때에

버스나 지하철이 정거장이라면서
차곡차곡 지켜 서는 것을
문득문득 참아서지 못해
택시를 타고 만다

121p.
강가엔
고전 건축물들이 주르르 서 있다

건강하게 세월을 참아내어
이 건축물로부터 멀기만한 나라와
멀기만한 시대에서 온 나를 반겨주며

지난 역사를 모두 믿게 한다

149p.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프삭프삭 웃으며

나의 친구, 나의 일, 사랑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
다시 잘 보고 풀어내야지
새로 살 것 없어

스물다섯 살 쪽으로 출렁출렁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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