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p.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혼자 사는 중년 여성 본연의 자세라고 마음 깊이 수긍했다.

154p.
..‘시간이 아깝다‘는 말은 사실이며, 만드는 즐거움은 시간을 소비한다. 거기서 만족감이 생기는데, 그걸 부정한다면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손수 만드는 것이 좋다고 해도, 현실을 생각하면 손수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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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p.
..남자라는 인간은 육체적 관계와 경험이 풍부해지면, 허세를 부리지 않고, 여자를 차분하게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침착해 보인다.

43p.
..결국, 나는 ‘어쩐지, 기분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런 퇴폐적이고 주체성 없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간다고 꽤 한심하다고 말할 어른들도 있겠지만, 신세대라는 혹은 신세대로 태어난 나는 ‘내 기분‘이 내 행동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84p.
..브랜드에 약한 거야: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마네킹이고, 내용은 공허하다.‘라고 하는 ‘문예지‘ 평론가라고 해도, 학력이나 직함이라고 하는 브랜드에는 구애받는 게 인간입니다. ‘이 소설에는 생활이 없다‘라는 ‘문예‘ 기자라고해도, 신문사의 배치라고 하는 브랜드를 떼버린다면 평범한 인간인 것입니다.

127~129p.
.."크리스탈이란 말이지...... 지금 생각해봤는데 우리들의 청춘이란 뭘까. 연애란 뭐지...... 이따위 것들. 철학을 생각하는 소년처럼 생각해본 적이 내겐 없어. 책도 그다지 많이 읽지 않고. 바보처럼 한 가지 일에 열중하게 되는 일도 없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렇다고 머리속이 텅텅 빈 것도 아니고, 흐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도 아니고, 암울한 느낌은 물론 아니고.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여과없이, 수용할 정도로 단순한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게 말하곤 담배불을 껐다.
.."차갑다라는 느낌이 아닐까. 제대로 딱부러지게 말할순 없지만, 역시 크리스탈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191p.
.."저, 두 커플이 차에 탔을 때 남자끼리 앉는다든지, 커플끼리 앉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아."
..준이치가 말하길 원래 커플이 전후로 교차하여 앉는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차를 타는 방법이라 한다.
..준이치는 이러한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알고 있어도, 알고 있지 않아도 될 법한 것이라면 정말로 상세하게 알고 있다. 그런 딜레탕트(dilettante)한 점이 가정교육을 잘 받은 걸 느끼게 하고...... 아무튼 그런 점들이 내가 좋아하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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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p.
소유욕은 중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지구가 우리를 붙잡아두려 하는 마음처럼

85p.
그애에게
가는 순간
그 허둥지둥한 때에

버스나 지하철이 정거장이라면서
차곡차곡 지켜 서는 것을
문득문득 참아서지 못해
택시를 타고 만다

121p.
강가엔
고전 건축물들이 주르르 서 있다

건강하게 세월을 참아내어
이 건축물로부터 멀기만한 나라와
멀기만한 시대에서 온 나를 반겨주며

지난 역사를 모두 믿게 한다

149p.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프삭프삭 웃으며

나의 친구, 나의 일, 사랑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
다시 잘 보고 풀어내야지
새로 살 것 없어

스물다섯 살 쪽으로 출렁출렁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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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p.
.."임계점에 도달한 가장 큰 이유는 극대화된 연결성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 전 세계는 국경 없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고, 하늘 아래 무엇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면 피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인류는 그 어떤 시대보다 새로운 것을 단기간에 쏟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임계점에 도달한 겁니다. 이제 인류가 무엇을 만들어도 그것은 모방과 변주에 불과합니다."

106p.
.."그래서 노인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부자로 산 인생이나 가난하게 산 인생이나, 후회되거나 만족하거나, 외롭든 풍요롭든, 어떤 인생이었든 간에 그게 헛되지 않았음을 아니까 말입니다. 이 우주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몇 달 뒤 하나의 몫을 할 거란 사실을 말입니다."

190p.
.."오늘 제 이야기는 정말 궤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이 사회에는 이보다 더한 궤변들이 사실인 양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린 무엇이 궤변이고 무엇이 사실인지도 모르는, 성공한 궤변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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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p.
..그 새벽 이래로 나는 삶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았다. 내게 희망이란, 실체 없이 의미만 수십 개인 사기꾼의 언어가 되었다. 절망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지기, 여섯 시간이면 약효가 사라지는 타이레놀,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고 싶은 자기충족적 계시, 그 밖에 자기기만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

97p.
..그때 나는 승주가 ‘꽃다운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사람 구실 못한다고 화를 내느라, 앵무새한테도 주어지는 저 따뜻한 연민을 품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 역시 꽃다웠던 적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320p.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 그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 도착한 것 뿐이야."

375~376p.
..어떤 계획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으리라 믿는 쪽을 택했다. 그럴싸하지 않을 경우 내게 들이닥칠 갈등을 미연에 봉쇄하는 차원에서, 알아봐야 내가 도울 것이 없으리라는 비겁한 심사에서, 더 캐물어봐야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으리라는 편의적 예측에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에서 나는 그렇게 했다.

381p.
..어떤 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매 순간 이것은 허상이라는 자의식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만들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고통을 상기시키는 촉매이기도 했다. 그 고통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내가 떠나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388p.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그간 만나온 의뢰인들 역시 그랬다. 문제를 잊고자 하는 이들은 대개 롤라 극장으로 뛰어든다. 자기 인생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자는 드림시어터를 택한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의 삶과 비슷하게 살다가 비슷한 문제를 안고 롤라로 돌아온다. 최소한 내가 설계하는 드림시어터에선 그렇다. 나는 내 운명이 나 자신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 자체라고 믿는다. 이 신념이 내가 설계한 운명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488p.
..내 삶에서 미래라는 유니콘은 없애버렸다. 직장에 나가고, 자전거로 도로와 산악을 달리고, 장미 정원을 만들면서 생존 기계처럼 살았다. 그것이 상습적으로 불운한 한 인간이 사납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519p.
..나는 경주를 오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의식이라는 외피에 가려진 ‘무엇‘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는지 기억했다면, 가슴에 칼이 박히는 찰나에 기어코 상대의 눈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걸 기억했다면 나는 사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본성에 웅크리고 있는 ‘무엇‘이 무엇인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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