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p. ..그 새벽 이래로 나는 삶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았다. 내게 희망이란, 실체 없이 의미만 수십 개인 사기꾼의 언어가 되었다. 절망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지기, 여섯 시간이면 약효가 사라지는 타이레놀,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고 싶은 자기충족적 계시, 그 밖에 자기기만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
97p. ..그때 나는 승주가 ‘꽃다운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사람 구실 못한다고 화를 내느라, 앵무새한테도 주어지는 저 따뜻한 연민을 품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 역시 꽃다웠던 적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320p.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 그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 도착한 것 뿐이야."
375~376p. ..어떤 계획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으리라 믿는 쪽을 택했다. 그럴싸하지 않을 경우 내게 들이닥칠 갈등을 미연에 봉쇄하는 차원에서, 알아봐야 내가 도울 것이 없으리라는 비겁한 심사에서, 더 캐물어봐야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으리라는 편의적 예측에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에서 나는 그렇게 했다.
381p. ..어떤 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매 순간 이것은 허상이라는 자의식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만들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고통을 상기시키는 촉매이기도 했다. 그 고통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내가 떠나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388p.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그간 만나온 의뢰인들 역시 그랬다. 문제를 잊고자 하는 이들은 대개 롤라 극장으로 뛰어든다. 자기 인생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자는 드림시어터를 택한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의 삶과 비슷하게 살다가 비슷한 문제를 안고 롤라로 돌아온다. 최소한 내가 설계하는 드림시어터에선 그렇다. 나는 내 운명이 나 자신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 자체라고 믿는다. 이 신념이 내가 설계한 운명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488p. ..내 삶에서 미래라는 유니콘은 없애버렸다. 직장에 나가고, 자전거로 도로와 산악을 달리고, 장미 정원을 만들면서 생존 기계처럼 살았다. 그것이 상습적으로 불운한 한 인간이 사납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519p. ..나는 경주를 오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의식이라는 외피에 가려진 ‘무엇‘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는지 기억했다면, 가슴에 칼이 박히는 찰나에 기어코 상대의 눈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걸 기억했다면 나는 사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본성에 웅크리고 있는 ‘무엇‘이 무엇인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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