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사상. 너는 모를 것이다. 재에서 잿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무엇이든 타면 재가 남는다. 모두들 재가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끝장이라고 생각한 재에서 만든 잿물로써 인간이 입는 옷의 때. 아닌 인간의 때를 씻는 것이다. 어떻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사상엔 구원이 있다. - P-1
...형의 학문은 부모가 기대하는 입신과 출세와는 너무나 먼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판사나 검사 또는 어떤 관리가 될 수 있는 그러한 학문이 아니었다. 의사나 교사나 기술자가 될 수 있는 그러한 학문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그저 아무런 뚜렷한 방향도 없는 책읽기 같았다. 세속적인 눈으로서 보면 스스로의 묘혈(墓穴) 을 파는 것 같은 학문. 스스로의 불행을 보다 민감하게, 보다 심각하게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 같은 학문. 말하자면 자학(自虐) 의 수단으로서밖엔 볼 수 없는 학문인 것 같았다.... - P-1
..교양인. 또는 지식인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두 개의 자기로 분화된다. 하나는 그 난관에 부딪쳐 고통을 느끼는 자기. 또 하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기를 지켜 보고 그러한 자기를 스스로 위무(慰撫) 하고 격려하는 자기로 분화된다. 그러니 웬만한 고통쯤은 스스로를 위무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면서 견디어 낸다. 그런데 한편 무식한 사람에겐 고난을 당하는 자기만 있을 뿐이지 그러한 자기를 위무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는 자기가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식인은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을 두 사람이 나누어 견디는 셈인데 무식자는 모든 고통을 혼자서 견디어야 하는 셈이다. 지식인이 난관을 견디어 나가는 정도가 무식자보다 낫다는 사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없을까. - P-1
...섹스만이 목적이 되고 문화의 본질이 되어 있는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사랑의 거대한 압착기(壓搾機) 다. 이 압착기를 빠져 나온 사람은 거의 병자가 되거나 은사가 되거나 예언자가 된다.... - P-1
..사실(寫實) 이상의 사실(寫實) , 상상 이상의 상징, 게르니카를 비롯한 인간악적(人間惡的) 사건 전체에 통하는 심오한 의미가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요는 이렇게 분노를 성형화(成型化) 시킨 강한 에스프리. 색채를 가지고 언어 이상의 내용을 말하려는 에스프리. 그림에서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죠. 빛과 형(形) 자체가 의미고 목적인데 의미를 갖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 P-1
..‘존재’란 이 금지 규정에 의해서 비로소 성립된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먹어선 안 된다’는 건 ‘먹어야 산다’는 절실한 경우에서만 있을 수 있는 금지 규정이다. 우리는 ‘먹어선 안 되는’만 가지 물건 속에서 먹으며 산다. 우리는 ‘해선 안 된다’는 사상(事象) 속에서 무슨 짓이든 하고 산다. ‘안 된다’는 규정을 수록한 목록의 틈서리에 ‘된다’는 여유를 개척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인류가 스스로의 생의 바탕에 이 금지 규정을 자각하기까지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어야 했던가. - P-1
..흔히, 절대적 진리란 없고 상대적 진리밖엔 없다는 말을 듣는다. 역사라고 하는 불사(不死) 의 눈으로서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일반론을 통하면 그런 귀결이 나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불사가 아니라 제한된 생명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시간과 역사적 시간은 다르다. ..인간은 절대적인 삶을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절대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해서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의 눈을 빌려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관찰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그 길도 가고 이 길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까 짐을 지고 산을 기어오르는 사람의 자유를 나의 비자유 속에 흡수시키는 이념의 조작(操作) 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자유는 나의 비자유를 흡수시키지 못한다. - P-1
...난 과학이란 말만 들으면 진절머리가 나. 한편에선 의학이니 뭐니 해 가지고 사람의 병을 치료한다지만, 한편에선 이런 대량 학살에 과학이 쓰이는 판이니, 과학이란 도대체 뭔가 말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지. 사람 살리는 방법은 소매적(小賣的) 인 것밖엔 발명되지 못했는데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도매적(都賣的) 이라고. - P-1
..이렇게 가로 세로 꽂힌 쇠창살과 함께 열 두 칸의 유리창이 겹쳐. 누워서 보면 어린이가 서툴게 그려 놓은 그래프 바닥처럼 보인다. 이 그래프에 좌표처럼 해가 걸리고 달이 걸리고 별이 걸린다. 생각하니 우리는 해를 가두고 달을 가두고 별을 가두어 놓고 살아 있는 셈이다. 얼마나 오만한 황제냐. 내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달과 별을 내가 가두어 놓고 사는 것이니 말이다. - P-1
..꽃 피는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엄마를 부르던 아이가 커서 옥중에 앉아 사형을 기다리고 있다. - P-1
..겁나는 것은 무질서보다도 전도된 질서다. 전도된 질서의 표본이 나치적 질서가 아닌가.... - P-1
...견디는 현재는 지루한데 지나 버린 시간이 빨라 뵈는 것은 내용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 P-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