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p.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집에 전화를 걸어 찾는 사람이 출타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중요한 용무인 양 들어오는 대로 전화해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면 그 용무란 것은 전화를 받은 사람보다 전화한 사람에게 더 중요한 일이기 마련이다.... - P-1
140p. ...알다시피 아름다움은 어설픈 유머의 행진을 기껍게 바라보지 않는다. 앨로이 키어는 내게 드리필드의 이야기를 하면서 흠결이 있다 해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아름다움이 흠결을 만회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우리의 대화를 돌이켜 보니 가장 거슬린 것은 바로 그 말이었던 듯하다. - P-1
141p.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름다움을 숙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 키츠가 쓴 시 「엔디미온」의 첫 구절을 보면 키츠보다 더한 거짓말을 한 시인은 없을 듯하다. 아름다운 것이 마법 같은 감성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내 마음은 즉시 방황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어떤 풍광이나 그림을 몇 시간씩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황홀감이고 배고픔만큼이나 단순하다. 이러쿵저러쿵 떠들 만한 거리가 아닌 것이다. 장미 향기와 같아서 한번 냄새를 맡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것이 예술 비평이 지루한 이유다.... - P-1
143~144p. ...그럴 만도 한 것이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 P-1
172p. .."사람들 참 재밌지 뭐예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여기 들였던 모든 신사 양반들을 생각하면 참. 내가 그 사람들에 대해 아는 걸 몇 가지만 이야기해도 선생님은 믿지 못할걸요. 누가 누구보다 더 이상한가의 문제죠. 가끔은 잠자리에 누워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터져요. 이 각박한 세상에 가끔 실컷 웃기라도 해야지요. 하여튼 하숙인들은 참 희한하답니다." - P-1
190p. ...그녀는 그를 버렸지만 뜨거운 벽돌이나 뜨거운 감자를 떨어뜨리듯 버리지는 않았다. 한없이 온화했고, 본성을 거스르는 일을 하기로 결심할 때마다 틀림없이 흘릴 눈물처럼 부드러웠다. 그녀가 워낙 요령껏 교묘히 버렸기 때문에 재스퍼 기번스는 버려진 줄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를 욕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예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조금 서글프게 미소를 짓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결정타였고, 그녀의 한숨은 그를 깊숙이 파묻어 버렸다. - P-1
199p. .."로지는 그리기가 아주 까다로워." 힐리어는 그녀와 그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보다시피 얼굴도 머리도 온통 금빛인데 인상은 금빛이 아니라 은빛이 돌거든." ..나는 그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태양이라기보다 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태양이라고 해도 하얀 새벽안개에 싸인 태양 같았다.... - P-1
211p.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의 복잡성과 변덕, 부조리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중년이나 노년의 작가들이 더 진중한 주제로 생각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가상 인물의 사소한 관심사에 몰두하는 유일한 변명이 되곤 한다. ‘인류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인간을 연구하는 것‘이 맞다면 현실의 불합리하고 모호한 인물보다는 일관되고 견고하며 의미가 있는 가공인물에 전념하는 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가끔 소설가는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고 작중 인물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하려 들 때가 있지만, 반면에 작중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만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의식하기 마련이니 작가가 경험으로 체득한 것 이상은 쓰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일인칭 시점은 이 제한된 목적에 한해 대단히 유용하다. - P-1
269p. .."자네는 나만큼 미국을 잘 알지 못할 거야." 그가 말했다. "그들은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생쥐를 더 좋아해. 그것도 내가 미국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일세."
295p. ...하지만 작가는 한 가지 보상을 얻는다. 뭔가 마음에 맺힌 것이 있다면 괴로운 기억, 친구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슬픔, 짝사랑, 상처받은 자존심, 배은망덕한 인간에 대한 분노, 어떤 감정이든, 어떤 번뇌든 그저 글로 풀어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걸 소설의 주제로, 수필의 소재로 활용하면 모든걸 잊을 수 있다. 작가는 유일한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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