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p.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그와 달리 걷기는 눈의 활동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아니 길이 거기에 있기에 걷는다.... - P-1

32~33p.
..걷기는 집의 반대다.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다. 우연히 내딛는 걸음걸음이 인간을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 P-1

33p.
...사실 걷는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다가 거처를 정한다. 저녁에 멈추는 발걸음, 밤의 휴식, 그리고 식사는 매일같이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체험적 시간 속에 새겨놓는다. 걷는 사람은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하므로 시간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숱한 여러가지 다른 수단들을 다 버리고 바로 이런 이동수단을 택함으로써 그는 달력의 시간과 맞서서 자신의 양보할 수 없는 권능을, 사회적 리듬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앞세운다.... - P-1

45p.
...감각기관을 통한 여러 가지 지각들에서 반복적 습관을 닦아내버리면 지각은 세계의 새로운 사용법을 고안해낸다.... - P-1

49p.
..짐은 인간을 말해준다. 짐은 물질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인간의 분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공정한 관찰자는 짐을 보고 그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장에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짐은 어떤 심리학과 동시에 어떤 사회학을 구체화하여 보여준다. 그렇지만 훌륭한 용품도 두 다리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충분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로돌프 퇴퍼는 그의 아름다운 저서 『지그재그 여행』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꼬집어 말해준다. ‘여행을 할 때는 배낭 이외에 활기, 쾌활함, 용기, 그리고 즐거운 마음을 충분히 비축해 가지고 떠나는 것이 매우 좋다.‘ - P-1

73p.
...그러니까 침묵은 기술 이전의 어떤 경험, 모터도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는 어떤 세계, 즉 다른 시간의 고고학적 유적을 가리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P-1

90p.
..걷는 경험은 자아를 중심으로부터 외곽으로 분산시켜 세계를 복원시키며 인간을 그의 한계 속에 놓고 인식하게 만든다. 그 한계야말로 인간에게 자신의 연약함과 동시에 그가 지닌 힘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걷는 경험은 가장 전형적인 인류학적 활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세계라는 교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인식 파악하고 타자들과 맺는 유대의 바탕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항상 고심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P-1

91p.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 P-1

93p.
..보다 친근한 교통수단을 활용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일종의 단절상태, 그 단절상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외진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도보여행은 단순히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나 익숙한 세계를 벗어난 낯설음의 훈련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들을 떨쳐버리고 막연한 상태로나마 어떤 격앙상태를 경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 격앙상태는 길을 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피곤 때문에 더욱 가열된다. 걷기는 때로 어떤 행동 속의 몰아지경인 황홀과 비슷하다. 이는 마치 자신의 밖에 있는 과녁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녁과 하나가 되기에 더욱 민첩해지는 참선의 궁수(弓手)가 맛보는 세계 같은 것이다. 여러 가지 감각들로부터 관습적 상투적인 몫을 제거해버림으로써 걷기는 세계에 던지는 시선의 진정한 변신이 가능하도록 준비해 준다. - P-1

98p.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여행자가 왜 그토록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보여행자는 아직 어느 것 하나 그 정확한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삶의 차원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 차원 속에서 그가 더듬어가는 장소들은 한결같이 미지의 장소들이며 마치 미완성 상태에있는 것만 같은 장소들이다. 이름은 공간의 세계 내적 자리매김이며 개인적 지리학의 고안 혹은 육체의 척도에 적용한 지리학이다. 길을 걷는 사람이 지금 자신이 와 있는 나라나 지방의 이름을 몰라 남에게 물어볼 정도로 부주의한 경우란 거의 없다.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길을 가면서 차례로 만나게 되거나 눈앞에 나타나는 국지적 장소들의 이름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이름들이 꿈속에서 본 이국적 꽃이 되고 그 이름을 들으면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 P-1

108p.
...동방의 전통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장소를 만났을 때 만난 이의 근원에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감 혹은 아우라를 그 사람이나 장소의 다르샤나(darshana)라고 부른다. - P-1

145p.
...자동차를 숭상하는 문화가 도처에 만연하여 걷는 사람들이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산책, 뜻밖의 일, 발견을 위하여 개방된 불확정의 공간들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 P-1

183p.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다시 음미해 보면서 그 퇴락한 회교사원 안으로 들어갔던 때의 느낌을 이렇게 기억한다. ‘지난날에는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던 그곳을 지금은 그저 한번 둘러보려는 것뿐인 사람의 입장에서 거닐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문득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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