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p. «장엄한 매질»
...그러다 그 눈빛이 사라지며 다른 것이 차오른다. 옹달샘에서 낙엽을 치우면 물이 차오르듯이. 아버지의 눈에 혐오와 쾌락이 차오른다. 로즈는 그것을 보고 알아차린다. 분노가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뿐일까? 그녀는 아버지의 눈에 분노가 차오른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혐오가 맞다. 쾌락이 맞다. 아버지의 얼굴이 풀어지고 변하고 점점 젊어진다.... - P-1

37p. «장엄한 매질»
..이때 이후로 로즈는 살인과 살인자에 대한 궁금증을 품었다. 끝장을 봐야 하는 이유는 결국 부분적으로는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인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고, 가장 무시무시한 허튼짓도 정당화될 수 있고 그 행위에 어울리는 감정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관객에게—교훈을 깨닫더라도 깨달음을 표시할 수도 없을 상대에게—증명하기 위해서일까? - P-1

39p. «장엄한 매질»
...이런 상태에서는 사건과 가능성들이 멋진 단순성을 띠게 된다. 선택은 자비로울 만큼 명백하다. 어물쩍 얼버무리는 말은 전혀, 조건을 붙이는 말은 거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결코‘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확고한 권리를 얻는다. 그들과 결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증오가 담기지 않은 눈길로는 결코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벌할 것이고 끝장내버릴 것이다. 이러한 결의와 온몸의 통증에 감싸인 채로 그녀는 자기 자신도, 책임도 초월하는 묘한 편안함 속에 둥실 떠 있다. - P-1

57p. «특권»
...시간이 흘러 로즈는 책이나 영화에서 백치의 성녀 같은 인물이 나오면 프래니를 떠올렸다. 책이나 영화를 만드는 남자들은 그런 인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듯하지만, 로즈가 보기에 그들은 인물을 너무 깔끔하게 그려놓았다. 숨소리와 침과 치아를 다 생략하는 건 사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위안을 주는 텅 빔과 상대를 가리지 않는 환대라는 개념에서 만족을 얻기에 급급해 역겨움이 주는 최음적 자극을 고려하지 않으려 했다. - P-1

95p. «자몽 반 개»
.."글쎄요." 로즈가 말했다. 그녀는 그것도 싫었다. 사람들이 뭔가를 암시했다가 바로 철회하는 짓. 그 음흉함. 사람들은 주로 죽음과 섹스에 대해 그런 짓을 했다. - P-1

102~103p. «자몽 반 개»
..그녀의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헛간은 잠겼고 그의 책들은 다시는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할 것이며 내일은 그가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는 날이 될 터였다. 그들은 모두 이런 생각에 익숙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때보다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못했다. 그런 질문을 했다면 아버지는 주제넘은 짓, 극적인 과장, 방종한 짓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로즈는 아버지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웨스트민스터병원, 늙은 병사들을 위한 그 병원에 갈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의 음울한 분위기, 침대 둘레에 쳐진 누렇게 바랜 커튼, 점점이 얼룩진 오물받이 등을 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리고 그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그녀는 바로 그 순간보다 더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뒤로 찾아온 뜻밖의 깨달음은 아버지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P-1

131p. «거지 소녀»
..헨쇼 박사의 집이 해낸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고향집의 자연스러움, 당연시하며 받아들였던 배경을 파괴한 것이었다. 그곳에 돌아가는 것은 말 그대로 조악한 조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 P-1

157p. «거지 소녀»
...바다에 면한 식사실의 벽 한 면은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돌출한 내닫이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꺼운 곡선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면 꼭 병 밑바닥을 통해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벽에 놓인 찬장 역시 가운데가 곡선형이고 광택이 났으며 보트처럼 커 보였다. 어디를 가나 크기가 눈에 띄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께였다. 수건과 러그, 나이프나 포크 손잡이의 두께, 그리고 침묵의 두께. 그곳에는 사치와 불안이 만연했다.... - P-1

159p. «거지 소녀»
...로즈는 패트릭의 어머니가 대화에 상상이나 추측이나 추상적인 말이 끼어들면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로즈의 수다스러운 말투도 싫어했을 것이다. 눈앞에 실재하는 것—음식, 날씨, 초대장, 가구, 하인들—에 대한 사실 관계를 넘어선 관심은 어떤 것이든 부실하고 본데없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푸근한 날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런 날에는 예전에 이러저러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라고 하는 건 괜찮지 않았다. 그녀는 기억이 떠오른다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 P-1

237p. «장난질»
...으레 그러하듯, 인생은 작은 효과를 위해 엄청난 소동을 피우는 법이다. - P-1

251p. «섭리»
...로즈는 겁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어두운 칸막이 안에 갇힌 채로 거친 객차용 담요를 덮고 그런 무자비한 풍경을 지나 어디론가 실려간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제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차의 진행은 항상 안전하고 적절하게 느껴졌다. 반면 비행기는 언제라도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고 질겁하여 외마디 저항도 못하고 바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 P-1

261p. «섭리»
...그녀는 자랑스러웠다. 자식을 위해 소리지르고 욕하고 분탕질을 하는 빈민가의 맹렬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빈민가의 엄마들은 너무 피곤하고 얼이 빠져서 좀처럼 맹렬하게 굴지 않는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힘을 내고 고자세로 압박할 수 있게 한 것, 집주인을 두렵게 한 것은 그녀의 중산층다운 확신, 정의에 대한 기대였다. - P-1

280p. «사이먼의 행운»
..그 무렵의 로즈는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그 여자처럼 꾸며낸 행동을 하는 것 같고, 방들을 내숭스럽게 꾸며놓았다고 느껴지며, 그들의 삶의 방식이 유난히 거슬릴 때(그 거울, 퀼트 이불, 침대 위에 걸린 일본 춘화, 거실에서 들려오는 아프리카 음악), 대개 그것은 그녀가, 로즈가, 그곳에서 바라는 관심을 받지 못한데다 계속 그럴까봐 걱정되고, 파티에 섞여들어가지 못했으며, 그렇게 이런저런 판단만 하면서 주변에서 맴돌 거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임을. - P-1

308p. «사이먼의 행운»
...그 일련의 과정이 시작되기 전의 풍성하도록 명료한 삼십 분 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은 세상을 지워버린다고, 사랑이 잘되어갈 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놀라울 것도 없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아이스크림 접시처럼 두껍고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 P-1

312p. «사이먼의 행운»
..사이먼의 죽음은 로즈에게 그런 어긋남으로 다가왔다. 터무니없었다, 부당했다, 그런 정보가 뭉텅 빠져버렸다는 것은. 로즈가 이 나이를 먹고도 오로지 자신만이 아무런 권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 P-1

332~333p. «스펠링»
..플로를 보니 로즈는 진통을 느끼기 시작한 산모가 생각났다. 그녀의 집중, 결연함, 급박함이 그러했다. 죽음이 자기 안에서 아기처럼 움직이다 곧 몸을 찢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음을 느끼는 거라고 로즈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쟁을 포기했고, 옷을 입고 서둘러 짐을 싼 뒤 플로를 차에 태워 양로원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죽음이 곧이라도 찢고 나와 플로를 해방시킬 거라는 로즈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 P-1

364p.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텔레비전 인터뷰 진행자로 일하던 시절, 자신감과 매력으로 환심을 사려 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다른 어디보다 이곳에서는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다들 알 것이 틀림없었다. 연기는 또다른 문제였다.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길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덜렁거리는 맨가슴이 아니라, 자신이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실패였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