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초원의 한편» ..나는 il이 미니멀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그는 식당에서 몇 마디, 호프집에서 몇 마디를 했는데 그 몇 마디가 며칠이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게 몇 달 만이라는 것이었다. 그간 회사의 회식 자리도 기피해왔고, 아파서 그렇기도 했지만 와이프와의 잠자리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잊어버려서 나한테 수업을 좀 받아야겠다고 했다. 어제 서울 반대편에 사는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왜 몇 달째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없었느냐며 역정을 내시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대꾸했는데 그는 나 그 전화 받고 깜짝 놀랐어, 하고 자기도 모를 일이라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결혼하고 나서도 신혼 때까지만 해도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찾아뵙고 전화드리고 그랬는데 말이야, 어머니 말처럼 난 정말 지난 몇 달간 까맣게 잊고 있었단 말이야. 단 몇 초도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을 안 했단 말이야. 마치 내게 엄마란 존재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겐 흥미가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말이 너무 많다. 쓸어내도 쓸어내도 정원로에 떨어져 있는 밤나무 이파리의 수에는 변함이 없다. 주워 담는 만큼 떨어지고 태워 없애는 만큼 새로 쌓인다. 죽은 사람은 어떤가. 그를 위해선 그저 책 몇 권만 읽으면 된다. 그의 말은 말끔하게 목록으로 정리되어서 찾기 쉬운 곳에 꽂혀 있다. 전화를 받기 위해 아무 때나 덮을 수 있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럭비공은 힘차게 나를 향해 날아왔다. 공이 해를 가리는 순간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아찔하게, 햇볕이 내 눈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공이 해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순간은 순전히 우연이고 흔치도 않은 순간이었다. 더불어 심부름꾼 소년에겐, 매우 귀한 순간이었다. 나는 내 눈이 햇볕에 맞아 터져버릴 듯 환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 모든 놀이의 모든 순간들 중에서 가장 좋았다. 나는 환희를 즐기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오른 끝을 향해 공을 던졌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정원은 일찍 어두워진다. 저 먼 쪽의 적송 무리는, 이제 한밤 속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뭇잎들은 빗방울을 모아두듯이, 햇볕을 모아두지는 못한다. 평범한 진리지만 장원에서 지내보지 못한 사람이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진리는 아니다.
«이 친구를 보라»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눈에 띄는 사건 사고 한번 저지르지 않고 무난히 학창 시절들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내 뒤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아서였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도와야 했던 탓이었다.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그는 내게,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있어야 할 바른 기준을 얘기했다. 자기가 얼마나 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를 따져야 해. 그게 바른 기준이고 이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질서란 얘기였다....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그는 옛날 얘기라고 전제를 달았다. 죽은 사람이 언젠가 그에게 혼자가 되어 손님을 맞았을 때 무례를 범하지 않는 법을 가르쳤다고 했다. ..손님에게 괜찮은 끼니, 어쩌면 훌륭한 끼니가 될 수도 있는 한 접시의 요리를 대접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했다. 죽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훌륭한 요리란 훌륭한 인상을 낳는다, 너와 너의 집에 대해. .."처음에는 죽은 사람이 날 가르쳤어. 다음엔 어머니가." ..그는 처음에는 죽은 사람이 그것들을 가르쳤고 그러곤 어머니가 그를 가르쳤다고 했다. 그다음엔 아내가 가르쳤고. ..어머니와 아내는 차례차례, 그가 마침내 혼자가 되었을 때 아무것이나 입에 퍼 넣지 않도록 교육을 시켰다고 했다. 아무것이나 아무렇게나 먹지 않을 수 있는 법을 그에게 가르쳤다고 했다. ..그는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아무것이나 아무렇게나 목구멍 너머로 퍼 넘기는 것은 타락이거나 방탕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타락과 방탕, 그 둘 다거나. 죽은 사람과 어머니, 아내는 그가 타락과 방탕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사실을 말하자면, 죽은 사람과 나의 관계는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피부 아래서 열흘이면 녹아 없어질 가용성 봉합사 같은 관계였다. 잠시 후면 삭아 끊어져 사라질. 우체국 통장에 입금이 되지 않으면 그걸로 끝날 관계. 하긴, 이제껏 내가 내 삶에서 맺어왔던 관계들 대개가 그러했다. 얼마나 잘 삭는지, 끊어지는지, 흉터 하나 남기지 않는.
해설 ...‘내가 이 지경이 된 이유’를 알고 싶었다던 백민석의 글쓰기는 기어코 제 글쓰기마저 제 것이 아니었다는 깨달음, 곧 제 글쓰기 자체의 허위를 간파하는 데까지 도달했으므로. 삶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던 작가였으니, 이러한 글쓰기의 절망이 삶의 절망으로 이어지기 전에 삶에서 글을 멀찌감치 떼어놓아야 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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