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 «장거리 주자의 고독»
...나는 출입문을 나선 뒤, 뻔뻔하게 배를 불룩 내밀고 골목 끝에 서 있는 떡갈나무까지 왕복하며 두세 시간 동안 열심히 달리다 가끔 이렇게 자유로워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게 죽어 있지만 좋다. 산 다음에 죽은 게 아니라 살아나기 전에 죽은 거라 좋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58p. «장거리 주자의 고독»
...잠시 후 그가 나무와 덤불 속으로 사라지자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장거리 선수의 고독이 어떤 건지 느껴지면서 이 기분이 바로 이 세상 유일의 성실이고 진실이며, 앞으로 이따금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남들이 아무리 다른 말을 해도 이 사실은 절대 변함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62p. «장거리 주자의 고독»
...서리가 내린 날 아침에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이 된 듯한 쾌감도 만끽했고, 여름날 오후에 이 세상 최후의 인간이 된 것처럼 앓아도 보았으니 이제 드디어 이 세상 유일한 인간이 되어 선악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너를 나무라지 않는 마른 흙을 신발로 박차며 달릴 때라고 한다....

93p. «어니스트 아저씨»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아픔이 가셨다. 씁쓸함이 소용돌이치며 사라지고, 지금까지 그 깊이를 알지 못했던 어떤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제 인도를 따라 한낮의 인파를 헤치며 걷는 그의 발걸음이 좀 더 단호했다. 그는 선술집의 회전문을 밀치고 바글바글 시끄러운 바 쪽으로 걸어가며, 이제 아무것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맥주병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고 가장 훌륭한 망각의 세계로 그를 인도할, 아름답고 치명적인 덫이었다.

143p. «어선이 있는 그림»
..나는 산송장으로 태어났어. 나는 속으로 계속 중얼거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산송장으로 살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처럼 그걸 깨닫기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고, 내가 어쩔 방법이 없을 때, 뭐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우라지게 늦어버렸을 때 드디어 그런 깨달음이 찾아오다니 안타까운 일이지.

261p. «프랭키 불러 쇠망사»
..그는 쓰레기통 뚜껑과 가로대로 만든 창을 휘두르며 자기 부대를 이끌고 가차 없는 돌팔매질을 벌였던 그 시절 이후로 나와 다른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나는 몰랐던 변화를 겪었다. 우리는 같은 계급으로 태어나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농담과 색조로 인해 잎은 시들었을지언정 인식의 뿌리는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접점을 느낄 수가 없었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에서 ‘고양된 의식‘이라고 일컫는 것을 소유한 사람답게 원인이 나뿐 아니라 프랭키에게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65p. «프랭키 불러 쇠망사»
..나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신호등을 무시한 채 비에 젖은 대로를 대각선으로 걷더니 한 버스를 쫓아가 텅 빈 발판 위로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책에 묻혀 이후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커다란 일부와 영원히 작별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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