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반드시 보수를 받아야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쿠라이 레이코를 방까지 안내했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는 더블 베드가 있었고, 사쿠라이 레이코는 창 너머로 펼쳐지는 해변을 바라보며, "아, 멋져" 하고 외쳤다. ‘아, 멋져‘라는 말투가 아주 특이했다. 언어가 이렇게도 의식이나 감정과 동떨어진 곳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표본 같은 말투였다. 또한 그 말에는 힘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좋아하는 여인과 여행을 떠난 남자가 사쿠라이 레이코와 같은 말투로 그 여인이 ‘아, 멋져‘라고 말했다면, 최악의 경우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28~29p.
"...그리고 선생님은 싫은 일을 명확히 싫다고 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 그것이 싫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모두 그렇게 살면서 메밀국수나 볶음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명확히 알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착각했던 거예요...."

37~38p.
"...그런 이문화의 슬럼 거리를 걸을 때는 절대로 잘난 체해서는 안 돼, 이방인이면서 방해꾼이라는 감각을 즐거워하며 그런 감각을 증폭시키고 걸어야 하는 거야, 거드름을 피워서도 안 되고 겁을 먹어서도 안 돼, 그 두 가지는 사실 같은 태도의 표리라고 해야겠지, 경계하면서 그것을 즐기며 걸어야 해...."

55~56p.
"...레스토랑은 무척 아담하고, 오래되었고, 웨이터도 손님도 모두 낮게 속삭이며 이야기하고, 그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 공간 속에서 따로따로 놀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져 들려와 마치 5월 초에 벚꽃이 진 후에 어리고 부드러운 나뭇잎이 일제히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 같았어요, 섹시한 기분이 들었어요, 섹시한 기분이 든다는 건 내 경우에는 증오심이 풀어진다는 뜻이에요, 당신과 만나서 사귀면서부터 나는 당신의 말에 깊이 침식당했어요,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금방 거기에 이름을 붙였어요, 레이코 너의 그 감정은 어디를 보나 증오심이야, 무슨 종인지도 모르고 키운 작은 동물이 갑자기 족제비라는 게 밝혀진 것 같은 느낌으로, 나는 그 증오심이라는 말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 증오의 감정이 언제 생겨났는지까지 정확히 지적했어요. 어릴 적 너는 뭔가를 포기했을 거야, 레이코 너의 증오심은 그때 생겨난 거야, 자세한 건 듣고 싶지 않아, 너는 어릴 적에 세계에 관여하는 것을 포기했을 거야,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자기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세계와 자신 모두를 증오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분화되지 않은 감정이라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어...."

79p.
...이것은 최후의 제안이다. 최후의 애정 한 방울이다. 야자키는 그렇게 적었다. 최후, 애정, 한 방울, 보통은 그런 말이 세 개나 늘어서면 우리 세대 사람들은 웃고 말 것이다. 1970년대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은 애당초 언어의 리얼리티를 믿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관계성에 기반을 둔 주고받기 속에서, 각종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의미는 쓸데없는 유희처럼 발생과 소멸을 거듭할 따름이다. 야자키의 제안은 부재를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부재를 받아들여. 그것은, 타인에 대해 관계성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인간이 발하는 가장 성실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1p.
"...물론 모든 SM플레이는 사회적인 행위지, 그러나 그건 모든 커뮤니케이션이란 사회적이라는 말처럼 공정한 어법이 아니야, 누군가가 또는 어떤 민족이 생존과 안전을 위해 타인이나 타민족에 대해 자존심과 자유를 방기하고 종속하는, 그것을 일상적인 차원에서 기본적으로는 테라피로서 연극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SM이라고 나는 생각해...."

149p.
..쿠바 사람은 일본인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졌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가혹한 역사를 살아온 노예와 이민의 자손들이기 때문인데, 그 에너지는 혁명에 의해 국가적으로 제어된다. 개인의 역동적인 힘을 국가적인 힘으로 변환시켜 서바이벌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20여 년을 산 일본은 개인의 역동적인 힘을 제압해 집단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사회라서 서바이벌이라는 개념이 없다. 일본에 있을 때는 몰랐다. 다른 무엇과 비교하지 않으면 한 사회의 특징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비로소 일본의 특수성이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살아남는다‘는 것과는 무관하게 지낼 수 있다. 주위에서 인정해 주는 집단에 들어가기만 하면 프라이드와 가치관을 보장받을 수 있다. 쿠바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개인의 에너지가 일본에서는 거의 거추장스런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안쪽으로 향할 때,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을 공격한다. 자기가 자기를 좋아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존경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경멸한다,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일부의 일본인은 집단이 던져주는 보장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자기 보장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자기 혐오감에 빠지고 만다....

166p.
...수면 부족에도 불구하고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배우 앞에서 내가 긴장을 풀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에게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그녀의 몸에 밴 그 외로움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인간에게도 공통적으로 있는 것을 그 사람이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197p.
...그러나 말이야, 레이코, 우리는 지금 우리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게 아니야, 저 음악은 쿠바인의 음악이야. 나는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자기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을 좋아하지 않아....

205~206p.
..왜 그런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필요했던 것일까.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 해변이나 음악이나 섹스나 스포츠나 소설이나 여행이나 마약이 아닐까. 그런 지점까지 가버린 인간에게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닐까? 소비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야자키와 여배우는 제로가 될 때까지 서로를 소비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결국에는 텅 빈 공허임을 확인하기 위해 두사람은 끝도 없는 섹스와 마약의 여행을 한 것은 아닐까. 노예이기도 하다고 여배우가 말했을 때, 왜 야자키는 슬픈 표정을 지었을까.

211p.
...너는 너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니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거야.

224~225p.
..여배우가 카르도소의 말에 따라 타일 위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카르도소는 여배우의 무릎이 아프지 않도록 쿠션을 깔았지만, 여배우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듯 타일 위에 무릎을 꿇고 등을 굽혀 머리를 낮게 숙였다. 경건한 크리스천이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보다도 더 마조히스틱한 자세였다. 그리고 그 굴욕적인 자세가 여배우에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인간에게는 이런 자세가 필요했을까, 그런 의문이 일었다. 왜 그런 의문이 일었는지는 모른다. 이런 자세는 필요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렵 사회에서는 이런 자세가 필요없지 않았을까, 언제부터 인간에게 이런 자세가 필요했을까, 용서를 빌고 패배와 죄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자세는 왜 생겨난 것일까. 그런 자세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인간의 자세나 행위 속에 도입한 것일까. 야자키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을까. 무릎을 꿇은 여배우가 무언가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굴복했을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 모습이 애절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공격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고 굴복한 여배우는 몹시 음탕한 느낌을 주었다.

238p.
"...당신은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만 흥미를 가져, 안정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것은, 안정된 사람은 자신에게 흥미를 가질 리 없다고 단정하기 때문이야, 당신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황량한 풍경밖에 없다는 고착된 생각을 가졌어, 당신이 그 황량한 풍경밖에 모르기 때문은 아니야, 당신은 원래 여러 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알아,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아름다운 풍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로 대단한 고통을 동반하지, 그 재현을 원하기 때문이야...."

244~245p.
...또한 교통과 길과 십자로의 상징인 엘레구아 신은 태어났을 때 너무 추한 기형이었기 때문에 십자로에 버려지는데, 오차우라라는 여신의 구원을 받아 질병을 치유하고 장난질 좋아하는 영원한 어린아이가 된다. 엘레구아는 세상의 모든 문 뒤에 숨어 있고, 다른 신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여배우는 아마도 산테리아의 신들처럼 끝이 없는 게임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인격도 없다. 그 가늘고 부드러운 몸이 녹아 타자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 자신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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