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p.
..「프라하의 학생」에서 주인공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악마에게 팔아넘긴다. 그 결과 그는 거울에서 자신이 배제된 세계만을 보는데, 보드리야르는 이것이 세계와 주체의 관계가 투명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세계는 낯설어지며, 주체의 자기 인식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보드리야르는 학생의 상象이 우연히 분실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팔린 것임을 강조한다. "악마가 이 상을 하나의 사물로서 주머니에 넣는 장면은 상품이 물신화되는 실제 과정의 환상적인 묘사이다. 우리의 노동과 행위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 객체화되고 문자 그대로 악마의 손으로 넘어가버린다."....

17~18p.
...사실 일상의 연극은 언제나 분장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몸과 인공적 부속물(또는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몸과 인공적 부속물들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몸)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나체의 전시가 금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말해주듯,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22p.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인식에 바쳐진 삶 또는 글쓰기에 바쳐진 삶이라는 이상과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문학제도 혹은 전통에 깊이 각인된 이 이상은 공간과의 관계 못지않게 시간과의 관계에도 관여한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를 단념하고 순수하게 관조적인 삶의 방식을 택한 다음부터, 슐레밀의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텅 비어버린다. 그의 삶의 매시간은 현실적인 내용이 제거된 채, 불멸의 작품을 만드는데 소모되어야 하는 동질적인 단위들로 바뀐다.

31p.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34p.
..통과의례는 의례를 통과한 집단과 아직 통과하지 못한 집단을 갈라놓는 게 아니라, 의례를 거치는 집단과 거치지 않는 집단을 갈라놓는다고 부르디외는 지적하였다....

73p.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 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옷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속옷이 나와 있는 것 등은 더럽다.

90p.
..그러므로 우리는 얼굴을 개인이 맡은 역할이나 그 역할에 대한 그 사람 고유의 해석, 혹은 연기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자기 이미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얼굴은 그처럼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 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할 때, 한마디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95p.
..."명예의 세계에서 개인은 진정한 정체성을 역할 속에서 발견한다. 그 역할에서 도망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같다. 존엄의 세계에서 그는 사회가 부과한 여러 가지 역할로부터 자기를 해방함으로써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역할들은 단순한 가면이며, 그를 환상과 소외와 자기기만에 빠뜨린다."

99p.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는 "실존에 눈뜬 개인"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현대 문화가 처한 곤경을 읽을 수 있다. 현대인이 사적인 공간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발견한다면, 이는 현대성의 기획의 실패를 의미한다. 더구나 우리는 이 고립된 개인들이 타자의 인정과 지지 없이 어떻게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적인 공간을 지켜주는 것은 개인의 자리에 대한 공적인 인정이 아닌가? 세계와 홀로 맞선 자아는 타자의 난입을 막을 수 있을까? 그레고르는 단지 방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그를 가둔 감옥의 문은 아무 때나 그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열린다.

123p.
..낙인자의 편에서, 이러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낙인자는 정상인들이 변덕스럽게 베푸는,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친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친절이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낙인을 지닌 개인은 명랑하게 그리고 자의식 없이, 스스로를 정상인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상인들이 그에게 당신은 우리와 동등한 존재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알아서 피해야 한다."

161p.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dignity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로저와 나」(1989)는 이 모순을 잘 보여준다.

167p.
...학교는 겉으로는 존중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경멸을 가르친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모욕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힘센 어른은 힘없는 아이들을 막 대해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겉치레로 하는 말과 진짜 메시지를 구별할 만큼 영리해진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아이를 경멸함으로써 학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마치 어른들이 입 밖에 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의 진실을 아이들이 연극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교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날마다 상연되는 잔혹극. 그러니 이 연극에서 몇 명쯤 죽어나가더라도 너무 호들갑 떨지 말기로 하자. 지금 아이들은 사회에 나갔을 때 꼭 필요한 두 가지 기술—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을—익히는 중이다.

176p.
...문제는, 정신적인 특징들 역시 따지고 보면 환경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흔히 영혼의 깊이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곤 하는 음악에 대한 취향은 청소년기에 어떤 음악에 주로 노출되냐에 따라 달라지며, 이는 다시 계급적이고 세대적인 변수들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우정이 지고의 가치로 찬양될수록, 벗을 선택하는 기준 자체는—데미안이 싱클레어의 이마에서 발견한 카인의 표지처럼—막연하게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193p.
...주는 사람이 주었다는 사실을 잊고, 받는 사람이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한, 환대는 주는 행위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대와 증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정의 조건은 환대임을 주장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204p.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213p.
..비유컨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다. 몸에 붙어 다니면서 몸의 자리를 표시해주는 무엇, 몸과 닮아 있고 몸을 흉내내지만, 몸의 고유한 표정을 모두 지워버리면서 그렇게 하는 무엇, 몸이 태어날 때 함께 나타나고, 몸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지는 무엇 말이다. 사람으로 인지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그림자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교환되는 상호작용의 의례는 개별적인 몸을 향하는 것 같지만, 기실 그림자에 바쳐지는 것이다.

215p.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285p.
..그런데 장소를 위한 투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단지 지구가 너무 좁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번 의미를 부여한 장소를 쉽게 잊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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