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p. ..훌륭한 선생 즉, 스승이란 이상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만 홀륭한 선생‘입니다. 그것은 격한 배움으로의 기동력을 가져옵니다. "이 선생님의 훌륭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야" 하고 믿을 때만(착각이라도 좋습니다) 사람은 폭발적인 배움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23p. ...생물에 관한 한 단일한 ‘정답‘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보다 ‘오해‘가 만연하는 것이 자신의 종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35p. ..‘이걸 할 수 있으면 된 거야‘라고 가르치는 선생님과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선생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배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 그 차이는 왜 생기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48~49p. ..당신이 그 ‘결말 없는 이야기‘를 생각해낸 것은 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정체성의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 일을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 연유를알 수 없는 과거의 에피소드를 왜 마침 지금에서야 생각해낸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에게 가르쳐주는 열쇠인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기억해낸 것은 내가 겪은 일을 알아주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52p. ..‘지금의 나‘는 무수히 많은 ‘그랬을지도 모르는 나, 앞으로 그럴지도 모르는 나‘를 공제한 ‘잉여‘인 것입니다. 그런 무수한 ‘가능성으로서의 나‘를 종횡으로 잇달아 세워 놓고서야 비로소 ‘지금 여기에 있는 나‘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67p ..기분 좋은 대화에서 말하는 측은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는 성취감을 느낍니다. 또 듣는 이는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전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말을 바꾸면 당사자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대화의 본질입니다.
75p.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얼굴을 확인할 수 있고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와 그 의미와 가치가 숙지된 재화를교환하는 것이 ‘교역‘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는 정반대로 풀립니다. 여기서도 우리들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모습이 보이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고 가치관이 다른 인간(그래서 잘 모르는 상대방)과도 소통했다는 성취감이 교역을 재촉한 ‘최초의 일격‘입니다. 그렇게 맛본 쾌감을 쫓아서 이제는 뭐라도 좋으니까 마구 교환하려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재화로서의 사용가치를 알고 있는 것도 교환되게 되었다는 게 이야기의 전개 순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91p. ..보시는 것처럼 대화가 이어지게 하는 것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하지만 대화는 이해에 도달하면 끝나버리죠.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고 싶지만 동시에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한 한 뒤로 미루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을 안고 있습니다.
109p. ..아이들에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로 제대로 표현해라"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저는 약간의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 의문을 품느냐면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로 제대로 표현해라"라고 말할 때에는 "말로 제대로 표현해라"라는 요청의 침입에 의해 "이것이 정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자문의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117p. ..내 생각을 어떻게 해석할까? 어떻게 평가할까? 그 모두를 당신에게 맡긴다는 약간 비통한 단념斷念을 고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면 이쪽의 의도를 읽어서 그 나름의 평가를 해주길 바라며 이것저것 말을 바꾸거나 새로운 단어를 조합해봅니다. 이 단념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을 다하기의 공적입니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에서 반드시 본질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는지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문장은 오독할 자유, 오해할 권리를 읽는 이에게 확보해주는 문장입니다.
128p. ..소세키가 선생님의 조건으로 들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를 사람‘, 또 하나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로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선생이란 존재가 ‘뭐가 뭔지 모를 사람‘이 되어버린 원인이 ‘뭔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에 있다고 하면 이것은 같은 경험의 앞뒤 두 가지 얼굴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건 결국 하나인 거죠.
131p. ..모든 제자는 스승을 이해하는 데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 실패하는 방식의 독창성에 의해서 다른 어떤 제자로도 대체될 수 없는 둘도 없는 사제관계로 계보를 잇게 됩니다.
132p. ..그런데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현명해진다든지 세상의 구조를 통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 정도‘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해서 "아, 그래 나의 아이덴티티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둘도 없음‘이 다름 아닌 나의 ‘어리석음의 정도‘에 의해 확인되는 거구나"라는 냉엄한 사실 앞에서 숙연해지던 차에 문득 젊은 객기로 마음껏 떠들던 때가 떠오르면 마침내 무기력한 ‘아저씨‘ 얼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141p. ..이것이 중요합니다. 장량이 황석공에게 태공망비전의 병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필승의 병법‘은 ‘필패의 구조‘에 몸을 둔 자만이 터득할 수 있음을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소통의 이야기로 바꿔 말하자면 ‘이해‘는 메시지를 적절하게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갖는 ‘오해의 구조‘에 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