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p. ..계속 걸으며 몸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몸과 마음이 합해진 것이 내가 아니라 몸은 그저 몸이다. 몸에게 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면 몸은 몸의 언어로 의사 표시를 한다. 그런데 마음이 그걸 곡해하면 마음은 그 원인을 몸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면 몸이 힘들어지는 찰나에 나쁜 마음들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77p. ..순례자 길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걷는 동안 잠시 작가의 삶을 살 뿐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하면서 그저 걷는 것. 원고지 1매, 1매를 써서 800매를 쓰는 것. 1킬로미터, 1킬로미터를 걷다가 800킬로미터를 걷는 것. 그저 글을 쓰는 것. 그 순간이 잠시 되어보는 것. 그때 걷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은 ‘나‘가 아니다. 직접 걸어보고 글을 써보면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을 잠시 살아볼 수는 있어도 걷고 나서도 계속해서 작가가 되거나 순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173p. ..나는 자신의 지옥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 대개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감추지만 아낌없이 자신의 지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된다. 모든 감정은 똑같은 크기의 감정이 받쳐주고 있다. 나의 지옥과 상대방의 지옥의 크기가 비슷해 보일 때,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생기고 동시에 밀어내는 힘도 생긴다. 그렇게 서로의 지옥이 된다.
234~235p. ..그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연결되는 모습들을 보았다. 행복의 조건 중 하나가 차별당하거나 거부당할 거란 두려움 없이 언제든 편하게 들를 수 있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느슨한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 환대의 공간. 공간을 지키는 데는 품이 많이 든다. 만약에 어떤 공간에서 마음이 편하고 많은 것을 얻어온 기분이 든다면, 그건 그 공간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의 것을 나눠줬기 때문이다. 한 공간을 만들고 지킨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나눈다는 마음 없이는 공간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공간을 만들고 지킨다는 것은 하나의 삶을 더 사는 것과 같다. 그 공간으로 사는 삶에는 기쁜 날도 있지만 슬픈 날도 있고 사실 대부분의 날은 지루하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그런 지루함을 이겨내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공간의 삶도 우리의 삶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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