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인간관계에 치여서 그런지 귀여운 무생물에 대한 집착은 날로 심해졌다. 라이언 마우스패드는 날 배신하지 않으니까. 올라프 볼펜은 본인 일을 내게 떠넘기지 않으니까. 보노보노 탁상용 선풍기는 입방정을 안 떠니까. 그렇게 하나둘씩 온갖 귀여운 얼굴들이 사무실 책상 위를 점령했다.

...그러나 양말은 사정이 달랐다. 양말까지 간섭하는 건 ‘그 정도’를 넘어서는 문제였다. 알베르 카뮈는 불세출의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에서 "농(프랑스어로 ‘아니다’, ‘안 된다’는 뜻)"은 ‘여기까지는 좋지만 이 이상은 안 된다’ ‘당신, 너무하지 않은가?’의 의미라고 했다. 바로 그거였다. 머리카락 색깔까지는 좋지만 양말과 스타킹의 색 조합까지 단속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고등학생까지는 그렇다 쳐도 유치원생한테까지 만세삼창을 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회사를 그만두고 반백수처럼 지내는 동안 많이 의기소침해졌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하루는 아무 날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만 내 존재가 인증될 텐데,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니 내 존재가 사회에서 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날은 예쁜 양말을 신을 가치가 없는 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일상이 회사원 때와는 다르게 채워지고 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인간인 내 모습보다는, 혼자 일하고 혼자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자연인(?)인 나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스케일링을 받으러 치과에 가는 오늘 같은 날 브라만 칸에서 울트라바이올렛 앙고라 양말을 꺼내 신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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