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언어로는 미처 숨기지 못한 눈가리고 귀막기 식의 현실인식과 허술한 자기객관화 능력. 갖가지 이상으로 치장한 주장들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은 두루뭉실하거나 아예 부재하며, 실질적 ˝내용˝으로 뒷받침하지 못한 채 늘어놓은 언뜻 현혹적인 단어와 문구들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리하게 파악하고 구성된 의도가 보여서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무색하다. 제목과 책 소개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대하며 읽은 책인데 실망을 넘어 실소하게 만드는 부분까지 있었다.

23~24p.
..‘나의‘라고 말할 때의 ‘나私‘. 나는 ‘나‘라는 개별적 존재를 확신하고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무수한 세균과 세포 들로 이루어져 있는 ‘통생명체holobiont‘이며, 나의 내부에는 생물로서의 복수성이 있다. 이를 전제하고서 ‘나의‘라고말할 때의 ‘나‘, 이는 내 의사 결정 조직의 일인칭이자 언제나 유동성을 띠고 있는 임시 주어다. 끊임없이 요동하면서도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삶을 뭉개버리려고 하는 힘에 최대한 저항하기 위해 박아넣는 쐐기의 일종, 그것을 여기서는 ‘나‘라고 한다....

35p.
..괴로움의 윤곽이 또렷해진 것은 문장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솟구쳐 올라 멈추지 않는 것을 써서 모아보자고, 느닷없이 생각했다. 글을 쓰자 비로소 내가 무엇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지 명확해졌다. 나는 어디를 가든 기호인 것이다! 기호에게는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이 있고, 그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힘이 거세게 작용한다. ‘여자‘ ‘딸‘ ‘젊은이‘. 나는 그것들을 핑계 삼아 언젠가 ‘가야 할 길‘을 갈 거라고 상정되었다. 내가 나로 취급받지 못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고통이었다.

47p.
..나는 써야만 한다. 무엇을?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내가 지각한 것, 내가 생각한 것, 나 자신의 족적에 대해 되도록 많이, 되도록 자세히 써서 남겨야 한다. 나는 그런 관념에 홀려 있다. 홀려 있다고 말하면 악령에 씐 것처럼 들리고, 실제로 그건 악령일지도 모른다. 문자로 쓰는 행위에 의해 놓치는 것도 적지 않다. 소설가 나카지마 아쓰시는 단편소설 <문자화文字禍>에서 문자가 사람의 두뇌를 해치는 혼이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그림자를 보도록 만드는 혼이다. 문자의 혼에 매료되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

62p.
..여기까지 써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좀 그렇지만, "죽여버린다"라는 말을 너무 자주 입 밖에 내는 것은 좋지 않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나 지나치게 외쳐대면 살의가 점점 가벼워지고,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어이없는 상대에게 살의를 쏟을 가능성이 생긴다. 살의는 소중히 여기는편이 좋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누구 하나가 사라져서 만사가 해결되는 상황은 거의 없다(주모자를 때려눕혀서 문제를 해결하는 픽션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그런 종류의 묘사는 사회의 존재를 은폐한다고 본다). 나는 자기 테러라면 지지해도, 테러리즘은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122~123p.
..두 사람이 만나는 세미마루의 암자가 위치한 곳은 관문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오사카산이다. 도읍과 외부 세계를 잇는 장소, 도시의 외곽. 말하자면 두 사람은 도읍의 질서와 외부 세계의 무질서가 맞붙는 장소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도읍 쪽에서 보면 그곳으로부터 쫓겨난 비슷한 처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외곽 쪽에서 보면 ‘중앙‘에서 쫓겨났어도 여전히 천황가의 취미로 계승되어온 비파를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가 방문할 수 있는 고정된 주소를 가진 세미마루와, 스스로 ‘중앙‘의 바깥으로 나와 지저분한 모습으로 홀로 떠돌며 세미마루와 재회한 후에도 방랑을 계속하는 사카가미는 역시 상황이 다르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질서 바깥으로 완전히 나가는 것은, ‘중앙‘에 대한 비평성은 동일해도 행동의 성질은 전혀 다르리라고 본다.

160p.
..목욕을 하면서 모든 것에 사무치게 염증이 났다. 큰 실패를 했을 때 느끼는 지금 당장 사라지고픈 절망감이 아니라, 몇 년 뒤의 파멸을 며칠에 걸쳐 확신했을 때 느끼는 허무함이다....

181p.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 새삼 드는 생각은, 이불이 갈등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천 사이에서 일어난다/잔다, 할 수 있다/할 수 없다, 노력한다/노력하지 않는다, 이상/현실, 그리고 생/사까지 온갖 것이 복잡하게 충돌하니까요. 갈등은 결코 마음 편하지 않고,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192p.
..나는 병에 걸려서 잘됐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병 때문에 많은 시간을 잃었다. 인간관계도 변해버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도 분명히 존재한다.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꼼짝하지 못할 때 바라보는 천장, 존재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 속에서 어루만지는 내 두 팔의 감촉은 나의 시야를 적잖이 넓혀준 것 같다. ‘성장‘이라고는 절대로 부르지 않겠지만, 나의 현실은 병으로 인해 확장되었다.

197p.
..이런 기분도 결국은 ‘고질라가 되어 모조리 밟아 뭉개고 싶은 욕구‘와 뿌리가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안의 끝없는 살의도 끝없는 호의도, 결국은 대상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무책임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살의를 움켜쥐고 있다 해도 나는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의 에너지를 앞두고 그 살의를 실행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가 사랑스럽다 해도 "그럼 지금부터 생판 모르는 이 사람과 손을 잡고 서로 바라보며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봐"라는 말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을 향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결과를 바란다면 벡터를 정해야 한다. (고질라가 아닌) 나의 신체로 모든 방향을 향해 광역 공격을 해봤자 위력이 분산되니 효과가 없다. 상대에게 공격당할지도 모르는 거리까지 다가가, 대상을 정해서 에너지를 써야 한다(항상 현실적인 결과를 바라는 건 당연히 옳지 않지만, 기왕 한다면 이기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마음으로 하든간에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그 대상과 진심으로 마주해야 한다.

225p.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마음인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이고 커다란 하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무수한 인간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편리한 건 없을 터다. 그 공유된 하나의 마음을 말로 표현해주면 그것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감동받을 테니까.

227p.
..지금은 복잡한 합의 형성을 광범위하게 이루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지를 치밀하게 언어화하는 작업, 자신의 우주를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것으로 재인식하는 작업을 당연한 일로 여기며 게으름 부리지 말고 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 종잡을 수 없고 나조차도 설교 같다고 느끼는 문장 또한 ‘개인‘을 지우지 않기 위한 실전의 일부다. 그때그때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글로 쓰면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 풀린다. 오늘 밤은 어젯밤보다 조금 낫다.

231~232p.
...폭력이 풍경으로 처리될 때 폭력에 대해 가져야 할 의문은 내버려진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스스로 자명하다고 여기는 풍경 그 자체다. 풍경을 받아들임으로써 폭력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 그 간과가 폭력의 진행에 가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신체화해서 뼛속 깊이 받아들인 지 오래인 그 풍경을 몇 번이라도 타자화하여 다시 바라봐야 한다.

235~236p.
...풍경을 부수는 방법은 무한하며, 사소하더라도 그 가치는 경멸당해서는 안 된다. 어느 컵으로 넣은 물이 풀장을 터트릴지 모르니, 어떤 컵도 깨트릴 필요가 없다.

253p.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제임스 C. 스콧은 저서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에서 ‘아나키스트 유연 체조‘라는 것을 제창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언젠가 자신의 신조로 인해 중대한 규칙 위반을 범하는 날이 오는데, 그 디데이에 원활하게 법을 위반하려면 평상시부터 소소하게 법률을 어기며 몸을 유연하게 풀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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