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 ...정적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감돈다고 생각했던 나는 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꽃밭이 고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무서워졌다. 하나의 존재가 수없이 모여 있을 때 정적도 깊어진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42p. ..그녀는 전철을 탔다. ..나는 그녀의 등을 보았다. ..그 등을 본 순간, "아, 속았구나" 하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 등은 나와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시원스럽게 끊었다. 그녀의 의식에서 그 순간 이미 나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음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112p. ..사람이 죽은 직후의 집에는 집 전체가 흐느껴 운 뒤처럼 얼얼한 외로움이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너무 착해졌다. ..찾아오는 사람도 드문드문해지고 웅성거리던 집이 고요해지자, 우리는 그제야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떨치려고 애쓰는 게 서로 어색했다. 마치 배가 고픈데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을 때 같은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고타쓰에 마주 앉아 서로 어디를 보아야 좋을지 몰라 했다.
116~117p. ..어느 날 초저녁,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죽은 다마를 싸 큰 소리로 울면서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선 채 하염없이 울었다.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나는 아주머니가 하염없이 우는 것은 자식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124p. ..나는 걸레로 방바닥을 닦았고, 다나카는 불결하다는 듯이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애는 책상에 돌아온 내게 "사노, 대단하네"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부끄러워졌다. 뭐든 자신이 처리하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27p. ..곧 겨울이 올 것 같은 밤이면 아들과 나는 고양이를 기다린다. ..나와 아들은 떠난 고양이까지 키우고 있다.
152p. ..베를린이 나쁜 도시였던건 아니다. 밀라노가 특별히 아름다운 도시인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듯이 도시와의 궁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고 밀라노에 살고 싶다고 사는 내내 생각했다. ..밀라노는 내게 즐거운 추억만 남겨주었다. 그러나 궁합이 나빴던 베를린은 즐거움 이상의 무거운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한 번 더 어느 도시엔가 갈 수 있다면 나는 나를 거부하고 내가 증오한 베를린에 주뼛거리며 가보고 싶다.
161p. ..기저귀를 가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 비닐봉투에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구별하는 게 아니다. 구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상력 풍부하게 살고 싶다. 불손하지만, 많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상상력은 난처한 일을 산더미처럼 안고, 남들이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 생활을 평범하게 쌓아가며 얻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70p. ..나는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여자들이 윤리와 역사와 여성의 생리 구조 등을 거론하며 어려운 말로 자기주장을 역설하면 왠지 무서워진다. 너무 어릴 때 아무 자각 없이 자신의 벽을 간단히 허물어버린 나는 의식과 지식을 축적해 ‘해방‘이란 것에 도달한 잘나가는 여자들과 닮은 듯 보이면서도 아주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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