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
...길에서, 버스에서, 전차에서 마주치는 이 확실한 시각언어가 무척 인상 깊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대한 도시에서 교복 덕분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달리 분류되기도 하고 하나로 동일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복은 각기 어떤 학교에 소속되어있음을 나타낸다. 콜카타에서 내 또래들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동시에 하나의 무명성을 즐기는 듯 보였다. 교복의 효과는 바로 이거다.

26p.
..생각할수록 표지가 일종의 번역, 내 말을 다른 언어로 해석한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책 내용을 대표하지만 그 자체는 아니다. 너무 문자적이어서는 안 된다. 책을 자기 식대로 담아내야 한다.
..그래서 번역이라 할 표지는 책에 충실하거나 빗나갈 수 있다. 이론상으로 표지가 번역이라면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지켜지는 건 아니다. 표지가 내용을 압도할 수도, 지배할 수도 있다.
..아무튼 표지는 작가와 이미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요한다. 강요된 관계이기 때문에 극도의 소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난 당장 멀어지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표지는 내 말을 만지고 내 말에 옷을 입힌다.

48p.
..지금은 책을 사면 다른 것들도 덩달아 얻는다. 작가의 사진, 이력, 서평. 이 모든 게 상황을 복잡하게 한다. 혼란을 일으킨다. 길을 잃게 한다. 난 표지에 실린 논평이 못견디게 싫다. 그것 때문에 가장 불쾌한 영어 단어 ‘blurb‘를 알게 됐다. 표지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싣는 건 적절치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독자가 내 책에서 만나는 첫 단어는 내가 쓴 말이길 원한다.

62p.
..명망 높은 모던 라이브러리,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 같은 미국 전집에 들어 있는 책들은 고전적 가치를 표현한다. 전집은 이젠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훌륭한 작가에게 보내는 경의다. 이런 경우에 단일성은 문학 규범에 속한다는 표시, 영원히 계속될 말에 입힌 변하지 않는 옷이다.
..그런 종류의 옷은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것, 대부분 사후에 주어지는 상이다. 열에 아홉은 작가가 사망했다. 동시대의 책, 젊은 작가는 그런 상을 받을 자격이 부족할 것이다. 생존 작가와 고인이 된 작가들이 섞여 있는 유럽의 전집과는 달리 미국 전집은 마치 사당 같다.

83p.
..멋진 우연의 일치로,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로마에서 모란디 전시회와 마티스 전시회가 동시에 열렸다. 그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모란디 정물화 포스터가 오른쪽에, 마티스 작품 포스터가 왼쪽에 있는 걸 봤다. 두 포스터 가운데 서 있다 보니 잠깐 내 몸이 내 책의 페이지로 바뀌고 두 그림으로 옷을 입은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90p.
...라히리는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표지는 단순히 책이 입는 첫 번째 옷일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시각적 해석 혹은 출판사의 견해와 갈망이 담긴 홍보용 해석이며, 작가와 독자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면서 작가의 말을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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