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그냥 무대에 있고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배우였다. 누군가 죽어도 반드시 죽은 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그것은 각본이 있는 일 같았고, 다들 비극에 아이러니가 녹아 있는, 저마다 외우다시피 한 대사가 있었으며, 마치 죽음 자체의 현실감을 포낭째 파괴하려는 듯 다들 죽음을 다른 말로 바꿔 불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체를 걷어찼다.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그들은 보졸의 은어를 썼다. 그들은 테드 라벤더의 보급품인 진정제에 관해서도 그 불쌍한 놈이 전혀 감각이 없다고, 이 얼마나 진정된 것이냐고 이야기들을 했다.

..빗속에서 잠깐, 크로스 중위는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마사의 회색 눈과 마주쳤다.
..그는 이해했다.
..그는 매우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속에 가지고 다니는 것들. 남자들이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

...어떤 면에서는 딸아이가 맞는 것 같다. 나는 잊어야 한다. 하지만 기억하는 일의 요점은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은 인생 속 어딘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에서 글감을 찾아 가져온다. 기억의 차량이 당신 머릿속의 원형 교차로에 흘러들어 거기서 한동안 맴을 도는데, 그러면 이내 상상이 끼어들고 다 같이 뒤섞이다 차량이 천 갈래의 서로 다른 길로 제 길을 서두른다. 작가로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길 하나를 골라 운전해 가면서 당신에게 닥쳐오는 것들을 그대로 적는 것이다. 그게 진짜 강박이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마흔세 살, 전쟁은 반평생 전의 일이 되었으나 기억하는 일은 아직도 그것을 현재로 만든다. 그리고 기억하는 일은 가끔씩 이야기로 이어져 그것을 영원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야기는 지난날을 미래와 이어주려고 존재한다. 이야기는 당신이 있었던 자리에서 당신이 있는 자리로 어떻게 다다랐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슥한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이야기는 기억이 지워진, 이야기 말고는 기억할 게 없는 영원의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위기가 극에 다다르면─악당이 충분히 악하고 선인이 충분히 선하면─지난 세월 내 안에 쌓아온 용기의 저장고를 군말 않고 두드릴 생각이었다. 나는 용기가 우리에게 유산처럼 유한하게 주어지므로 그걸 절약의 자세로 은행에 넣고 그 이자로 도덕적인 자산을 꾸준히 부풀려 훗날 계좌에서 인출해야 할 때를 대비하는 게 옳은 줄 알았던 것 같다. 위로가 되는 이론이었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그날그날의 자질구레하고 성가신 행동을 죄 감면해주었다. 그것은 번번이 비겁해지는 사람에게 희망과 체면을 불어넣어주었다. 그것은 미래를 청산하면서 과거를 정당화했다.

...그 남자의 자제력은 대단했다. 그는 결코 캐묻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거짓말이나 부정을 하는 입장이 되도록 몰아가지 않았다. 나는 그의 과묵함이 아직도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 미네소타의 전형적인 면이었다고 보는데, 내가 만약─팔이 네 개에 머리가 셋인─끔찍한 불구의 몸으로 배회하고 있었더라도 그 노인은 분명 팔과 머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그건 단순한 예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어, 그 남자는 말로 충분하지 않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내 문제는 논의의 범위를 이미 넘어 있었다. 그 긴 여름 동안 나는 다양한 논쟁을 거듭하며 모든 찬반양론을 살폈고, 그것은 이제 순수이성 행위로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였다. 지성은 감성에 맞서지 못했다. 양심은 나더러 달아나라고 말했지만 어떤 비이성적이고 강력한 힘이 저항해 마치 그 육중한 무게로 나를 전쟁으로 떠미는 것 같았다. 결국은 멍청하게도 수치심에 이르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멍청한 수치심. 나는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내 부모님도, 내 남동생과 누이도, 심지어 고블러 카페에서 죽치고 있을 사람들도. 나는 팁 톱 오두막에 머물러서 부끄러웠다. 나는 내 양심이 부끄러웠고 양심적인 일을 하느라 부끄러웠다.

..20년이 지나 돌아보니 나는 가끔 그 여름의 일들이 다른 어떤 차원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살아보기도 전에 삶이 존재하는 차원, 그리고 그 삶이 나중에 진행되는 차원. 그 일은 지금껏 한 번도 현실 같지 않았다. 팁 톱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내 살갗을 빠져나와 지근거리를 맴돌고, 그러는 사이 내 이름과 얼굴을 한 웬 딱한 얼간이가 스스로는 이해도 못 하고 이해할 생각도 않는 미래로 나아가려고 낑낑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바로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가 전쟁에 갈게요─가서 사람을 죽이고 그러다 어쩌면 죽을게요─쪽팔리기 싫으니까요.

..전쟁을 일반화하는 건 평화를 일반화하는 것과 같다. 거의 모든 게 진실이다. 거의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다. 핵심을 보면 전쟁은 아마 죽음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말하겠지만, 죽음이 가까워지는 만큼 삶이 가까워진다. 화력전이 끝나면 항상 살아 있다는 엄청난 기쁨이 든다. 나무들이 살아 있다. 풀, 흙─모든 게 살아 있다. 당신 주변의 사물들이 온전히 살아 있고, 그것들 사이에서 당신이 살아 있고, 그 살아 있음이 당신을 전율하게 만든다. 당신은 당신의 살아 있는 자아를 강렬하게, 사무치게 깨닫는다─당신의 가장 진정한 자아, 당신이 되길 바라고 그 간절함에 언젠가 되고 말 인간. 악의 한가운데서 당신은 선한 사람이길 바란다. 당신은 품위를 바란다. 당신은 정의와 관용과 인간적인 화합을, 당신이 바라는 줄 몰랐던 것들을 바란다. 거기에는 일종의 관대함, 일종의 독실함이 있다. 좀 터무니없지만,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만큼 당신이 살아 있는 때도 없다. 당신은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제 막, 마치 처음인 양 당신은 당신 자신과 세상 속에서 으뜸인 것, 잃어버릴지 모를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저물녘, 당신은 참호에 앉아 분홍빛의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넓은 강을 마주하고 저 너머 산들을 바라보면서, 비록 아침에는 저 강을 건너 산에 들어가 끔찍한 짓들을 해야 하고 어쩌면 그사이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강물에 비친 고운 색깔을 꼼꼼히 살펴보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해가 지는 모습에 경이감과 경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 세상이 따를 수 있었고 언제나 따라야 했지만 이제는 따르지 않는 방식에 대한 열렬하고 아픈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그녀가 겪은 일은 그들 모두가 겪었던 일이라고 랫은 말했다. 깨끗한 몸으로 건너와도 한번 때가 묻으면 그 뒤로는 절대 되돌릴 수 없어. 정도의 문제지. 멀쩡하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거야. 메리 앤 벨의 경우 베트남이 마약처럼 강력한 효과를 낸 듯했다.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주삿바늘을 찌를 때 오는 알 수 없는 공포와 알 수 없는 환희의 뒤섞임. 엔도르핀이 돌기 시작하면 그다음엔 아드레날린이 돌고, 그러는 사이 조용히 숨을 죽이고 달빛의 야경에 스르르 동화된다. 위험과 친해진다. 마치 지구의 다른 쪽 반구에 가닿듯 자신의 저쪽 모습을 접하게 되고, 그러면 하염없이 시간을 끌면서 여행길이 어디로 이끌리든 몸을 내맡겨 자기 안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싶어진다. 나쁘지는 않아, 그녀는 말했다. 베트남은 그녀를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더한 걸 바랐고, 즉 그녀 자신의 미궁으로 더 깊이 파고들길 바랐고, 얼마 안 가 그 바람은 필요가 되더니 그 뒤에는 열망으로 바뀌었다.

..비가 어찌나 그치질 않던지. 한기가 어찌나 뼛속에 스며들던지. 때로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일은 밤새 앉아서 뼛속의 한기를 느끼는 일이었다. 용기가 언제나 예, 아니요의 문제였던 건 아니다. 때로 그것은 한기처럼 정도의 문제로 다가왔다. 때로 어느 선까지는 매우 용감하다가도 그 선을 넘으면 별로 용감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놀라운 일을 해내다가도, 적의 포화 속을 전진하다가도 다른 상황에서는, 별로 나쁘지 않다 싶은 상황인데도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똥밭에서 보낸 그날 밤처럼 때로 용기와 비겁함은 뭔가 작고 시시한 차이가 있었다.

..총에 맞는 건 일말의 자부심을 건질 수 있는 경험이어야 한다. 마초적인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다만 그 일에 관해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총알이 주먹처럼 단단하게 날리는 타격, 숨을 토하고 콜록거리게 만드는 그 충돌, 웬일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들려오는 총소리, 그리고 아득한 느낌, 당신 자신의 냄새, 이 직후 당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할 일들, 작고 흰 조약돌 내지 풀잎에 주목하는 당신의 눈길과 그때 비로소 당신에게 드는 생각, 이런, 저게 내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보는 거구나, 저 조약돌, 저 풀잎, 즉 당신을 울고 싶게 만드는 것들.
..자부심이라는 단어는 알맞지 않다. 나는 알맞은 단어를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건 쪽팔림이 느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치심이 그 일의 일부여서는 안 된다.

..지금은 1990년이다. 나는 마흔세 살, 4학년 아이에게는 불가능해 보였을 나이이지만 1956년에 머물러 있는 사진 속 내 모습을 보면 중요한 면들은 전혀 바뀌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때 나는 티미였다. 지금은 팀이다. 하지만 본질은 똑같이 남아 있다. 나는 헐렁한 바지나 스포츠머리나 행복한 웃음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나는 내 눈을 잘 안다─카메라를 보고 웃는 티미는 여지없이 지금의 팀이다. 몸 안에 또는 몸을 뛰어넘어 무언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인간의 삶은 전체가 한 덩어리이며 마치 스케이트 날이 빙판 위에 그리는 고리(loop) 같다. 어린아이, 스물세 살의 보병 병장, 죄책감과 슬픔을 아는 중년 작가.

..그녀는 때로 놀라운 얘기를 했다. "한번 숨이 붙은 건," 그녀는 말했다. "영원히 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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