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이 어려운 이유는 웬만한 유품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데 있어. 한두 번 입은 옷이라든가, 옷장에 모셔두기만 한 보석이라든가, 죽기 사흘 전에 맞춘 안경이라든가, 그런 물건으로 얼렁뚱땅 나를 속이진 않았어. 내가 찾는 건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야. 그게 없으면 살아온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는 그 무엇, 죽음의 완결을 영원히 저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지. 추억 같은 감상적인 감정과는 관계없어. 물론 금전적인 가치 따윈 논외고."

.."장례식은 일종의 축제야. 지루한 일상에 불쑥 끼어든 죽음이라는 사태 앞에서 다들 흥분해 호르몬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행동도 부자연스럽고 냉정을 잃게 되지. 그런 때는 옆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상복만 입고 있으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명심해, 주뼛거리면 안 돼. 연기할 생각은 하지 마. 어두운 바닷속을 헤엄치는 심해어처럼 유연하게 행동하는 거야."

..잔디 위를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공이 보였다. 그 궤적이 너무나 날카로워서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사의 손은 아직 내 등에 놓여 있었고, 밀짚모자 밖으로 나온 소녀의 머리카락은 내 어깨 위에서 나부꼈다. 순간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함께 이루어냈다는 일체감에 휩싸였다. 셋이서 힘을 합해 전직 외과의사의 육체의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물건을 보존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네요."
.."당연하지. 물건은 그냥 내버려두면 삭아서 없어지고 말아. 벌레, 곰팡이, 열, 물, 공기, 소금, 빛, 전부 적이지. 하나같이 세계를 분해하고 싶어서 안달해. 변하지 않는 건 이 세상에 없어."

..촛불은 약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둠이 넓어진 만큼 다섯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다섯 개의 그림자가 하얀 식탁보 위에서 너울거리며 겹쳐졌다.

..현미경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신이 렌즈 밖이 아니라 슬라이드글라스와 커버글라스 사이의 작은 물방울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추억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물론 나에게도 부모는 있었어. 첫사랑도 있었을 테고, 결혼도 했을지 몰라. 하지만 잊어버리면 아무것도 없었던 것과 같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여기 있었어. 그리고 지금도 여기 있어. 분명한 건 그것뿐이야. 그 간극을 메워주는 건 유품뿐이고. 그걸로 충분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소복이 쌓인 눈은 밟기 꺼려질 정도였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흔적이 추하고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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